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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뮬라크르, 시뮬라시옹
: <매트릭스>는 소비사회의 디지털화

<매트릭스 리로디드>를 찍으면서 워쇼스키(Wachowski) 형제는 키아누 리브스(Keanu Reeves)에게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의 저작인 <시뮬라시옹>을 다 읽고 촬영에 들어가기를 바랬다는 기사가 영화 개봉 전부터 화재를 불러 일으켰다. 이미 매트릭스의 스토리라인은 일본 에니메이션과 기독교적 메타포, 그리고 여러가지 정보기술들의 혼합된 양상을 보여주고 있으며, 또한 그런 각각의 철학들은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기반을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렇기 때문에 <시뮬라시옹>이라는 책에서 보드리야르가 말한 시뮬라크르/ 시뮬라시옹에 대한 개념을 간단하게 살피면서 영화에 대입해 보는 것도 이제까지 개봉된 <매트릭스> 씨리즈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 같다.

<시뮬라시옹>의 저자이자 사회학자인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현대 사회를 해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전도사로 불린다. 그는 처음에 현대 소비사회를 분석하기 위해 시뮬라시옹(simulation)과 시뮬라크르(simulacre)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시뮬라크르는 신의 소상(塑像)이나 화상(畵像), 혹은 표상, 이미지 일반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보드리야르는 시뮬라크르를 자신의 책에서 시뮬라크르를 기호와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보드리야르의 사물에 대한 기호론적인 사고는 마르크스(Marx)의 가치론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시작된다. 마르크스(Marx)는 사물이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두 가지 측면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반면 보드리야르는 사물에게는 마르크스(Marx)가 가정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이 두 가지 개념만으로는 환원이 불가능한 어떤 ‘상징가치’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이를테면 특정한 상품에는 단순히 그 상품 자체의 효용성과 교환 시의 가치뿐 아니라 결혼 반지처럼 반지라는 상품에 특정한 의미가 부여될 수도 있고, 나아가서 그 사물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신분의 상징으로 대체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소비사회에서 인간들은 이렇게 기호화된 사물을 소비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러한 기호들은 현실로 대체되고 현실은 시뮬라크르가 되는 셈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현대는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들을 매개로 거래와 소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가진 서로 다른 기호가치들의 존재, 즉 시뮬라크르로 대체된 기호를 소비하고 있으며 이러한 시뮬라크르 소비 사회를 가리켜 시뮬라시옹 사회라고 정의했다.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시뮬라시옹 사회는 사물에 대응하는 현실이 존재하지 않고 시뮬라크르가 현실이 된 세계이며 따라서 사물은 원초적으로 그것이 존재했던 것인지 아닌지가 아니라 시뮬라크르를 생산하는 코드화된 기호와 숫자에 그 기원을 두게 된다.

이 시뮬라시옹이라는 개념은 현대의 전반에 걸쳐 이루어지고 있는 기술적 토대이기도 하다. 일례로 현대의 자동차 기업들은 자동차의 충돌시험 시, 존재하는 물체를 몰아서 벽에 부딪쳐서 그 찌그러진 정도를 측정하는 작업을 실제로 하지 않고도 컴퓨터로 디지털 기호의 조합만으로 자동차의 형상을 모델링 함으로써 실제 자동차를 기호로 대체하여 테스트해 볼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반복작업을 컴퓨터로 계산하여 실제로 어떻게 존재하는 자동차가 일그러질 것인지를 예측할 수 있다. 여기에서 보다 중요한 문제는 일단 시뮬레이션된 자동차는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시뮬레이션 세계 안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시뮬레이션에서 자동차는 기호화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매트릭스>의 첫 편에서 매트릭스 안의 세계는 시뮬라시옹 사회를 대변한다. 영화를 보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쉽게 매트릭스 안의 세계가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 세계의 물질들이 일대일로 대응되는 완벽한 사회로 인식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에서 매트릭스 안에 갇혀있는 사람들 입장을 생각해보라. 과연 어디까지가 실재로 존재하던 물체를 기호화한 것인가. 내가 먹는 스테이크는 과연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었는가. 실제로 대응되는 스테이크라는 음식은 존재하지 않는데 단순히 상징적인 기호를 통해 만들어낸 허구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보드리야르가 인식한 현대 소비사회의 코드는 그런 의미에서 고스란히 <매트릭스>라는 영화에 녹아있다. 먼저 <매트릭스>의 전편에서 네뷰커네자르(Nebuchadnezzar) 호 안에서 해커들이 하는 잡담은 그냥 넘기기에는 중요한 개념들이 들어있다. 도저가 그 중 가장 나이가 어린 마우스라는 해커에게 주는 스프처럼 생긴 음식을 먹으면서 “테이스티 휘트”의 맛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한다. 자신은 테이스티 휘트라는 음식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데 과연 그게 실제로 존재하는지, 혹은 존재한다면 그 맛이 실제로 존재하는 그 사물의 맛일지에 대해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맛있다고 생각하는 테이스티 휘트라는 음식이 사실은 기계들이 대충 짐작으로 만들어낸 기호체계일 뿐일 수도 있지 않느냐는, 다소 황당한 잡담을 늘어 놓는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워쇼스키(Wachowski) 형제가 액션신없이 잠시 쉬어간다는 의미로 이 부분을 삽입했다고 생각하고 가볍게 넘길 수도 있겠지만 이 장면의 의미는 그들이 매트릭스의 토대가 되는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에 대해 그런 가벼운 스케치를 통해서 본질적인 내용을 언급하고 있는 장면이라고 보는 것이 옳은 접근일 수 있다.

이러한 실재하는 사물과 기호와의 일대일 대응의 파기는 영화를 둘러싸고 있는 매트릭스 세계의 전반적인 특징이다. 니오(Neo)가 스미스 요원(Agent Smith)의 요구에 반항하자 입이 막힌다든지, 벌레처럼 생긴 추적장치가 배꼽으로 들어간다든지 하는 것은 현실에 일대일로 대응될 수 없는 가상적인 세계의 특성이다.
매트릭스 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디지털 기호의 조합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여기에서 매트릭스 시스템의 일방성 또한 드러난다.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시스템은 피시스템인 인간을 통제하기 위해 시뮬라크르를 생산해낼 수 있지만, 반대로 인간 쪽에서 시스템에 응답하는 것은 금하게 되어 있다. 이것은 보드리야르가 <대중매체의 진혼곡>에서 밝힌 대중매체의 “응답가능성”이란 개념이며 사회체계나 권력체계를 상징하는 시스템은 이런 응답 불가능성을 이용해 체제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매트릭스> 1편의 마지막 장면.
그는 트리니티와의 키스 이후에 다시 소생하며, 머리로만 이해하던 매트릭스를 몸으로 느끼게 된다. 이제까지 그가 보던 것은 현실과 동일한 이미지였지만 지금 그가 보고 있는 세계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상징 즉, 시뮬라크르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매트릭스 리로디드>에서도 이와 같은 기본 하부구조 위에서 영화는 진행되며 키메이커를만나기 위해 메로빈지언(Merovingian)이라는 프로그램을 찾는 장면에도 이 개념들은 시각적으로 재현된다. 메로빈지언(Merovingian)이 니오(Neo)에게 자신의 건너편 자리에 앉아있는 아름다운 여인을 보라고 할 때 니오(Neo) 앞에 펼쳐진 것은 여인이 아니라 여인의 형상을 표현하고 있는 디지털 기호들의 조합이다. 메로빈지언(Merovingian)은 웃으면서 당신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매트릭스는 실재하지 않는 신기루와 같다는 식의 말을 내뱉는다. 시뮬라크르로 대체된 시뮬라시옹 사회의 모습. 그것이 매트릭스의 사회학이자 영화 전편에 흐르는 하부구조인 셈이다.**

2003년 6월 9일.

2003/06/09 18:05 2003/06/09 1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