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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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좀더 본질적인 부분입니다.

옥집사님의 3부작은 심리학과 마케팅, 그리고 엔터테인먼트로 대변되는 것들에 기독교의 본질이 많이 훼손되고 있다는 것을 전달하기 위해 쓰여진 것입니다. 여기에서 마케팅은 가치중립적인 방법이라는 느낌을 어느 정도는 받을 수 있으나 기독교 안으로 들어온 마케팅적 요소는 분명 그 자체만으로도 악하게 치부되는 것 같습니다. 또한 이전 저작에서 심리학은 기독교에 강한 영향력을 보이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심리학 자체가 학문의 범주에 속할 수 없을 정도로 사이비 과학에 가깝다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특히 소비자중심주의로 대변되는 현대 교회의 흐름에 대한 강한 비판과 문제 의식을 가지고 시작된 본 연작들은 과거 청교도 신앙과 칼빈주의로 대변되는 신앙의 성향으로 교회를 회복해야 할 것이라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는 듯 합니다. 이에대해 저는 다소 무리가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을 지적했고, 또한 반면 제 개인적으로는 이 두 책에 대한 긍정적 요소들에 대해 많이 동의하고 있다는 것도 이야기드린 바 있습니다.

다만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소비자중심주의, 인간적인 방법, 현대 사상과 같은 류의 문제들에 있어서 옥집사님이 기독교와 극단적 대립구도로 이 '묶음들'을 설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앞서 말한 것들을 통칭하여 '문화', 혹은 '세상'이라고 정의한다면 결국 이 문제는 기독교와 세상의 관계,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에 대한 기본 전제의 문제로 환원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러한 '기독교와 세상의 문제'는 리차드 니버의 유명한 저서인 <그리스도와 문화>라는 책에서 한 다섯 가지의 범주로 그 입장을 구별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니버는 기독교와 문화, 기독교와 세상의 관계를 1. 대립 2. 역설 3. 조화 4. 종합 5. 변혁 모델로 그 범주를 나눈 후 변혁 모델로서의 기독교와 세상의 관계를 나머지 4개의 모델에 비해 가장 설득력 있는 모델로 소개하였습니다.
니콜라스 월터스토프와 아브라함 카이퍼와 같은 신칼빈주의자들과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을 가진 이들(이를테면 헤르만 도예빌트와 알버트 월터스가 여기에 속합니다)에게 이 모델은 기독교 안에서 아주 유효한 모델임을 입증하였고 또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이 모델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기독교는 문화를 적대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변혁시킬 대상으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지적할 것은 다른 대립 모델이나 종합 모델과 같은 것들이 유효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문화와 기독교의 관계 설정에 있어 개혁 모델이 가장 효과적이며 타당해 보인다는 것이지요.

옥집사님의 글을 차근차근 읽어보면 지속적으로 언급했듯이 각론적인 내용들에 있어서는 적극적으로 100% 지지를 나타낼 만큼 속이 후련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특히 지난 번 저작에서 조엘 오스틴의 사례라거나 이번 책에서 새들백교회, 윌로우크릭 교회의 사례들을 분석한 것은 참 의미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사례들을 비판하는 틀로 작용하는 보다 근본적인 잣대, 즉 세계관에 있어서 옥집사님은 심리학,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과 같은  현대 사상, 그리고 인간 중심적인 마케팅적 요소, 이후에 쓰게 될 엔터테인먼트와 같은 문화적 요소들을 기독교와 대립구도로 끌고 가시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복음에 어떤 순수하지 못한 요소들이 섞이는 것 자체를 불편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래왔듯이 복음은 그 당대의 문화와 소통했고 그 안에서 마치 밀가루에 섞인 누룩처럼 어떤 변혁적 요소로 작용해 왔음을 발견합니다.

예수님도 복음의 형이상학적 요소들을 전달하는데에만 그 사역을 제한한 것이 아니라 아픈 자를 고치시고 배고픈 자에게 빵을 주시며 그들의 필요에 민감히 반응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역이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식시키기 위한 단순한 '떡밥' 같은 것이 아니라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표적을 보이기 위함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도래하는 그 분의 나라는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의 나라인 동시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여하신 피조물들이 온전히 회복되어 그 피조물들을 온전한 방법으로 누리는 나라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옥집사님이 '물든'이란 표현을 쓴 것에 크게 동의했습니다. 복음과 세상과의 관계 설정에 있어 그 복음과 세상의 위치가 뒤바뀐 것이 현대 기독교의 비참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세상적 요소가 교회에 들어오면서 복음의 본질을 마치 세상적인 것으로 채우는 것 자체에 대한 것이 '...에 물든"이란 표현으로 대변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마케팅이나 현대 사상, 심리학 자체는 기독교에 반하는 요소들이 있지만 또한 기독교의 입장에서 볼 때 어느 정도 효과적인, 그리고 변혁의 필요성이 있는 요소임을 전제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마케팅적 요소자체를 뿌리 뽑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래야 할 필요가 있는지도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성경암송대회를 해서 상품을 주는 행위, 새벽기도회에서 성도들의 필요들이 적힌 기도제목을 받아서 그것들을 위해 기도하는 행위, 예배에 현대적인 기술이나 성도들이 보다 예배에 활력을 받을 수 있는 요소들을 적용하는 행위, 상담이나 심리학적 방법들을 가지고 성도들을 돕는 행위는 제 생각으로 그 자체가 악하다거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것에 복음의 핵심적인 요소들이 가려지며 그것들로 인해 그리스도의 십자가, 성경의 권위, 구원의 유일성, 성령의 사역이 불필요하다는 결론으로 치닫는 것입니다. 복음이 세상을 개혁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복음을 물들이는 것이 현대 교회의 비극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이러한 이유로 옥집사님의 책에 큰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물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완전히 동의하기에 옥집사님의 책은 저를 불편하게 만드는 몇몇 요소들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각론들을 감싸고 있는 전제들에 있어 때로는 치밀해보이지 않으며 때로는 제 신앙과 배치되는 부분도 있음을 발견합니다. 혹은 제가 독해력 부족으로 혹은 책을 세심하게 읽지 않아 생기는 편견일 수도 있겠습니다. 어쨌거나 저는 옥집사님 같은 분들이 한국교회에 좋은 영향을 끼치게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또한 제 생각에 대해 조금은 편한 마음으로 봐주시고 문제가 되는 부분들은 때로는 혹독하게 비평해주셔도 좋겠습니다. 그러면서 저나 옥집사님의 견해들은 보완 되며, 복음은 더 순수해지고 빛을 발할 것이라 기대합니다. 샬롬.
2007/11/27 18:36 2007/11/27 18: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