'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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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성을 사랑하게 되어 결국 결혼에 골인하자 두 사람이 싱글일 때는 전혀 고민해 보지 않았던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혼과 동시에 그녀는 '아내'와 '며느리'라는 호칭을 얻게 되었는데 내가 옆에서 보기에도 썩 좋은 위치는 아닌 듯 했다.

첫 명절에 아내는 내게 왜 처가가 아닌 시댁에서 명절을 보내야 하는지를 물었다. 불행히도 나는 아내의 간단한 질문에 명쾌하게 답을 해주지 못했다. 다행히 우리 집안은 명절 제삿날에 남자 여자고 할 것 없이 음식을 나르고 치우는 일에 함께 하는 집이었다.

아내가 설거지를 할 때 큰어머니는 나에게 함께 도우라고 눈치를 주는 센스있는 분이었지만, 처가에 먼저 갈 수 없는 근본적인 상황 자체를 바꿀 수는 없었다. 단순히 우리 부부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명절이 끝나면 매번 직장, 친구들 모임에서 며느리의 낮은 사회적 지위에 관한 성토대회가 자주 열리곤 했다.

아내가 임신을 했다. 생명의 신기함과 아빠됨의 설렘을 만끽하고 있을 즈음 지방에 사시는 아버지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는 우리 부부에게(엄밀히 말하자면 나에게만) 당신이 이미 아이의 이름을 지었노라고 말했다. 그것도 집안의 '돌림자'에 맞춰서. 따지고 보면 내 이름도 집안 돌림자의 법칙에 맞아 떨어지는 이름이다.

얘길 전해들은 아내는 속상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번에도 아내는, 남편의 성을 따는 것도 모자라서 이름 두 글자 중에 하나마저 남편 집안 룰을 따르는 것이 불합리하지 않냐고 물었다. 10개월 동안 정성스레 품었다가 해산의 고통 후에도 육아를 전담해야 하는 아내의 처지에서 볼 때, 특정 집안의 대를 잇는 과정에서 마치 투명인간처럼 존재감 없는 며느리의 처지를 제대로 인지하게 된 듯 했다.

나 또한 아내의 속상함에 공감했다. 이렇듯 매사에 논리에 능한 나였으나 아내의 질문은 항상 답하기가 쉽지 않았다. 다행히 아이 이름짓기 사건은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을 아내가 마음에 들어함으로써 하나의 헤프닝으로 끝났지만, 지금에 와서 고백하건대 나는 출생신고를 하기 직전까지 이런저런 걱정에 잠을 뒤척였다. 만약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을 아내가 끝내 원치 않았다면, 결국에 나는 아내와 상의해서 아이에게 한글 이름을 지어줬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마음의 결정을 하기까지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처음으로 평소에 관심도 없던 우리 집안의 어떤 강한 힘이 나를 옥죄는 느낌을 경험했다. 희한하게도 부모님과 집안 친척들이 선한 의도로 우리 가정에 개입을 하였으나 자주 아내는 집안 대소사에 상당한 참여와 기여를 함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자발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여성 문제의 구루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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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태어나고 육아와 가사를 분담하기 시작한 이야기는 이미 이전 글에 언급한 바 있으므로 생략한다. 다만, 결혼 이후에 감지된 이런 불합리한 느낌의 실체를 알고 싶어졌다. 더욱이 아내를 이해하려고 들면 들수록 내 어머니의 평생에 대한 안타까움 또한 커져갔다. 이러한 정서들은 머리 속에서 더욱 자라나서, 만약 내가 여자로 태어났다면 이런 처우들이 내가 기꺼이 감내할 수 있을 법한 일들인지 더욱 고민하게 되었다. 이렇게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란 존재에 대한, 전에는 갖고 있지 않던 낯선 생각들이 내 이성을 자극했다.

나는 대체로 궁금한 영역이 있으면 책을 찾아 읽는 편이다. 지금도 지적 호기심이 발동하면 입문서나 개론서를 읽고 유명한 강사들의 강의를 찾아서 듣기도 한다. 여성 문제는 아내와 결혼하고서 얻은 간접 경험을 통해 관심이 커졌으나 단순히 경험에 그치는 가정 안에서의 처세나 개인의 윤리로 치부하기엔 답답한 구석이 많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이가 태어난 이후부터 최근 2, 3년간 많은 여성주의 학자들, 저자들의 책을 읽으며 이 문제를 좀 깊이 연구하기 시작했다. 질문은 내 아내로부터 비롯되었지만 그 논리적인 모순을 풀어내는 지적 작업의 상당 부분은 책 속 여성 구루(힌두교, 불교, 시크교 및 기타 종교에서 일컫는 스승으로 자아를 터득한 신성한 교육자를 지칭)들의 도움이 있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해서, 이번 글에서는 나에게 도움을 준 여성주의 관점의 선생들 두 사람을 언급하고 그 외에 도움을 준 책들을 소개하는 것으로 글의 말미를 갈음할까 한다.

정희진. 내 여성주의 관점의 지적 여정에서 '텍스트' 격에 속하는 저자는 정희진 선생이다. 최근 <경향신문>과 <한겨레>에서도 신선하고 날카로운 기고 글들을 선보이는 그녀는, 실제로 만나본 적은 없지만 단연 내 최고의 '구루'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그녀의 책 <페미니즘의 도전>은 두고두고 다시 곱씹을 만한 가치가 있다.

"각 분야에서 여성 1호가 된 여성이나 고위직에 오른 여성들은 이렇게 말한다. "제가 바깥일을 하지만 애들 아침밥은 꼭 차려주고 나와요." 그리하여 나처럼 출세도 못했으면서 아침밥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여성들을 주눅들게 하고, '나쁜 여자'인 여성운동가의 이미지와 확실한 선을 긋는다." (37-38쪽)

인용문 외에도 공감할 내용이 많다. 본서에서 선생은 마오쩌둥, 마르크스 모두 중산층 지식인이었지만, 언제나 페미니스트만 중산층 지식인인 것이 시비거리가 된다며 이렇게 말하는 남성들도 중산층 부르주아 지식인인 경우가 많은데 여성운동가 중 일부가 지식인이라는 사실을 못견뎌 한다고 지적한다(39쪽). 또한 그녀는 자신이 생각하는 여성운동은 여성이 '공적 영역'에 진출하는 것을 넘어, 남성이 '사적 영역'으로 들어오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남성들이 집에서 노동하지 않는 한, 여성에게 사회 진출은 이중의 중노동만을 의미할 뿐이라고 못박는다(41쪽).

특히 그녀는 정신대 '할머니'와 장기수 '선생님'의 차이를 언급하는데 전자는 역사의 피해자, 전쟁의 부산물이면서 불쌍한 존재지만 후자는 역사의 치열한 주체이며, 인간의 신념과 의지를 상징하는 존경스럽고 경이로운 존재로 취급받음을 꼬집는다(53쪽). 그리고 무엇보다 공감했던 대목은 우리나라 '어머니'에 대한 왜곡된 시각이었다.

"어느 누구도 타인의 인생을 대신 살 수 없지만, 유독 어머니만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머니는 남편을 출세 '시키고' 자녀를 좋은 대학에 '보내야' 한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맞으면서도 그를 변화시켜야 하고(피해자는 해결사가 되어야 한다), 어머니는 생명을 위협하는 폭력 앞에서도 자녀들에게는 모성애를 발휘해야 한다. 훌륭한 어머니가 되려는 여성은 자신을 파괴하는 유전자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어머니는 남을 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62쪽)

백소영. 일반인들에게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화여대 백소영 교수의 책 <엄마되기, 아프거나 미치거나>는 본인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깊이있는 육아의 통찰을 담고 있다. (이 책은 최근 <엄마되기, 힐링과 킬링사이>라는 제목으로 개정판이 나왔다.) 사실, 책을 읽는 도중 너무 참조하고 싶은 내용이 많아 책의 사방에 검은 줄이 그어졌다. 책 속에는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언급되었는데 그것만으로도 생각할 거리들이 넘쳐난다.

유대 한 랍비가 "만일 한 남자가 그의 딸에게 토라를 가르친다면 그건 그녀에게 음탕함을 가르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는 이야기, 성종은 "굶어 죽는 것은 작은 일이나 정절을 잃는 것은 큰 일"이라고 했다는 과거 이야기에서부터, 의대에서 전공의가 되기 전까지는 임신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야 한다는 이야기, 산부인과에서 딸을 낳으면 한국의 간호사들이 "예쁜 공주님이에요. 한 번 더 고생하셔야겠어요"라고 말한다는 최근 이야기까지 정말 여성들의 깊은 좌절과 아픔을 공감할 만한 사례들로 가득하다. 그중 유독 내 눈길을 끄는 대목은 함석헌 선생의 아내 황득순 여사의 이야기였다.

"할머니 세대야 손가락에 꼽을 만한 신여성들이 있기는 했으나 다수의 여성들은 신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했다. 20세기 대표적 지성이라는 함석헌 선생님의 아내 황득순 여사도 겨우 글을 읽을 정도인 초등교육만을 받은 채 부모들에 의해 정해진 결혼을 했다고 하는데, 이런 사례는 당시의 '보편'이었다. 평생 "나야 뭐" 하며 사셨다는 황득순 여사. 남편이 "생각하는 백성만이 산다"고 "모든 씨알(민초)이 다 깨어나고 비판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외치느라 외부 강연을 숱하게 다니는 동안, 그러느라 고정적인 생활비도 준 적 드문 그 오랜 세월 동안 그저 묵묵히 아이들과 가정을 책임지고 산 그런 '황득순스러운' 여자들의 삶은 우리 할머니 시대에는 예외가 아니었다. 아니 수적인 면에서 볼 때 '보편'이었다."

제이언니의 추천 도서
1. 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
정희진 (지은이) | 교양인 | 2005년 11월

2. 엄마 되기, 힐링과 킬링 사이
백소영 (지은이) | 대한기독교서회 | 2013-05-30

3. 남자의 탄생
전인권 (지은이) | 푸른숲 | 2003년 5월

4. 아주 작은 차이
알리스 슈바르처 (지은이) | 이프(if) | 2001년 5월

5. 여성의 몸 여성의 지혜
크리스티안 노스럽 (지은이) | 강현주 (옮긴이) | 한문화 | 2011-09-23

6. 대한민국 부모
이승욱 | 신희경 | 김은산 (지은이) | 문학동네 | 2012-06-15

7. 내가 사랑한 여자- 공선옥.김미월 산문집
공선옥 | 김미월 (지은이) | 유유 | 2012-07-20

8.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가정 폭력과 여성 인권
정희진 (지은이) | 또하나의문화 | 2001년 8월

백소영 교수의 책은 개신교 여성으로 한정지어진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한국에서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입장이라면 누구나가 공감할 수 있고 또한 그녀가 제안하는 '공동 육아'와 같은 대안들도 진지하게 고려해볼 법하다. 

그 외. 대표적으로 두 사람을 꼽았지만 이들이 전부는 아니다. 독일에서 여성에게 가장 사랑받는 여성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여성주의 운동가의 대모 알리스 슈바르처의 대표작인 <아주 작은 차이>도 손꼽는 책이다. 이 책을 통해 가정 안에서의 성폭력과 그에 따른 아내들의 무기력함에 대해서도 깊이 돌아보게 되었다.

또한 크리스티안 노스럽 박사가 쓴 <여성의 몸, 여성의 지혜>에서 드러난 많은 사례들을 통해 여성의 마음이 여성의 몸에 끼치는 악영향을 직시하게 되었다. 남성 저자로는 전인권씨의 유명한 책 <남자의 탄생>을 통해 한국사회의 가부장적인 한 가정 안에서 이루어진 미시 정치와 그를 통해 사회전반에서의 남성의 문제, 여성의 문제를 통찰하는 혜안을 얻었다.

여성의 문제에 국한된 책은 아니지만 아이들의 상담을 통해 한국의 병든 가정을 무섭게 파헤친 <대한민국 부모>를 통해 이 시대의 어머니에 대해, 그리고 경험해보지 않은 중년의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내가 간접 경험한 소중한 책들과 저자들을, 동일한 문제로 고민하는 많은 이들에게 주저함 없이 권하고 싶다.
2013/07/25 23:00 2013/07/25 2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