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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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후서 1:1-4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1. 점점더 우리는 정부가 하는 말들에 진정성이 없음을 느낀다. 때로 이제 막장으로 달려가는 느낌이다.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 보도되지 않고 있었던 일이 없거나 희미한 기억인 것처럼 오도된다.

2.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게 접하는 특유의 말투가 있다. 일단 교회 사람들은 서로를 형제, 자매로 칭한다. 마치 김대리, 이차장처럼 교회에서 불리는 이 용어는 피를 나눈 가족임을 의미하지만 정작 교회를 다니는 많은 이들은 서로의 사생활을 모를 뿐 아니라 금전적으로 엮이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3. 또다른 특유의 말투 중에는 '헌신, 순종, 봉사, 순교, 피흘림, 값없는 은혜' 같은 말들이 있다. 기도할 때 뿐만 아니라 일상적으로도 이런 용어를 자주 쓴다. 이 말들은 표현대로 정확히 이행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주 과장법 내지는 비유법에 속한다.

4. 바울의 표현은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의 현재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주례사 비평처럼 "허허, 성도님들 참 세상 속에서 환난이 찾아와도 은혜로 잘 이겨내시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와 문맥상 일치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집트의 시민처럼 죽어갔고 종교로 인해 가정이 찢어지고 국가의 위협 가운데 처했다.

5. 솔직히 비개신교도가 보기에 개신교도의 용어들은 가소롭다. 그 말과 그 현장성이 일대일 대응이 되지 않고 매번 거품이 가득한 맥주처럼 읽히기 때문이다. 마치 삼국지나 무협지의 한 장면 같은 대화를 구사할 때 개신교의 종교성은 개독교의 허접성으로 추락한다.

6. 비개신교도와 개신교도 사이에 어떤 물리적 불합리함과 어려움이 없고 도리어 개신교도의 사회적 지위가 한국사회의 평균을 웃도는 시대에 개신교의 언어는 더욱 사실묘사적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7. 목사님의 설교는 장황했고 물질적이었어요, 집사님과는 사실 대화가 없어서 매주 소원하게 느껴집니다, 회사에서 예수의 도대로 살다가는 퇴사할 것 같아서 대체로 알면서도 그대로 못하고 삽니다, 순교의 위협 때문에 도시 선교지에 자리잡으려는 한계가 저에게 있네요... 등.

8. 우리가 자꾸 우리 자신을 '무협화'하면 우리는 정통을 이야기하는 사이비 교도가 될 수 밖에 없다.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를 사이비로 규정하지도 않으면서 고고한 단어들을 무리하게 우리 삶에 가져다 붙인다.

9. 나는 정말 죽음의 위협 앞에 놓인 초대교회의 용어와 기독교가 보편종교가 된 현대 교회의 용어는 달라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은 단지 단어의 차이가 아니다. 그 용어간의 간격을 마치 우리가 매우고 살고 있는 듯한 망상마저 갖게 되기 때문이다.

10. 최근 몇년간 내가 줄기차게 교회용어들을 고집스럽게 사용하지 않으려는 이유가 오늘의 묵상에 있다.
2013/08/23 23:21 2013/08/23 2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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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13장 묵상

1. 바벨론 유수 이후 페르시아의 지배하까지 이스라엘 민족들을 둘러싼 가장 큰 문제는 영적 혼합주의 문제였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느헤미야의 성벽 제건은 그런 의미에서 주의깊게 관찰할 요소들이 있다. 침략의 위협과 굶주림의 위협 속에서 성벽 제건이라는 중대한 과업을 완수하고 말씀이 선포된 이후. 그러니까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민족이 어느정도의 안정을 찾으면서 다시금 싸워야 할 내부의 적이 나타난 셈이다.

2. 외부의 적은 비교적 그 목표가 명확하기 때문에 죽음의 위협과 같은 물리적 공격은 있지만, 외부의 적과 싸울 때는 적어도 심리적 어려움이 없다. 하지만 오랜 포로시기에 들어온 세속화는 안정기에 찾아온 내부의 적으로서 그 문화적, 일상적 흐름을 거스르기가 쉽지 않다. 이스라엘은 일상과의 싸움에 직면했다. 이는 적당히 말씀을 이해하려는 매너리즘이라기 보다는 오랜 이방생활에 익숙해진 삶의 방식을, 비교적 짧은 기간에 구별된 삶을 살기를 종용하는 영적 원리들에 충돌했기 때문이 아닐까.

3. 안식일을 지키는 대목을 현대에 끌어와 적용할 때 다소 긴장감이 발생한다. 주일에 금전 사용을 금해야 한다거나 주일에는 교회활동 외에 어떤 '세속적 행동'을 계획하거나 직장에 출근하는 일을 죄악시하는 것들이 그 예다. 구약의 이 배경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 원리는, 세속화된 사회에서 구별된 삶을 그 '사회문화적 익숙함'으로 인해 그 습속을 바꾸기 힘들더라도 비교적 빠르게 돌이켜야 한다는 것이다.

4. '안식일을 지킨다'는 본문은 세속 문화에 물들지 않고 구별되게 살아가야 함을 의미한다. 현대의 가장 큰 세속문화는 자본에 의해 사회를 등급화하는 행위이다. 현대 사회가 불가피하다고 인정하고 들어가는 혈연, 지연 친화적 풍토, 사회에서 소외받은 계층에 대한 방기, 사회에서 경쟁 우위를 점하기 위해 세상이 제시하는 자기계발서 방식을 적극적으로 차용하는 일련의 삶의 방식들이다.

5. 무엇보다 구별된 삶을 산다는 것은 세상에서 종교적 행위를 수행하고 있음을 공공연하게 알리는 것이 아니다. 성령 임재 이후의 성도의 삶은 보다 내적이고 내밀한, 내 안에서 일어난 혁명이지 공개적으로 신앙을 선포하고 세속사회에서 찬송가를 틀어놓거나 나무 십자가를 보여주거나 대형 집회장에서 쪽수를 과시하며 소리치는 통성기도의 음량이 아니다. 기독교적 입장에서, 우리는 말세에 내면적인 '가오'를 지키는 삶을 분투해야 하는 처지에 있다.

6. 세상을 너무 교양있게, 세상에서도 칭찬받고 자기 관리를 잘 하는 삶. 양 진영에서 두루두루 칭찬받고 싶어하는 내 천성, 성격적 결함들이 때로 영적 원리와 충돌한다. 구약의 내러티브는 교양없게도 자주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즉각적인 구별된 삶'을 요구하고는 영적 지도자들은 백성들의 피곤한 그 일상마저 흐트러놓는다. 그 원리를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지만 성경이 드러낸 바 구별된 삶, 회심, 돌이킴과 같은 이슈에서 말씀은 기간에 유예를 두지 않는 듯 하다. 고로, 오늘도 나는 내 천성에 머무르지 않아야 한다.
2013/08/20 23:21 2013/08/20 2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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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유모의 심정으로 수고한 바울 (살전 2:7-12)   
 
  
[개역개정]
7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8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9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10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하였는지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 11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12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

[메시지]
7-8 우리는 여러분에게 무관심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생색을 내거나 으스댄 적이 없습니다. 그저 어머니가 자기 자녀를 돌보듯이, 여러분에게 마음을 썼을 뿐입니다. 우리는 여러분을 끔찍이 사랑했습니다. 여러분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우리의 마음을 주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9-12 친구 여러분, 여러분은 그 시절에 우리가 몸을 아끼지 않고 일하며 밤 늦도록 수고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동안, 여러분에게 우리를 후원하는 짐을 지우지 않으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여러분 가운데서 얼마나 신중하고 경우 있게 처신했는지, 또한 여러분을 믿음의 동료로 얼마나 세심하게 대했는지, 여러분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거저 얻어먹지 않았다는 것을 아십니다! 여러분은 그 모든 것을 직접 경험해서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이,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대했습니다. 여러분의 손을 붙잡고 격려의 말을 속삭였고, 그분의 나라, 곧 이 기쁨 넘치는 삶으로 우리를 불러 주신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사는 법을 차근차근 보여주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스스로 권위를 주장할 수 있었으나 유모처럼 유순하게 굴었다는 이야기를 서신의 처음부터 언급하는 걸까. 요즘 유행하는 말로 셀프깔대기 수준의 이야기들이 즐비하다. 이를테면,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했다거나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한다는 언급은 정작 서로 신뢰하고 서로의 공로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이들 간에는 굳이 필요치 않은 사족같다.

자신의 애정과 헌신을 낯뜨겁게 언급하는 이 도입부는 역설적으로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 편지를 쓰면서 느꼈던 불안함, 근심스러움 혹은 조심스러움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바울은 이후 서신을 통해 자신과 자신의 메시지에 대해 비난하는 교회 내 일부 분위기에 대해 변론에 임한다. 한때 자신이 혼신의 힘을 기울여 복음을 전하고 양육한 한 교회에서 자신이 떠난 후 비난의 목소리를 듣게된 바울의 마음을 상상해본다.

오 해를 바로잡고 싶은 욕구와 더불어 허탈함, 서운함이 있지는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 서신을 써서 자신의 메시지를 바로잡고자 하는 그의 편지 초반 목소리에 다분히 사족같은 자기 공로에 대한 이해를 구하는 언급들이 주를 이룬다. 선의의 행동이 오해를 받았을 때 만큼 상처가 되고 스스로가 초라해지는 일이 또 있을까. 바울은 어쩔 수 없이 한때 공동체였던 지체들을 향해 자기변론에 임한다. 한때 비슷한 경험을 했던 나도 자기변론적 글을 참 많이 썼던 듯 하다. 오해와 불신의 싹이 틀 때에도 동굴에 숨거나 인신공격, 혹은 맞비방의 마음을 버리고 힘들더라도 자기의 오해를 불식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 같다. 바울 사도가 그러할진대 하물며 우리는 어떻겠는가.

 

 

'12. 4. 13.

2012/04/13 23:20 2012/04/13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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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빌라도가 예수를 넘겨주다 (막 15:6-15)     

   
[개역개정]
6 명절이 되면 백성들이 요구하는 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7 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 8 무리가 나아가서 전례대로 하여 주기를 요구한대 9 *빌라도가 대답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10 이는 그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러라 11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 12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 13 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14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15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메시지]
6-10 명절이 되면 백성이 요구하는 죄수 하나를 풀어 주는 관례가 있었다. 바라바라 하는 죄수가 있었는데, 그는 로마에 대항하는 반란 중에 살인을 저지른 선동자들과 함께 감금되어 있었다. 무리가 다가와서 죄수를 풀어 달라는 탄원을 올리려고 할 즈음에, 빌라도는 이미 그들이 할 말을 예상하고 있었다. “여러분은 내가 유대인의 왕을 풀어주기를 원하오?” 빌라도는 대제사장들이 예수를 자기에게 넘긴 것이 순전히 악의에서 비롯된 일임을 알고 있었다. 11-12 대제사장들은 바라바를 풀어 달라고 하도록, 이미 무리를 선동해 두었다. 빌라도가 되받았다. “당신들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이 사람을 내가 어찌하면 되겠소?” 13 그들이 소리를 질렀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14 빌라도가 따졌다. “그러나 무슨 죄목 때문이오?” 그들은 더 크게 소리 질렀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15 빌라도는 무리의 뜻을 들어주었다. 바라바를 석방하고, 예수는 채찍질하여 십자가에 못 박도록 넘겨주었다.

 

 

1. 군중심리. 갑자기 선동된 군중이 범죄자인 바라바를 풀어주고 종려나무 가지로 이스라엘 입성을 환영했던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해 죽일 것을 빌라도에게 요구한다.

2. 전날밤 예수는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잡혀서 공회 앞에 선다. 그 자리에서 예수는 무력한 모습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그를 치며 거짓 증언하는 사람 앞에 침묵했고(14:56,57) 어떤 이는 침을 뱉고, 주먹으로 얼굴을 치면서 선지자 노릇을 하라는 비아냥도 그냥 감내한다. 나중에는 하인들마저 예수를 손바닥으로 때린다.(14:65)

3. 이 모든 과정을 베드로가 지켜본다. (그가 무력감에 낙향하여 다시 어부가 되고 예수가 부활하여 그를 찾아왔을 때에도 기뻐하지 않은 것은 예수의 이런 충격적인 나약한 모습을 본 탓일 수도 있으리라.) 얼마전까지 베드로는 나약한 자신의 선생을 책망하며 '약해지지 마십시오, 제가 당신을 죽게 만들지 않을 겁니다.'라고 충고하지 않았던가.

4. 모든 게 끝났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앞에서 한치의 물러섬도 없이 빛나던 그의 혁명가로서의 모습은 온데 간데가 없다. 결국 권력의 핵심층인 대제사장, 서기관 앞에 끌려가자 그는 모멸감을 당하고도 벗어나거나 도망조차 치지 못하는 가짜 선지자의 모습이다.

5. 내가 베드로였다면. 나는 즉시 그자리에서 안티-그리스도로서의 정체성을 얻었을 것 같다. 이 자에게 내가 속았구나. 대제사장 앞에서 이 자의 스케일이 드러난 것이구나. 메시아는 개뿔... 나는 어쩌자고 이지경이 되도록 가족과 신앙공동체를 버리고 이 자를 따라왔던가.

6. 갑자기 돌변한 군중들의 분노, 그 군중들을 의식한 빌라도의 정치적 처세. 많은 묵상 교재들이 이들에 대해 손쉽게 책망과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고 우리는 그러지 말자고 피상적인 교훈을 던져주지만 3년간 정치적, 종교적 행보를 따랐던 한 민족의 기대감... 그것이 완전히 허물어졌을 때의 집단적 공황상태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너무 가볍게 다루는 것 같다.

7. 특히 진보진영의 정치인들, 이를테면 김민석이나 김영삼 한때 노무현에게 비쳤던 기대감과 그 이후의 실망감, 쏟아졌던 비난들은 우리가 자신을 신격화했던 예수의 초라함 앞에서 이성적인 판단을 했을지 의문이 든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행보를 걷는 지도자를 원할 뿐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는 어두운 선지자를 원하지는 않았다.

8. 나는 예수님의 감정이나 마음은 사실 헤아릴 길이 없다. 하지만 그가 제자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쏟으며 설파한 메시지에 귀를 닫고 그를 떠난 제자들,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자신의 앞길에 뿌리고 메시아요 다윗의 자손이라고 칭송했던 군중들이 이제는 범죄자 바라바는 놓아주되 자신을 십자가형에 처하게 만들라는 소리를 들으며 그들을 보는 심경... 

9. 세상을 사랑했지만 결국 모든 것을 쏟아부은 세상에 버림받은 예수. 군중들 한 사람 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을 때 들었을 고독감. 하나님마저 그 자리에는 함께하지 않았던 그 철저한 혼자됨의 슬픔의 강도는 상상하기조차 쉽지 않다. 한 인간으로서 예수님의 모습에서... 영혼 깊은 슬픔이 밀려온다.

 

 

'12. 4.

2012/04/05 23:19 2012/04/05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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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겟세마네의 기도 (막 14:32-42)     

     
[개역개정]
32 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3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34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35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36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37 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38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39 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40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 그들이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더라 41 세 번째 오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42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메시지 성경]
32-34 그들이 겟세마네라는 곳에 이르렀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기도하는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어라.”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셨다. 예수께서 두려움과 깊은 근심에 빠지셨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지금 나는 괴로워 죽을것 같다. 여기서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 35-36 예수께서 조금 더 나아가 땅에 엎드리셔서, 피할 길을 위해 기도하셨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나를 여기서 벗어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행하십시오.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37-38 예수께서 돌아와 보니, 제자들이 곤히 잠들어 있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시몬아, 네가 자다니, 어찌내게 이럴 수 있느냐? 단 한시간도 나와 함께 견딜 수 없더냐? 깨어 있어라. 자신도 모르게 위험지대에 들어서는 일이 없도록 기도하여라. 세상을 몰라서는 안된다. 너는 하나님 안에서 무엇이든 열심히 할 각오가 되어 있다만, 한편으로는 난롯가에 잠든 늙은 개처럼 나른하구나.” 39-40 예수께서 다시 가서 똑같은 기도를 드리셨다. 예수께서 돌아와 보니, 이번에도 제자들이 곤히 잠들어 있었다. 도저히 눈이 떠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무슨 말로 변명해야 할지 몰랐다. 41-42 예수께서 세 번째로 돌아와 말씀하셨다. “밤새도록 자려느냐? 아니다. 잠은 충분히 잤다. 때가 되었다. 인자가 죄인들의 손에 팔린다. 일어나거라! 가자! 나를 배반할 자가 왔다.”



많 은 미사여구를 들여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자는 형이상학적 고백들과 묵상들이 많이 있지만 사실상 나는 하나님과 동등되나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가 자신의 죽음 앞에 직면한 괴로움, 고뇌, 그 슬픔이 잘 공감되지 않는다. 나는 자주 나약했고 비겁했으며 때로는 불의한 행동을 일삼고 사는 평범한 인간인지라 흠없고 티없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우리의 죄를 담당하고 죽게 되었다는 그 실존에 대한 정서적 공감이 쉽지 않다.

머리로는 이해된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정수이며 그 논리에(특히 존 스토트의 역작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풀어낸 십자가의 도에) 나는 압도되었다. 하지만 정서적으로 그 고난에 동참하는 게 쉽지 않다. 나는 죽음 자체가 두렵지는 않다. 물론 누군가의 죄로 인해 내가 죽게 되었을 때의 억울함, 그런 것은 공감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절대선이자 신이 아닌 관계로 내가 죄에 접촉하는 고통에 동참하기가 정서적으로 참 쉽지 않은 것 같다.

가끔 내가 개미가 되어 개미 대신 죽는다는 비유를 듣는다. 문제는 개미가 불의하다거나 인간이 개미를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했거나 개미가 인간에게 불순종한 어떤 상황과도 일치하지 않으므로 내가 개미가 되어 개미를 위해 죽는다는 비유는 '개죽음' 이상의 공감이 되지 않는다. 삼위일체 만큼이나 정서적 공감이 어려운 신적 영역의 죽음 앞에.

예전에는 멋진 표현들이나 극적인 형상화를 곧잘 하여 예수의 고통과 죽음에 마치 내가 그가 된 것처럼 흉내내기를 시도하곤 했다. 그것은 때로 사람들의 공감을 얻기도 했다. 때때로 내가 지은 죄의 크기가 엄청나다는 인식이 찾아올 때 내 죄를 위한 예수님의 죽음에 회개의 눈물을 쏟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 그와 동등된 예수가 이 땅에 내려와 겪은 신적 고독과 죽음의 고통 앞에 나는 겸손히 침묵해야 할 때라는 걸.

37년의 삶 속에 깨달은 자기인식. 나는 예수의 고통을 잘 모른다.

 

'12. 4. 3.

2012/04/03 23:18 2012/04/03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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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예수의 장례를 준비한 한 여자 (막 14:3-9)

[개역개정]
3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4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7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8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메시지성경]
3-5 예수께서 나병환자 시몬의 손님으로 베다니에 계셨다. 예수께서 저녁을 들고 있는데, 어떤 여자가 아주 값비싼 향유 한 병을 가지고 다가왔다. 여자는 병을 따서 향유를 그분의 머리에 부었다. 몇몇 손님들이 발끈해서 자기들끼리 말했다. “저렇게한심한 일을 하다니! 완전히 낭비다! 이 향유를 일 년치 임금보다 더 많이 받고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들은 화가 치밀어서 당장이라도 여자에게 분통을 터뜨릴 태세였다. 6-9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가만두어라. 너희는 어째서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이 여자는 지금 나한테 말할 수 없이 소중한 일을 한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평생 동안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너희는 언제라도 마음 내키면 그들에게 뭔가 해줄 수 있다. 그러나 내게는 그렇지 않다. 이 여자는 기회 있을 때에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이다. 내 몸에 미리 기름을 부어 내 장례를 준비한 것이다. 내가 분명히 말한다. 온 세상에 메시지가 전파되는 곳마다, 지금 이 여자가 한 일도 알려져 칭송받을 것이다.”



공동체의 균열, 붕괴.
제 자들은 목숨을 걸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지만 그 후에 예수의 행보를 통해 제자들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메시야의 도래, 왕의 귀환을 꿈꾸며 들어간 예루살렘에서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거나 회당에서 가르치는 일 외에 어떤 혁명적 행동도 하지 않는다.

입 성 직전 누가 2인자인가, 누가 예수의 좌우편에 앉을 것인가를 두고 다투던 제자들, 그 혁명적 공동체는 자신들의 이해에 따른 예루살렘 입성 후 그림과 다르게 예수가 행동하자 차츰 의아해해고 분위기가 처진 듯 하다. 예수에게서 열심당의 전사나 다윗의 용맹을 보지 못한 가룟 유다는 곧 예수를 팔 계획을 실제로 진행하고만다.

본문은 그 직전 한 여인의 행동을 묘사한다. 여러 차례 예수는 자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예언하지만 제자들은 그 때마다 심히 두려워하고 다른 말씀에 대해서는 보이지 않던 부정을 유독 그 말씀에 대해서만 반복한다. 그런 말 마세요, 그렇게 나약해 빠진 생각일랑 버리세요, 저희가 있잖습니까.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당신을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겁니다.

제자들의 프레임 안에서 예수의 죽음은 조직의 붕괴를 의미했고 그 프레임 안에서 제자들은 흔들렸다. 결국 예수의 죽음 예언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은 여인에게 정죄의 말을 쏟아낼 만큼. 가끔 한국 교회의 행보를 볼 때, 가깝게는 내가 어떤 행동을 할 때 말씀과 성령의 부드러운 인도하심을 느끼면서도 조직이 가진, 개인이 가진 프레임 안에서의 방향에 역행할 때 우리는 도리어 우리의 프레임을 강화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나약한 소리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우리 편인데 실패한다거나 이 방향이 아니라는 생각조차 하지 맙시다. 지도자가 흔들리면 끝장입니다. 지금 우리가 한마음으로 똘똘 뭉쳐도 모자랄 판국에."

실 제로 하나님은 여러 방식으로 우리에게 자신의 뜻을 계시하신다. 단지 우리가 우리의 프레임에 맞지 않는 신호들을 필터링한다. 특정한 메시지에는 껄끄러워하기도 하고 정말 둔할 정도로 무신경하게 받아들이고 끝내 그의 뜻을 거스른다. 어느덧 우리는 예수가 십자가에 달릴 때 그게 정당했다, 예수가 말년에는 무능했다 라고 자위한다.

 

'12. 4.

2012/04/02 23:17 2012/04/02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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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너희의 아비는 악마이다 (요 8:39-47)

[개역개정]
39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40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1 너희는 너희 아비가 행한 일들을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42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43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45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46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도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47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메시지]
39-40 그들이 분개했다.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이 한 일을 너희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지금,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전해 준 나를 죽이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 너희는 너희 아버지의 일을 고집스럽게 되풀이하고 있다.” 그들이 말했다. “우리는 사생아가 아니오. 우리에게는 적법한 아버지이신 유일하신 하나님이 계시오.” 42-47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했을 것이다.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이 세상에 왔기 때문이다. 나는 내 뜻대로 온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셔서 온 것이다. 어째서 너희는 내 말을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느냐? 그것은 너희가 내 말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희는 너희 아버지인 마귀에게서 났고, 너희가 하려는 일은 온통 그를 기쁘게 하는 것뿐이다.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자였다. 그가 진리를 견디지 못하는 것은, 그 속에 진리가 조금도 없기 때문이다. 그 거짓말쟁이는 말할 때마다 자기 본성에 따라 말을 만들어 내고, 그 거짓말로 온 세상을 가득 채운다. 내가 와서 너희에게 명백하게 진리를 말해도, 너희는 나와 관계하려고 하지 않는다. 너희 가운데 내가 그릇된 말이나 죄악된 행동을 하나라도 했다고 입증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도, 너희는 어째서 나를 믿지 않느냐? 하나님과 한 편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너희가 듣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 한 편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한 분이고 그가 자신을 보내셨으므로 유대인들의 아버지가 하나님이 아님을 논증한다. 이에 나아가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 즉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마귀의 자식이라는 충격적인 주장을 통해 이천년 전의 이 내러티브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내가 유대인들의 회중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나는 이성적으로는 진보적인 입장이면서 정서적으로는 다분히 보수적인 사람이다. 불협화음이나 고성방가, 전투적인 언행이나 급격한 변혁에 반감이 있다. 머리로는 그것이 옳다고 느낄 지언정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때 나는 다소 움츠려드는 편이다.

유대인으로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그리고 예수의 행보에 적극적이지는 않아도 다분히 공감하고 그가 설교하고 행동하는 사역을 지지한 한 사람으로 내가 무리 중에 서 있다. 허나 오늘 논쟁에서 예수는 내가 속한 집단을 향하여 마귀의 자식이라고 말한다. 나는 예수가 건너지 말아야 할 강을 건넜다고 판단했을 것 같다. 불쾌함이 찾아온다.

그의 사역 전반에 대해 재고를 해본다. 갈릴리에서 예언자나 선한 이가 나오지 못한다는 전통적 사고와 함께 아브라함의 자손을 마귀의 자손으로 몰아붙이고 자신을 하나님과 동격으로, 그리고 아브라함은 이러지 않았을 거라는 말 속에 나이 오십도 안된 자가 은근히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자신의 격을 동일하게 놓는 모습에서 의분이 솟는다.

나 는 아마 그 자리에서 예수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왜 예수는 유대인에게 마귀의 자식이라는 극단적인 논리를 펴면서 자신을 해하려는 의도에 기름을 붓는 걸까. 예수님은 사역 후반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과 동등된 자임을,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나뉘는 결단의 시점을 정하는 것이다.

중 간은 없다. 구속사에서 면면이 흐르는 하나님을 따르는 길에 하나님을 거역하면서 완전히 저버리지는 않고도 하나님 곁에 붙어 있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예수님은 유대인을 향해 중간지대가 없음을 명확히 하신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더라도 한 하나님 안에 속해있지 않다면, 나를 알지 못하고 나를 반대한다면 그는 어정쩡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마귀의 백성이다. 마귀의 백성은 어정쩡한 상태로 남아있지 않고 하나님에 대항하고 그의 뜻을 꺾고자 하며 그의 아들을 죽이려고 한다.

유대인들은 실제로도 그리했다. 지금의 한국교회, 우리의 공동체, 우리 각 개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대목이다.

 

'12. 3. 30.

2012/03/30 23:17 2012/03/30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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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33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37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38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유대인과 예수 간의 갈등이 고조된다.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명백한 인식을 가지고 있던 유대인에게 자신이 자유롭게 만들어주지 아니하면 유대인들이 영원히 아버지의 집에 거하지 못하리라는 충격적인 선언을 한다.

이 로 인해 유대인은 일부는 그를 믿게되기도 하지만 다수는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하고 결국 십자가형을 집행하기를 종용하는 세력으로 변질된다. 사실 그들은 구약시대의 선민이었고 세상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큰 계획 상의 중추 세력이었다.

본문은 교회 안에서 그리고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느정도의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그래서 사이비 유대인 행세를 하는 내 모습을 정확하게 질책하는 느낌이다. 먼저 믿은 자로, 믿은 것을 가르치는 자로, 교회에서는 조장으로 선교단체 생활을 하고 교계에서 일정 부분의 책임을 다하고 싶어하는 나에게 본문은 진정 경각심을 준다.

오늘도 예수만이 참 자유를 허락한다는, 그리고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는 수준이 아니라 아버지를 보는 것, 그 아들 예수님과 사귐을 통한 관계적 정체성으로 그 집에 거할 수 있다는 예수의 말씀을 돌아보게 된다. 형식적인 종교적 가르침에 충실하게 행하는 것에 집중하던 내게 하나님을 대면하고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유대인의 모습이 보일까 두렵다.

 

'12. 3. 29.

2012/03/29 23:15 2012/03/29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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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22 유대인들이 이르되 그가 말하기를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그가 자결하려는가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25 그들이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26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 말하노라 하시되 27 그들은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 28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30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본문은 예수의 설교를 들으며 유대인들이 점점 그에 대한 분노를 쌓아가고 결국은 돌로 쳐 죽이려는 시점으로 치닫는 중반의 말씀이다. 예수는 자신의 사역에 있어 유대인을 대할 때 구약적 배경 가운데에서 자신이 메시야임을 천명한다.(25절, 28절) 예수를 잡으러 갔던 성전 경비병들도 결국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7:24)다고 말하며 무리 가운데에는 예언자나 혹은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이들도 있었다.

유대인은 자신의 보수적인 신앙관에 빗대어 예수의 복음을 해석하는 부분에서 많은 가능성이 열려 있었음에도 다수의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려고 음모한다. 나는 건강한 보수, 혹은 중도적 입장을 견지하려 하지만 항상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시도, 무엇보다 옳아보이지만 기존의 입장과는 다른 견해나 주장, 혹은 변화에 대한 저항심을 가지고 있다.

나이가 들수록 경험과 지식의 양이 늘면서 교만해져서 그런지 이러한 생각은 오히려 커져가는 듯 하다. 예수의 공격적 가르침, 그 진리 앞에서 나의 오감과 지식에 의존하지 않고 겸손하게 처음부터 그 가르침을 곱씹어보는 훈련이 내 일상 곳곳에서 터져나와야 하지 않을까. 30대 후반의 내 자화상을 돌아본다.

 

'12. 3. 28.

2012/03/28 23:13 2012/03/28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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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3:13-15)

내 성격은 약간 이중적이다. 내가 주도해서 이끌어야 할 상황이 아니면 다분히 내성적이고 수동적이다. 허나 내가 책임을 지거나 나서야 하는 판단이 서면 다소 적극적인 자세로 돌변한다. 또한 나는 숫기가 없다. 어린시절 손님이 오면 어머니나 누나가 없거나 다른 일을 하느라 대신 나가서 그를 맞아야 하는 상황이 너무 싫고 불편했다.

대학원에서는 교수님이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전달하도록 시킬 때 그게 그렇게 싫었다. 상대방이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올 것이고 나는 주체가 아닌 입장에서 잘 대답하지 못할까봐 노심초사했다. 그렇다고 교수님에게 이것저것 예상되는 문제들을 꼼꼼이 물어볼만큼 성격이 좋은 편도 아니었다.

조금의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나는 모세가 주저했을 그 자리에 내가 섰다고 생각해본다. 물론 노예생활이 힘들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집트를 떠나자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선동하는 것도 사실 만만찮다. 그리고 왜 내가 의분을 일으켰던 그 옛날 나의 혈기왕성했던 젊은 시절이 아니고 이제는 모든 기력과 의지도 별로 없는 노년에!

정말 싫다... 하나님의 메신저. 그 많은 군중 속에서 나올법한 모든 질문들과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과 불가능해보이는 과정들.. 게다가 나는 살인을 한 도망자가 아니던가.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나를 알아볼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들은 동족에게 채찍질한 이집트인을 죽인 나를 살인범으로 몰지 않았던가. 아.. 정말 나서고 싶지 않다.

내가 모세였다면.
흔히 역사 속 이스라엘 민족이나 모세 등등 많은 이들을 다룰 때 불순종의 대상 혹은 실수에 대해 가볍게 비난하는 - 그건 모세의 어리석음이지, 이스라엘 백성들 아직 정신을 못차렸어 - 판단들이 얼마나 더 어리석은지 깊이 돌아본다.

이집트를 떠나 사막생활이 수십년간 이어지고 아이는 굶주리고 돌림병이 돌고 약속은 이뤄지지 않을 때 그 궁핍하고 고단한 삶을 살아보지도 않은채, 책상 사무실에 앉아서 개고생하던 한 인간, 한 집단을 깊이 묵상치 않고 해대는 비난들은, 사실 그 비난의 잣대를 검증해보지 않은 자신에게 돌아온다. 사무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이 긴장되는 상황을 글자로만 인식하는 나또한 그러하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모세의 머뭇거림을 십분 공감한다.If I were Moses

2011/09/25 21:22 2011/09/25 2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