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상황] 매일 부딪치는 것은 '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2000. 1.)
/ 김용주
얼마 전 용무가 있어서 의료보험 관리공단에 갔었습니다. 용무란 것이, 아는 분의 동생이 직장을 그만 두어서 그 분의 의료보험에 편입을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몇 개월 전에 지역의료보험과 공무원 의료보험관리공단이 통합된 데에다가 부분적인 파업이 이루어져 사무실 안은 밀린 민원인들로 가득하였습니다. 뒤에서 줄을 서 있는데 앞에서 작게 다투는 듯 하였습니다. 민원인은 관공서가 하나같이 불친절하다는 식으로 비난하였고 담당자도 얼굴이 붉어진 채, 화를 삭히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구비 서류를 다 챙겨오지 않아서 발급이 되지 않자, 꽤 멀리서 온 민원인이 허무한 감정과 답답한 마음에 던진 하소연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장 한 가운데에 온 것처럼 시끄러운 가운데 모두가 자신의 '일'에만 관심을 가진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10여분 즈음 지났을까...제 차례가 되었습니다. 담당하시는 여자분은 저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간단히 물었습니다. "무슨 일로 오셨지요?" 사람을 대할 때, 약간의 장난기가 있는 저는 물끄러미 그 분을 쳐다보았습니다. 생각과는 달리 빨리 대답을 하지 않자 그 분은 얼굴을 들어 저를 잠시 바라보았고, 우리는 미소섞인 눈인사를 주고 받았습니다.
"이것 좀 봐주셨으면 하는데요...이 분이 얼마 전에 직장을 그만 두셨거든요..."
"아 예, 가져오신 서류 좀 주시겠어요?"
조금은 흥분했던 얼굴이 가라앉는 듯 하였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어떤 용무로 어떤 장소를 방문하여 어떤 사람을 만나면 일이 이루어지는 동안 침묵하곤 합니다. 아마 대개는 어서 빨리 일을 처리하고 그 장소를 나올 생각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문득, 그 분의 앞에 있는 푸른 빛의 녹차 잔을 발견했습니다. "녹차 좋아하세요?" 웃으면서 물어보자 그 분은 조금 당황한 얼굴이었다가 이내 같이 웃으며, "아니요, 감기 때문에요"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감기 걸린 지 오래 되셨어요?"
"아 예, 한 3주 정도..."
"학원에서 선생님이 그러는데 오렌지 쥬스를 자주 마시고, 충분하게 잠을 자는 게 가장 중요하대요. 민간요법이라나...물론, 녹차도 좋지만..."
"아...예"
그 때 잠시 서로를 쳐다 보았습니다. 아마 우리는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분은 저를 민원인이 아닌 한 사람 그 자체로, 저도 그 분을 제 일을 처리하기 위한 담당자가 아닌 하나의 인격체임을 발견한 것이겠지요. 우리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일이 처리되는 동안 반가운 사람을 만나기라도 한 듯이 유쾌한 대화를 하고 헤어졌습니다.
언젠가 '소외'에 대하여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현대 사회는 관계 중심의 사회가 아니라 목적 중심, 과업 성취 중심의 사회란 생각이 듭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밥을 먹으면서 그 쌀 한톨 한톨 정성스레 수확한 농민의 수고를 잊었고, 내가 하는 일들의 혜택을 입을 사람들은 정작 소외시킨 채 단지 '일'들을 이루기 위해서만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버스를 운전하는 아저씨는 단지 나를 목적지로 이동시켜주는 도구이며, 수퍼마켓의 카운터에 서 있는 점원은 내가 산 물건을 계산해 주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던 것이지요. 하루에도 수백명의 사람들 사이를 오가면서도 그들과 눈조차 마주치지 않고 마치 장애물 피해가듯 길을 걷고 있는 제 모습에 크게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한 동네에 사는 이웃과도 같은 길을 걸어 내려 오면서도 한 마디조차 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 속에 진정한 삶의 가치가 있을까하는 반성도 해봅니다.
그렇게 그 건물 밖을 나서면서 다시 한 번 저 자신에게 소리쳐 보았습니다.
"매일 부딪치는 것은 '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버스에 오르면서 문득 기사 아저씨의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음 속의 작은 용기와 더불어 입을 떼어 보았습니다.
"안녕하세요? 수고하십니다." 내리는 길에 저는 기쁜 마음으로 집에 올 수 있었습니다. 내리는 저의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 때문에 말입니다. "안녕히 가세요, 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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