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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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를 지나가는 미국인들에게 친구가 되어 주겠다고 말을 거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는 많은 모양이다. 예전에 박노자 교수의 글에서도 언급된 적이 있듯이, 한국인들은 지나가는 미국인들을 보면 자신이 친구가 되어 주겠다며, 그 대신 자신에게는 영어를 가르쳐주고 미국인에게는 자신이 한국 문화나 생활을 위한 가이드가 되겠다는 이야기를 곧잘 한다고 한다. 그 당시에도 박노자 교수를 미국인으로 오해하여 길거리에서 이런 황당한 ‘친구 거래'를 제안한 우리나라 대학생들이 꽤 있었던 모양이다.

얼마 전 신문에서 버스에 타고 있던 제3세계에서 온 노동자가 옆에 있던 아이에게 귀엽다고 손짓을 했다가 더러운 병에 옮는다고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낸 아이 어머니의 반응에 서러움을 토로한 기사를 얼핏 읽은 기억이 난다. 그 때 나는 버스에 탔던 제3세계에서 온 노동자가 만약에 해럴드나 타임즈를 들고 있는 미국인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 주인공이나 혹은 백인들과 자신들을 동일시한다고 한다.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백인들 옆에서 함께 웃으며 대화하는 자신을 상상하기는 쉬워도 스크린에서 남미, 혹은 중앙아시아, 이슬람 국가의 사람들이 나타나는 장면에서는 왠지 자신과는 다른 사람을 대하듯 쉽게 타자화시키면서 말이다. 이런 현상은 영화에서뿐만 아니라 북미에 거주하는 한인들에게서도 자주 보여지는 현상인 듯 하다. 이런걸 두고 옥시덴탈리즘이라고 칭하는 건가.

서론이 길었다. 내가 열과 성을 다하여서 소개하고 싶은 본서 「벽을 넘어 열방으로」(원제 : A Time for Mission)는 한국에 소개된 사무엘 에스코바(Samuel Escobar)의 유일한 책이다. 서론에서 이미 감지했겠지만, 나는 본서의 탁월함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독자들로 하여금 본서의 저자에게 되도록 집중하게 만들고 싶다.

본서의 저자인 사무엘 에스코바는 페루 태생의 입지전적인 신학자로 1974년 로잔세계복음화대회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본서의 서문에서 선교한국의 상임총무인 한철호 총무는 그를 가리켜 “남미 출신으로 오랫동안 국제기독학생회(IFES) 간사와 선교운동 지도자로 사역했고 현재는 신학교에서 선교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어 서구와 2/3세계를 모두 잘 이해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전 세계적 관점에서 선교를 이해하는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 적임자”라고 평했다. 하지만 사실상 한철호 총무의 에스코바를 향한 관심은 훨씬 이전부터였던 듯 하다. IFES World Assembly가 한국에서 열렸던 1999년 한국기독학생회의 소식지인 <대학가 >를 통해서 이미 한철호 총무는 에스코바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1970-80년대 남미국가들은 좌파혁명에 시달리고 있었다. 각 국가들은 부정과 부패로 파산하기 시작했고,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혁명이 계속 일어나고 있었다. 캠퍼스 젊은이들마저도 무력혁명에 가담하거나 대부분 운동권 세력에 의해 좌우되고 있었다. 무력혁명에 참가하는 학생들은 학교 안에서도 총기를 소유하고 때로는 강의실까지 들어와 자신들의 혁명에 동참할 것을 강요하는 상황이니 교수들도 그들이 두려워 방관할 수밖에 없는 지경이었다.

당시 대학 안에서 성경공부 모임을 하고 있던 복음주의 학생(IVF)들은 이러한 상황에 반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먼저 교수님을 찾아가 정식으로 학생들에게 진정한 해방을 가져다주는 복음을 전할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다. 그 결과 그들은 강의실로 들어가 공개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됐다. 학생들은 말로 복음을 전할 뿐 아니라, 그룹을 만들어 빈민가로 찾아갔다. 당시 남미에서 혁명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정부의 부패와 가난한 자들에 대한 외면이기 때문이었다.

이들의 이야기가 학교 안에 알려지기 시작하자, 당시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 과격 무력운동권에 질려 있던 학생들이 이 모임에 관심을 보였고, 곧 성경공부 모임은 크게 부흥하기 시작했다. 이 사실이 무력혁명권 학생들을 자극했다. 성경공부 모임 리더들은 테러의 목표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복음을 전했다. 결국 한 리더의 약혼자인 자매가 테러로 죽임을 당하게 됐다.

이런 희생을 치른 결과 남미의 IVF학생모임은 대학 안에서 점차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복음이 그들이 처한 가난과 부패라는 상황 속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 후 남미의 학생운동은 급속한 발전을 가져왔고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는 대륙으로 바뀌었다. 당시 남미 IVF의 간사였던 사무엘 에스코바(Samuel Escobar)는 현재 미국의 남침례교신학교 교수면서 IFES 국제 총재이다." (1999. 7. 대학가, "국경 없는 캠퍼스의 증인들" 중에서 / 한철호)

본서를 통해서도 에스코바는 기존의 선교 관련 서적과는 다른 접근 태도를 보여준다. 무엇보다 20세기 후반부터 변화된 2/3세계 선교사들의 증가에 주목한다. 그는 오늘날은 까만 눈에 갈색 피부를 가진 라틴 아메리칸 혼혈을 의미하는 페루인 '메스티조(mestizo)' 선교사들이 늘어나고 있고 있으며 자신이 몸담았던 선교연구센터에 오는 선교사들은 이제 미국인들이 아니라, 나이지리아에서 의료 사역을 하거나 아마존 밀림에서 교회개척 사역을 하던 한국 선교사들과, 인도네시아에서 신학교 사역에 종사하던 일본인 선교사들, 또 방글라데시에서 경제 개발에 참여하던 필리핀 선교사들이었음을 주목하며 본서를 시작한다.

그는 선교가 세계화 물결을 타는 데만 급급하다가는 복음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음을 경고했으며, 르네 빠디야가 1974년 로잔복음화대회에서 발표한 논문을 인용하여 수많은 선교 기관들이 기독교 선교라는 이름으로 전파하고 있는 복음을 근대의 서방적인 가치관(미국적인 생활 방식)과 전적으로 동일시라는 것에 대해 비판한다. 특히 그는 레슬리 뉴비긴이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때때로 문화적인 요소를 복음의 본질과 혼동하게 되었고, 그 결과 상대적일 뿐인 자신들의 문화가 마치 하나님의 권위를 부여받은 절대적인 진리인 것처럼 잘못 전달하게 되었다"는 표현을 인용하며 복음을 전하는 와중에 발생하는 문화의 강요 문제에 주목한다

또한 에스코바는 회심의 문제를 거론하면서 복음주의 선교사들이 회심을 지나치게 강조한다는 비판을 받아왔음을 지적하며, 복음주의자들의 회심 초청은 사람들의 문화적 순전성을 파괴하는 행위라고 비난한다. 책에 언급했듯이 그는 1988년에 이 주제를 고려하기 위해 소집된 세계복음주의협의회와 로잔위원회의 공동 대회는 "회심에 관한 홍콩 선언"(Hong Kong Call to Conversion)을 발표하면서 내린 결론을 서술했다.

"선교는 너무나 빈번히 복음과 함께 낯선 문화를 수출해 왔으며, 교회들은 때때로 성경보다는 오히려 문화의 노예가 되어 왔다"(제10항)고 상기시킨다. 홍콩 선언은 이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였다. "모든 회심에는 근본적인 불연속성이 존재하는데, 회심자는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행26:18)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선언은 또한 "회심은 회심자들을 '탈문화적' 존재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자신이 속한 문화 공동체의 일원으로 남아 있어야 하며, 성경의 계시와 모순되지 않는 가치들은 가능한 한 유지해야 한다. 어떠한 경우라도 회심자들은 선교사의 문화로 '전향'할 것을 강요 받아서는 안 된다."

이런 이유로, 무엇보다 그는 선교에 있어 성경의 자국어 번역과 전통 문화의 수호에 큰 비중을 두고 있으며 이는 단순한 이론이 아닌 오랜 시간 동안 선교지의 중심에서 얻어낸 실제 현상임을 증명한다. 그는 “원주민 교회를 세우고 토착 신학을 장려하려는 노력과 아울러 성경을 번역하는 일은, 세계화 과정의 불가항력적인 압력을 거슬러서, 지역적이고 토착적인 것들을 소중하게 여기도록" 했으며 수년 전 아프리카 대륙의 무수한 독립 교회들이 놀랍게 발전하는 과정을 깊이 연구하였던 아프리카 선교사 출신의 선교학자 데이비드 바레트가 지적한 대로 아프리카의 복음화 과정에서 자국어 성경의 존재가 독특한 역할을 하였음을 언급했다.

에스코바는 선교의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서구 문화에서부터 기인한 지나친 효용성이나 기술적인 부분 그리고 목표지향적인 접근을 경계한다. 그는 종교성이 포스트모던 문화의 상징물로 재등장한 이 시점에서, 선교를 위한 기도조차 그 교육과 방법론이 포장되어 판매되는 하나의 산업으로 전락하였고, 선교사들 또한 사람들을 '비인격화'하여 그들은 단지 복음전도의 '목표물'로 간주하고 '미전도 대상'으로 만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며, 이런 식으로 하면 '미전도 대상'은 우리가 계획을 성취하고, 우리 전략의 효율성을 입증하는 데 사용하는 얼굴 없는 대상물이 되고 만다고 말한다. 또한 사람들을 다루는 일에서 과학적 정확성에 대한 욕구를 채우기에 급급한 일종의 '기술'로 전락하기 쉬우며 이것이 바로 오늘날 서구 사회와 또 서구화된 아시아 국가들에서 볼 수 있는 특징들이란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무엇보다 본서의 큰 유익이 있다면 에스코바는 선교에 관한 본서를 서술하면서 로잔대회의 연장선 상에서 정립된 복음주의의 유산들을 그대로 계승, 발전시켜온 커다란 흐름을 잃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1974년 이래 제창되어 온 로잔언약을 평가의 시금석으로 삼았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신학적 진리에 비추어서 그리고 새로운 선교적 도전을 감안하여 정직한 평가를 시도함으로써, 선교적인 순종의 새로운 모델을 도출하고자 노력하였다… 이하 중략….

선교의 열정과 행동주의는 이따금씩, 마치 선교가 인간의 계산으로 다 될 수 있는 순전히 인간적인 사업인 것처럼 몰아가는 경향이 있다. 오늘날 세계에 흩러져 있는 복음주의 공동체의 비전을 대변하는 로잔운동은, 이 복음주의 정신에 입각해서 선교과업을 감당하고자 하는 운동이다. 하나님의 선교 목적을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이 복음주의 정신의 본질적인 요소로서, 예배의 자세와 헌신적인 순종을 가능하게 한다.”

글의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본서의 탁월함과는 별개로, 어떤 의미에서 로잔세계화대회의 핵심 인물이며 IFES의 회장을 역임했던 사무엘 에스코바가 한국 복음주의권에서는 회자되지 못한다는 사실에 큰 아쉬움이 남는다. 우리는 빌리 그레엄이나 존 스토트, 월버포스, 조나단 에드워즈 같은 북미나 유럽 출신의 복음주의자들에게는 열광하면서 남미나 2/3 세계 출신의 복음주의자들에게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으며, 심지어 지적, 문화적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은가.

마치 미국인들을 보면 귀찮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서 ‘친구 거래'를 일삼으며 2/3 세계 노동자들의 미소 어린 손짓에는 불쾌해하는 오만함이 우리의 신앙, 혹은 우리의 복음주의라는 울타리 안에도 깊게 배어 있지는 않은지 진지하게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2007/03/15 18:14 2007/03/15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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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꼼히 읽어야 할, 그리고 소장의 가치가 있는 책"
파문/ 이명원 (새움)

/ 김용주
 

간단히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소장의 가치가 있다. 돈을 주고 사서 볼 뿐 아니라 한 권 정도 가지고 있을 만 하다는 말이다. <비평과 전망>의 편집주간으로 있는 이명원은 성대에서 박사를 수료하게 된 과정을 통해서 꽤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이명원에게 글을 쓸 수 있는 언로가 열리게 된 것은 정말 한국 사회에 크나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그의 글을 읽을 때마다 이러한 생각은 굳어지고 있으며 그의 성실함과 그간 쌓아온 내공의 깊이는 항상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다.

이번에 이명원이 내 놓은 <파문>은 한국의 문단 전반의 논쟁거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았으며 문제의 본질과 그에 대한 이명원의 선택과 옹호를 잘 드러내 주고 있다. 문단의 특성 상 어떠한 논쟁이 있는 경우에 그것이 면밀하게 드러나지 않고, 단순히 유명인의 이름이나 들먹이면서 누구와 누가 논쟁했다는 이른바 스포츠 신문 식의 선정적 기사가 몇 번 오가다가 이내 그 텍스트는 담배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고 만다. 그런 연유로 누군가가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 혹은 진위가 적절하게 드러나지 않은 그러한 논쟁을 잘 정리하고 그 사건의 경위와 과정, 그리고 세세한 내용들을 가감없이 일갈해가는 작업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으며 일독할 필요가 있다.

흔히들 교수란 직함을 가지고 있는 부류 중에 상당수는 평이한 내용을 어려운 용어들로 뒤범벅시켜서 그 가치를 높이려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인문학 분야에서 이러한 일들은 상당히 심한 편이며 그러한 난해한 용어들과 개념들을 숙지하고 있어야만 책을 제대로 읽어갈 수 있는 경우가 있는데, 이명원의 글은 적당한 표현들을 사용하면서도 정작 불필요하게 치장하지 않은 점이 좋다. 진정한 성실함은 표현의 고고함이 아니라 텍스트의 충실함이란 생각을 더더욱 굳히게 만드는 책이었다.
2007/03/15 18:13 2007/03/15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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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하고 있으면 절대 안 되는 책"
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강준만 (인물과 사상사)
 
/ 김용주


강준만 교수가 쓴 1970년대편은 1권을 읽고 2권을 아직 읽지 못하고 있다. 내가 힘들어 하는 것은 그 시절의 고문에 대한 내용 때문이었다. 너무나 생생한 기록들이 정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내용을 읽는다는 것은 불편함을 넘어 고통스럽기까지 했다.

이번에 나온 1980년대편도 4권 모두 구입했다. 또 다시 읽는 것이 그리 쉽지 않았다. 하지만 70년대와 80년대의 차이는 내가 당시를 인지하는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이기도 했다. 결국 나는 책을 거의 다 읽어가고 있다. 광주항쟁과 올림픽으로 대표되는 80년대 이야기는 나에게 심한 현기증을 가져다 줄 만큼 적나라했다.

대학교 근처의 데모, 최루탄, "빨갱이"라는 말, 땡전뉴스, 삼청교육대, "광주 폭도 진압", 지역감정..
지나간 과거의 섬뜩함을 돌이켜보면 심한 현기증이 느껴지지만 난 그다지 유별나지 않은 80년대를 살았다. 어린 나이에 경상도에 살면서 겪은 80년대는 우리나라에 빨갱이가 있다더라, 학생들이 과격한 시위를 한다더라, 전라도 사람들이 유별나다더라, 경상도와 전라도 사이의 지역감정이 나쁘다더라, 김대중씨는 대통령병에 걸린 사람이라더라, 그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남한이 빨갱이 나라가 된다더라 라는 정도의 이야기들이었다. 때론, 대부분의 말들이 정부가 유포한 잘못된 이야기라는 말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치 스포츠신문을 대하듯, 사실 그런 면이 있으니까 그런 소문이 떠도는 것 아니겠냐고 이야기하면서 어느 정도는 긍정을 하는 느낌을 자주 받기도 했다.

활자화 되면 대부분의 이야기를 어느 정도 믿어버리는 순진한 서민들과 적극적으로 사실의 왜곡에 가담한 극우 집단이 일궈낸 80년대는 조금만 파헤쳐도 너무나 아프고 고통스러운 과거임에 분명하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대다수의 언론이 만들어낸 전두환 장군의 노고로 인해 한국사회는 절름발이로 여전히 남아있는 셈이다.

이런 사실들을 기록으로 남길 생각으로 많은 자료와 시간을 들여 본서를 출간한 강준만 교수에게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린다. 책을 읽는 와중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책들은 소장하고 있으면 절대 안 되는 책이라고. 읽고 나면 주위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되도록 자세히 기억할 수 있도록 줘버려야 하는 책이라고. 몇 권이라도 더 사서 이웃에게 읽혀야 하는 책이라고.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돌려 보고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할 그런 책이라고. **

2007/03/15 18:12 2007/03/15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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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성의 날입니다.
여성의 날을 챙기다보면 간혹 "그럼, 남성의 날은 왜 없냐?"며
빈정대는 아저씨들을 자주 만날 수 있습니다.
물론 남성의 날이 없는 이유는 365일이 남성의 날이었기 때문이며
지금도 그러한 상황이 별로 개선되지 않은 느낌입니다.

물론, 예전에 비해 여권이 신장되었다고 하지만
국회의원에서 의사, 변호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우리나라의 고위직에서
여성 비율을 뽑아보면 아직도 한참 멀었구나 싶습니다.


게다가 회사를 다녀보니 왜 이리 여성은 회사 다니기가 힘든지
사무실에서 주방일도 해야 하고,
술자리에서 엄한 소리들도 참아내야 하고
승진에도 한계가 있는 것이 임신, 육아, 출산을 모두 거치면서
회사에서 살아남기가 여간 힘들지 않습니다.

덧붙여 여성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들은 왜이리 큰지,
'감정기복이 심한', '회사보다 가정을 중시하는', '믿을 수 없는' 등등의
수식어를 자주 붙이곤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점점 상황이 나아질 거라는 기대가 있지만,
사실 여성의 권리가 향상되려면
무엇보다 남성의 인식 전환과 헌신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여성의 날에 이리저리 궁시렁 대보고 있습니다만,

오늘 아저씨인 나는..
아내에게 꽃 선물과 함께
아내의 비전과 소명에 대해 들어보고
함께 도울 수 있는 일들로 마음껏 담소도 나누어보고
그러한 일들을 놓고 함께 기도하는 하루가 되기를 기대해봅니다.

여러분도 유익한 "여성의 날" 되시길 바라며..


**세계 여성의 날
1910년 독일의 노동운동 지도자 클라라 제트킨이 제창하여 3월 8일로 정하였다.

세계여성의 날을 이날로 정한 것은, 1857년과 1908년의 3월 8일에
미국의 여성노동자들이 근로여성의 노동조건 개선과 여성의 지위향상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인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1857년 뉴욕시의 섬유·의류 공장 여직공들이
작업조건 개선과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가두시위을 벌여,
진압과정에서 격렬한 충돌이 일어났고, 1908년에는 수천 명의 미국 봉제산업 여종업원이
미성년자 노동금지와 여성참정권까지 포함한 요구조건을 내세워 시위를 벌였다.
(네이버 지식검색)

2007/03/08 19:03 2007/03/08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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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사담 후세인!

/김용주

사담 후세인
김동문 지음/ 시공사

며칠 전 사담 후세인의 사형이 집행되었고 이라크 지역은 예전보다 더 경직된 분위기이다. 세계 각 나라의 매체들 사이에서도 이 사건을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미국의 꼭두각시 역할을 하고 있는 이라크 법원의 정치적 쇼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사담 후세인은 누구길래 인간의 존엄성도 무시당한 채 세계가 주목하는 가운데 극형을 받은 것일까.

사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정작 우리는 선교지로 지목하고 있는 중동 지역에 대해 절 모른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9.11 테러 이후로 사담 후세인과 이라크에 대한 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그 중에서 김동문 선교사의 책이 눈에 띈다. 사형을 통해 이슈화 되고 있는 후세인과 이라크, 중동 문제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받고 싶다면 김동문 선교사의 <사담 후세인/시공사>의 일독을 권한다.

김동문 선교사는 전형적인 386세대로,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났다. 화가 지망생이었으나 한국외국어대 아랍어과에 진학하면서 그림 같은 아랍어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대학 때 IVF라는 선교단체에서 훈련을 받았고 걸프전 직전인 1990년 가을 이집트에 첫발을 내디딘 이래로 저자는 중동 바로 알리기에 변함없는 애정을 쏟고 있으며 '한겨레 21' 전문위원으로, 요르단 암만에서 취재 활동을 벌였으며 현재는 중동전문 자유기고가로 매체에서도 맹활약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가슴으로 떠나는 이집트 이스라엘성지 순례」「이슬람의 두 얼굴」「확실하게 짚어보는 요르단 문명 탐험」등이 있다. 본서의 소개는 아래와 같다.

'전쟁광', '걸프전을 일으킨 장본인' 등으로 불리는 사담 후세인. 그러나 그에 대한 대부분의 평가는 미국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은 편향된 시각을 배제하고 중동과 현지에서 구한 자료를 바탕으로 인간 사담 후세인을 객관적으로 담아 냈다. 이 책에는 베일 속에 가려졌던 사담 후세인의 출생과 성장 과정 등이 국제 정세와 맞물려 서술되고 있다. 또 구하기 힘든 사담 후세인의 개인적인 사진도 실었다. 이 밖에도 저자가 이라크 현지를 방문하면서 만난 다양한 이라크인들의 삶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부록으로 사담 후세인이 직접 쓴 편지를 실고 있어 흥미롭다. 9.11 테러 직후 미국의 컴퓨터 엔지니어 크리스토퍼 러브는 사담 후세인에게 이메일을 보냈고 사담 후세인은 답장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한국 교회는 제3세계와 중동, 중국과 같은 비영어권 나라들의 정치, 문화, 사회에 있어 비교적 정보도 적고 그만큼 관심도 적다. 우리는 헐리우드 영화나 CNN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북미나 유럽의 사회는 마치 자기 이웃처럼 느끼지만 바로 옆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타자로서 타국으로서의 벽이 견고하다. 문제는 이런 나라들이 우리가 지목한 선교 대상국이라는 데에 그 심각성이 있다. 이런 연유로 이 기회에 후세인과 중동 문제를 짚어보는 것도 지식적으로나 영적으로도 유익할 것 같다.

**책 소개 내용 중 일부는 출판 자료를 참조한 것임을 밝힙니다. (편집자 주)


작성: 2007. 1. 14.
기고: 예수가족교회 주보 제8권 2호

2007/01/15 18:19 2007/01/15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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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책을 조심하라!

/김용주
 

홍등가의 그리스도
마크 밴 하우튼 지음, 한화룡 옮김/IVP(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어릴 때 빨간 책은 성인잡지를 의미했다.서점에서 처음 이 책을 보았을 때의 강렬함은 처음엔 표지의 색으로부터 전달되었다가 제목을 보면서 더욱 확증하게 되었다. <홍등가의 그리스도>라니...

이런 이야기를 처음에 들먹이는 이유는 회심한 이후에 접한 책들 가운데 이 책이 나에게 준 충격은 어릴 적 빨간책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 정도로 파격적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물론, 성인 잡지의 컨텐츠를 기대한다면 그건 내가 파격적이라고 생각한 의미를 잘못 짚은 것이지만. 여기서 홍등가는 유흥가가 아닌 도시 빈민가를 지칭한다. 책의 원제와 달리 한국IVP에서는 다소 도발적인 제목을 붙인 셈이다.

단적으로 이야기해서 이 책을 잡아서 읽다가 다시 놓기는 정말 어렵다. 저자는 형이상학적인 신학 개념을 나열하지 않으며, 구태의연하게 당위적인 투로 구호를 반복하지 않는다. 도시 빈민촌의 중심에서 철저하게 체험한 이야기들을 풀어내고 있으며 그러한 체험 속에서 원리를 발견하기도 하고 말씀의 정수를 풀어내기도 한다. 우리는 주변에서 도시의 폐혜를 많이 본다. 밤문화, 단란주점, 폭력배, 노래방 도우미, 안마 시술소와 같은 현란하고 퇴폐적인 밤문화 안에는 사회 구조적인 문제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 안에는 도덕적으로 불경한 인간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또다른 피해자들이 도움의 손길들을 기다리고 있다.

한국의 교회는 도시 빈민 선교에 대한 이야기들을 많이 하지만 실제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 방법에서도 미숙하거나 혹은 무식하다. 또한 교회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이들만을 전도 혹은 선교의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교회에는 중산층 이상의 고학력자들로 가득하다. 이들은 교회 안에서 다시 고고한 문화를 꽃피우며 웬만해서는 범접할 수 없는 또 하나의 벽을 형성한다. 그 벽 안으로 힘없고 빽없고 학벌없는 이들이 들어올 틈이 있을리 만무하다.짧게 마무리하자면 이 책은 꼭 읽어야 하는 책이면서 한 번 읽으면 다시 내려놓기 어려울 정도로 흡인력있는 책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난 후에는 이 텍스트에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진리는 양심을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끝)

 
작성: 2006. 9. 27.

2006/09/27 18:18 2006/09/27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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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를 위한 최고의 입문서

/김용주


만화 기독교 강요
존 칼빈 원작, 김종두 글 그림 / 생명의말씀사 / 2005년 12월

저 유명한 존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평생에 한 번은 꼭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기독교 고전들 가운데 단연 으뜸이라 할 만 하다. 그 방대함에 주눅이 들긴 하겠지만 종교개혁 이후 기독교 교리의 초석이 되는 이 책은 현대의 많은 신학자들과 설교자들에게도 큰 도전과 은혜의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내용의 어려움과 분량인데 번역된 서적도 600페이지에 달하는 정도이니 존 스토트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읽은 평신도라면 이 책을 막 시작하려는 직전의 부담감을 어느 정도는 느낄 법도 하다.

<만화로 보는 세계선교 발달사>의 저자인 김종두 선생의 신간이 나왔다. 이 분이 그려낸 책은 다름아닌 바로 이 <기독교 강요>다. 만화로 그려진 기독교강요라니. 문득 드는 생각이 있다면 이 책이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일 것이라는 추측이다. 사실 나도 어릴 적 신약성경을 각색하여 녹음한 테입과 그림으로 된 책을 읽으면서 자랐고, 지금와서 돌이켜 보면 그 책은 약간의 어색함과 촌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내 신앙의 배경이 되는 데에 일조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야곱이나 모세의 이야기이면 몰라도 추상적이고 신학적인 내용들로 가득 채워진 기독교강요를 어린이에게 읽힌다는 건 어떤 면에선 무모해 보이기까지 하니까.

이 얘기는 잠간 접어두고 책 이야기를 다시 해 보자. 이 책의 시작은 곧장 기독교강요의 내용으로 이끌지 않는다. 어쩌면 저자의 의도가 그런 것일 수 있었겠지만, 만화의 시작은 칼빈의 <기독교강요>가 어떤 책인지, 칼빈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2권 중 첫 권 223페이지 가운데 100페이지를 할애하였으니 거의 1/4의 분량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책은 저자가 감동을 받은 칼빈의 책에 대한 초대이자 그 내용을 재미있게 혹은 쉽고 명료하게 설명하려 한 시도인 셈이다. 만화라는 필터를 통해 저자가 보여주려는 기독교강요의 매력은 실로 대단하며 이러한 매력적인 책에 대해 저자는 특유의 상상력과 예화들을 동원하여 우리에게 보다 직관적으로 칼빈과 그 값진 책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만들고 있다.

본 만화는 2권의 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4권의 기독교강요의 핵심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다. 교리를 공부하는 데에 있어서 어려운 점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손에 잡히지 않는 추상성에 대한 철학적, 혹은 사색적 접근을 독자의 머리 속에 인식시키는 것이리라. 신학 서적을 접할 때 겪는 이러한 어려움은 적어도 나에게는 매번 존재하는 부분인데 그럴 때마다 나는 자주 이러한 내용을 시각적으로, 혹은 명료하게 표현하거나 전달할 수 있는 도구가 없을까 하는 상상을 자주 하곤 했다. 그러한 점에서 이 책의 탁월함은 만화라는 매개물을 사용한 것 자체에 큰 가치를 둘 수 있겠다. 만화라고는 하지만 교리를 설명할 때 사용되는 추상적인 이미지의 가시화는 그림이라는 매개물이 효과적이라는 깨달음을 얻은 것은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은 누구가 가질 법한 생각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 책은 내가 볼 때에는 내 유년기 때에 추억으로 남아있는 촌스러운 신약성경 이야기처럼 어린이를 대상으로 쓰여진 것은 아닌 듯 하다. 오히려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성인경 목사님의 <프란시스 쉐퍼 읽기>란 책이 머리 속을 맴돌았다. 대학 시절 프란시스 쉐퍼는 기독교세계관에 관심이 많던 나에게는 하나의 넘어야 할 산과 같은 존재였으나 그의 전집은 그 분량이나 내용면에서 그 시기의 나를 압도했다. 철학자들부터 시작해서 성경 해석, 문화, 역사... 무엇보다 그 어려운 내용의 전집 분량이 만만치 않았고 나는 한 두 권의 책을 읽고는 쉐퍼의 핵심 메시지조차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 때 가뭄의 단비처럼 만난 책이 성인경 목사님의 쉐퍼 사상 입문서이자 개론서인 <프란시스 쉐퍼 읽기>였다. 그 책은 쉐퍼에 대한, 그의 전집에 대한, 그리고 그의 사상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적당한 분량의 책이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쉐퍼 전집이 그렇게 힘든 책이었나 싶지만 그 때에 그런 책이 없었다면 나는 이십대 초반에 기독교세계관의 매력을 파헤치는 데에 주춤하며 멈춰섰을 것이다. 이제와서 그것들을 잃는다고 생각하니 생각만으로도 아찔하다.

김종두 선생의 만화는 그런 책이다. 기독교강요를 위한 입문서이자 개론서로서 그는 효과적인 방법으로 만화를 택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선택은 정말 유효적절했고 기독교강요를 정말 가장 잘 설명하였다는 생각이 든다. 사족으로 덧붙이자면, 그러면 이 책은 어린이들을 위한 책이 아닌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이 책의 의미를 되새기려면 많은 시간이 걸려서야 가슴판에 새겨질 그런 책이라는 거다. 어쩌면 어린이에게도 더 효과적일 수도 있겠다. 아이들은 어린 시절의 시각적인 기억을 더 생생하게 기억하기 때문에 말이다. 기독교강요를 읽자. 힘들다면 이 책의 도움을 받으라. 그리고 원서의 기억이 희미해질 때 가볍게 다시 꺼내보라. (끝)


작성: 2006. 1. 18.

2006/01/18 18:17 2006/01/18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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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 에스코바가 새롭게 일깨워주는 선교 모델
「벽을 넘어 열방으로」…로잔대회 이후 정립된 복음주의의 유산 계승, 발전

 

 

거리를 지나가는 미국인들에게 친구가 되어 주겠다고 말을 거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는 많은 모양이다. 예전에 박노자 교수의 글에서도 언급된 적이 있듯이, 한국인들은 지나가는 미국인들을 보면 자신이 친구가 되어 주겠다며, 그 대신 자신에게는 영어를 가르쳐주고 미국인에게는 자신이 한국 문화나 생활을 위한 가이드가 되겠다는 이야기를 곧잘 한다고 한다. 그 당시에도 박노자 교수를 미국인으로 오해하여 길거리에서 이런 황당한 ‘친구 거래'를 제안한 우리나라 대학생들이 꽤 있었던 모양이다.

 

얼마 전 신문에서 버스에 타고 있던 제3세계에서 온 노동자가 옆에 있던 아이에게 귀엽다고 손짓을 했다가 더러운 병에 옮는다고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낸 아이 어머니의 반응에 서러움을 토로한 기사를 얼핏 읽은 기억이 난다. 그 때 나는 버스에 탔던 제3세계에서 온 노동자가 만약에 해럴드나 타임즈를 들고 있는 미국인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 주인공이나 혹은 백인들과 자신들을 동일시한다고 한다.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백인들 옆에서 함께 웃으며 대화하는 자신을 상상하기는 쉬워도 스크린에서 남미, 혹은 중앙아시아, 이슬람 국가의 사람들이 나타나는 장면에서는 왠지 자신과는 다른 사람을 대하듯 쉽게 타자화시키면서 말이다. 이런 현상은 영화에서뿐만 아니라 북미에 거주하는 한인들에게서도 자주 보여지는 현상인 듯 하다. 이런걸 두고 옥시덴탈리즘이라고 칭하는 건가.

서론이 길었다. 내가 열과 성을 다하여서 소개하고 싶은 본서 「벽을 넘어 열방으로」(원제 : A Time for Mission)는 한국에 소개된 사무엘 에스코바(Samuel Escobar)의 유일한 책이다. 서론에서 이미 감지했겠지만, 나는 본서의 탁월함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독자들로 하여금 본서의 저자에게 되도록 집중하게 만들고 싶다.

 

본서의 저자인 사무엘 에스코바는 페루 태생의 입지전적인 신학자로 1974년 로잔세계복음화대회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본서의 서문에서 선교한국의 상임총무인 한철호 총무는 그를 가리켜 “남미 출신으로 오랫동안 국제기독학생회(IFES) 간사와 선교운동 지도자로 사역했고 현재는 신학교에서 선교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어 서구와 2/3세계를 모두 잘 이해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전 세계적 관점에서 선교를 이해하는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 적임자”라고 평했다. 하지만 사실상 한철호 총무의 에스코바를 향한 관심은 훨씬 이전부터였던 듯 하다. IFES World Assembly가 한국에서 열렸던 1999년 한국기독학생회의 소식지인 <대학가 >를 통해서 이미 한철호 총무는 에스코바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1970-80년대 남미국가들은 좌파혁명에 시달리고 있었다. 각 국가들은 부정과 부패로 파산하기 시작했고,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혁명이 계속 일어나고 있었다. 캠퍼스 젊은이들마저도 무력혁명에 가담하거나 대부분 운동권 세력에 의해 좌우되고 있었다. 무력혁명에 참가하는 학생들은 학교 안에서도 총기를 소유하고 때로는 강의실까지 들어와 자신들의 혁명에 동참할 것을 강요하는 상황이니 교수들도 그들이 두려워 방관할 수밖에 없는 지경이었다.

당시 대학 안에서 성경공부 모임을 하고 있던 복음주의 학생(IVF)들은 이러한 상황에 반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먼저 교수님을 찾아가 정식으로 학생들에게 진정한 해방을 가져다주는 복음을 전할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다. 그 결과 그들은 강의실로 들어가 공개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됐다. 학생들은 말로 복음을 전할 뿐 아니라, 그룹을 만들어 빈민가로 찾아갔다. 당시 남미에서 혁명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정부의 부패와 가난한 자들에 대한 외면이기 때문이었다.

 

이들의 이야기가 학교 안에 알려지기 시작하자, 당시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 과격 무력운동권에 질려 있던 학생들이 이 모임에 관심을 보였고, 곧 성경공부 모임은 크게 부흥하기 시작했다. 이 사실이 무력혁명권 학생들을 자극했다. 성경공부 모임 리더들은 테러의 목표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복음을 전했다. 결국 한 리더의 약혼자인 자매가 테러로 죽임을 당하게 됐다.

이런 희생을 치른 결과 남미의 IVF학생모임은 대학 안에서 점차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복음이 그들이 처한 가난과 부패라는 상황 속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 후 남미의 학생운동은 급속한 발전을 가져왔고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는 대륙으로 바뀌었다. 당시 남미 IVF의 간사였던 사무엘 에스코바(Samuel Escobar)는 현재 미국의 남침례교신학교 교수면서 IFES 국제 총재이다." (1999. 7. 대학가, "국경 없는 캠퍼스의 증인들" 중에서 / 한철호)

본서를 통해서도 에스코바는 기존의 선교 관련 서적과는 다른 접근 태도를 보여준다. 무엇보다 20세기 후반부터 변화된 2/3세계 선교사들의 증가에 주목한다. 그는 오늘날은 까만 눈에 갈색 피부를 가진 라틴 아메리칸 혼혈을 의미하는 페루인 '메스티조(mestizo)' 선교사들이 늘어나고 있고 있으며 자신이 몸담았던 선교연구센터에 오는 선교사들은 이제 미국인들이 아니라, 나이지리아에서 의료 사역을 하거나 아마존 밀림에서 교회개척 사역을 하던 한국 선교사들과, 인도네시아에서 신학교 사역에 종사하던 일본인 선교사들, 또 방글라데시에서 경제 개발에 참여하던 필리핀 선교사들이었음을 주목하며 본서를 시작한다.

그는 선교가 세계화 물결을 타는 데만 급급하다가는 복음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음을 경고했으며, 르네 빠디야가 1974년 로잔복음화대회에서 발표한 논문을 인용하여 수많은 선교 기관들이 기독교 선교라는 이름으로 전파하고 있는 복음을 근대의 서방적인 가치관(미국적인 생활 방식)과 전적으로 동일시라는 것에 대해 비판한다. 특히 그는 레슬리 뉴비긴이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때때로 문화적인 요소를 복음의 본질과 혼동하게 되었고, 그 결과 상대적일 뿐인 자신들의 문화가 마치 하나님의 권위를 부여받은 절대적인 진리인 것처럼 잘못 전달하게 되었다"는 표현을 인용하며 복음을 전하는 와중에 발생하는 문화의 강요 문제에 주목한다

또한 에스코바는 회심의 문제를 거론하면서 복음주의 선교사들이 회심을 지나치게 강조한다는 비판을 받아왔음을 지적하며, 복음주의자들의 회심 초청은 사람들의 문화적 순전성을 파괴하는 행위라고 비난한다. 책에 언급했듯이 그는 1988년에 이 주제를 고려하기 위해 소집된 세계복음주의협의회와 로잔위원회의 공동 대회는 "회심에 관한 홍콩 선언"(Hong Kong Call to Conversion)을 발표하면서 내린 결론을 서술했다.

"선교는 너무나 빈번히 복음과 함께 낯선 문화를 수출해 왔으며, 교회들은 때때로 성경보다는 오히려 문화의 노예가 되어 왔다"(제10항)고 상기시킨다. 홍콩 선언은 이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였다. "모든 회심에는 근본적인 불연속성이 존재하는데, 회심자는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행26:18)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선언은 또한 "회심은 회심자들을 '탈문화적' 존재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자신이 속한 문화 공동체의 일원으로 남아 있어야 하며, 성경의 계시와 모순되지 않는 가치들은 가능한 한 유지해야 한다. 어떠한 경우라도 회심자들은 선교사의 문화로 '전향'할 것을 강요 받아서는 안 된다."

이런 이유로, 무엇보다 그는 선교에 있어 성경의 자국어 번역과 전통 문화의 수호에 큰 비중을 두고 있으며 이는 단순한 이론이 아닌 오랜 시간 동안 선교지의 중심에서 얻어낸 실제 현상임을 증명한다. 그는 “원주민 교회를 세우고 토착 신학을 장려하려는 노력과 아울러 성경을 번역하는 일은, 세계화 과정의 불가항력적인 압력을 거슬러서, 지역적이고 토착적인 것들을 소중하게 여기도록" 했으며 수년 전 아프리카 대륙의 무수한 독립 교회들이 놀랍게 발전하는 과정을 깊이 연구하였던 아프리카 선교사 출신의 선교학자 데이비드 바레트가 지적한 대로 아프리카의 복음화 과정에서 자국어 성경의 존재가 독특한 역할을 하였음을 언급했다.

에스코바는 선교의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서구 문화에서부터 기인한 지나친 효용성이나 기술적인 부분 그리고 목표지향적인 접근을 경계한다. 그는 종교성이 포스트모던 문화의 상징물로 재등장한 이 시점에서, 선교를 위한 기도조차 그 교육과 방법론이 포장되어 판매되는 하나의 산업으로 전락하였고, 선교사들 또한 사람들을 '비인격화'하여 그들은 단지 복음전도의 '목표물'로 간주하고 '미전도 대상'으로 만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며, 이런 식으로 하면 '미전도 대상'은 우리가 계획을 성취하고, 우리 전략의 효율성을 입증하는 데 사용하는 얼굴 없는 대상물이 되고 만다고 말한다. 또한 사람들을 다루는 일에서 과학적 정확성에 대한 욕구를 채우기에 급급한 일종의 '기술'로 전락하기 쉬우며 이것이 바로 오늘날 서구 사회와 또 서구화된 아시아 국가들에서 볼 수 있는 특징들이란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무엇보다 본서의 큰 유익이 있다면 에스코바는 선교에 관한 본서를 서술하면서 로잔대회의 연장선 상에서 정립된 복음주의의 유산들을 그대로 계승, 발전시켜온 커다란 흐름을 잃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1974년 이래 제창되어 온 로잔언약을 평가의 시금석으로 삼았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신학적 진리에 비추어서 그리고 새로운 선교적 도전을 감안하여 정직한 평가를 시도함으로써, 선교적인 순종의 새로운 모델을 도출하고자 노력하였다… 이하 중략….

선교의 열정과 행동주의는 이따금씩, 마치 선교가 인간의 계산으로 다 될 수 있는 순전히 인간적인 사업인 것처럼 몰아가는 경향이 있다. 오늘날 세계에 흩러져 있는 복음주의 공동체의 비전을 대변하는 로잔운동은, 이 복음주의 정신에 입각해서 선교과업을 감당하고자 하는 운동이다. 하나님의 선교 목적을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이 복음주의 정신의 본질적인 요소로서, 예배의 자세와 헌신적인 순종을 가능하게 한다.”

글의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본서의 탁월함과는 별개로, 어떤 의미에서 로잔세계화대회의 핵심 인물이며 IFES의 회장을 역임했던 사무엘 에스코바가 한국 복음주의권에서는 회자되지 못한다는 사실에 큰 아쉬움이 남는다. 우리는 빌리 그레엄이나 존 스토트, 월버포스, 조나단 에드워즈 같은 북미나 유럽 출신의 복음주의자들에게는 열광하면서 남미나 2/3 세계 출신의 복음주의자들에게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으며, 심지어 지적, 문화적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은가.

 

마치 미국인들을 보면 귀찮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서 ‘친구 거래'를 일삼으며 2/3 세계 노동자들의 미소 어린 손짓에는 불쾌해하는 오만함이 우리의 신앙, 혹은 우리의 복음주의라는 울타리 안에도 깊게 배어 있지는 않은지 진지하게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2005/05/01 23:58 2005/05/01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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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한 영혼당 2달러로 결과를 보장한다"
마이클 호튼의 <복음이란 무엇인가> / 현대 복음주의 세일즈 마인드를 비판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라는 영화가 있었다. 어릴 때부터 할리우드 영화에 미쳐있던 주인공과 그 친구들은 학교 다닐 때부터 미국 영화의 제목과 감독, 주연 배우들 이름은 물론 영화의 스타일이나 기타 세세한 내용까지도 외우고 다닐 정도다. 종국에 그 친구는 시나리오 작가가 되어 시나리오 대상을 수상하는데, 후에 알고 보니 할리우드 영화의 장면 장면을 짜깁기해 놓은 것으로 밝혀지는 내용이다.


패스트푸드처럼 길들여진 미국식 복음

이 영화는 우리에게, 아니 나에게 큰 의미가 있었다. 나는 미국 문화에 너무나 깊게 길들여져 있다는 사실을 그 즈음에야 처음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피자헛'에서 이태리식이 아닌 미국식 피자를 시켜먹고 '스타벅스'에서 에스프레소 커피를 마시며, '와퍼'나 '빅맥' 같은 햄버거에 <터미네이터>와 <프렌즈>를 즐기며 보며 자라온 나에게서 한국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문제는 교회 문화에도 동일하게 존재한다. 'Praise & Worship'이란 용어는 한국에서 특정한 찬양 집회의 형태를 의미한다. 또 한국에서 일어나는 찬양집회의 스타일은 정확하게 'Hosanna Integrity'나 'Vineyard Church'에서 행하는 스타일과 일치한다. 결국 한국 교회의 찬양 집회는 그 스타일 그대로를 한국말로 번역하여 따라한다는 의미다. 소그룹 운동, 극장식 교회, 내적 치유와 같은 용어들은 미국 교회에서부터 발생되어 한국으로 넘어온 개념들이다. 요약하자면, 우리는 좋건 싫건 세속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미국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본론으로 넘어가자. 마이클 호튼의 저서인 <복음이란 무엇인가>(원제: Putting back into amazing grace)는 책에 쓰인 대로 기독교의 기본 진리, 즉 교리에 대한 책이다. 이 책은 흥미롭게도 종교개혁 세계로 초대한다. 마이클 호튼은 우리가 기독교 역사를 통해 접한 대로 오직 성경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만인제사장주의, 종교개혁의 보편성, 실재성, 예배중심성에 대한 주의 환기로 우리를 교리의 중심으로 이끈다. 

 

 

복음은 24시간 편의점처럼 

이 책의 흐름은 정확하게 기독교의 기본진리와 일치한다. 도예빌트가 완성한 창조, 타락, 구속의 흐름을 따르면서 예정론과 성육신, 소명과 중생, 칭의, 교회와 성례, 그리고 종말까지 우리가 명쾌히 정리하고 내적 확신을 가져야 하는 중심 교리들을 모두 건드리고 있다.

 

나는 이 책에서 집중한 교리적인 측면을 서술하기보다는 그간 기독교 현대적 이슈들을 건드렸던, 웨스트민스터의 신학 교수로 하여금 왜 또다시 복음주의적 정통 교리에 집중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말하고 싶다. 어쩌면 그러한 컨텍스트가 우리에게 더 큰 시사점을 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이클 호튼의 전작인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는 이 책과 함께 읽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미국 사회로부터 신앙의 근본적인 '수혜를 입는' 우리에게 이 책은 시사하는 면이 많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마이클 호튼은 이 책을 통해서 미국 복음주의자들이야말로 미국 사회와 시민 생활과 문화 생활에서 기독교 몰락의 주범이며, 기독교적 활력의 침체의 책임은 세속 인본주의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세속화된 기독교인에게 있다고 서술한다. 그는 역사적으로 볼 때 미국으로 건너간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의 입교인 자격에 회심의 체험을 요구한 지 불과 30년이 지난 1662년에 와서 성찬이 "중생의 여부와 관계없이 품행이 단정한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었다는 점과 당시 기독교가 점점 타협을 통하여 한 사회를 통합 유지시켜주는 '시민종교'가 되고 말았다는 사실에 집중한다.
 
또한 복음주의자들이 칼빈주의적 정통신앙을 포기할 때, 그들은 가족과 교회와 지역 사회 및 학교와 직장에서 그들에게 성경적 원리대로 행동하며 사고할 수 있게 하는 지적 사고의 체계 또한 함께 버렸으며 홉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교회들은 세속 사회와의 지적 접촉을 회피하였고 신앙이 지적 경험의 총체적 세계에서 중요한 요소라는 생각을 포기해 버렸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특히 호튼은 제2차 대각성 운동 기간(1775~1825)에 대중적인 부흥 운동을 통하여 신앙의 객관적 내용이 신앙의 실존적 행동으로 대체되어 버렸음을 강하게 비판한다.

 

"죠지 휫필드와 조나단 에드워즈가 이끌었던 제1차 대각성 운동을 제2차 대각성 운동과 비교해 보면 그 차이를 쉽게 알 수 있다. 초기의 대각성 운동시 신학적, 철학적, 학문적 천재인 조나단 에드워즈가 바로 전도자였다. 그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초대했는데, 다름 아닌 교리에 대한 명료한 선포를 통해 그 일을 수행했다…(이하 중략)…그러나 제2차 대각성 운동시에는 메시지가 하나님에서 인간으로 전환되었다.

 

첫 번째 대각성 운동에서는 강조점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셨는가'에 있었다면 두 번째 대각성 운동에서는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이리하여 구원을 달성하기 위하여 듣는 사람들이 해야만 할 일을 할 수 있게 하도록 도와주기 위하여 테크닉과 방법의 큰 체계가 등장하게 되었다. 에드워즈나 휫필드에게는 부흥이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였다. 그에 반하여 나다나엘 테일러와 찰스 피니에게서 부흥은 "수단을 올바로 사용한 것 그 이상은 아무 것도 아니다." 특히 피니는 '부흥은 기적이 아니며 어떤 의미에서도 기적에 의지하지 않는다. 부흥은 순전히 수단을 올바르게 사용한 철학적 결과이다’라고 말했다."

 

 

소비자 중심이 최고의 복음?

이러한 신앙의 실용주의적인 잣대가 개입되었던 부분뿐만 아니라 미국 복음주의는 소비자 중심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는 19세기 말의 복음전도자 드와이트 무디가 세일즈의 접근법을 그의 복음 전도 사업에 이용하게 되었으며, 스스로를 복음 전도자이지만 복음을 전할 때 여전히 세일즈맨이라고 주장했던 점을 지적한다. 즉 그는 단지 파는 상품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나중에 세기가 바뀐 후에 빌리 선데이는 강단을 무대로 바꾸기가 일쑤였으며 자기가 "가장 효과적인 복음 전도자이며 한 영혼당 단 2달러로 결과를 확실히 보장한다"고 자랑하곤 했던 점을 인용하며 현대 복음주의의 세일즈 마인드를 비판한다.

 

또한 그는 크리스탈 교회의 로버트 슐러 목사가 "신학은 하나님 중심적이지 인간 중심적이 아니라는 전통적 개혁주의 신학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과거에 루터와 칼빈이 신본주의적으로 생각한 것은 적절했다. 하지만 이제는 형세가 정반대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 부분이나 자아 존중이라는 새로운 종교개혁에서 "죄는 하나님의 자녀 한 사람에게서 신적인 존엄성의 권리를 빼앗는 것은 무엇이나 죄"라고 주장했던 점을 지적했고, 이렇게 복음의 본질에서 벗어난 현대 교회의 문제들을 토저의 말을 인용하여 우려의 목소리를 높였다.

 

"신식 십자가는 죄인을 죽이지 않는다. 그 새 십자가는 죄인에게 더 즐겁고 깨끗한 삶의 길을 보여 줌으로써 죄인의 방향을 고쳐 준다. 주장이 강한 사람들에게 새 십자가는 '자! 어서 주님을 향하여 너희 권리를 주장하라'고 말한다."

 

미국제 복음주의의 부정적 영향은 한국 교회에도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한국에서도 "경영자 예수", "자아 회복을 위한 효율적 기독교"라는 문구들이 여전히 즐비하며 인간의 편의를 위해 예배당을 공연장처럼 혹은 수많은 물질을 투자하여 크리스털 교회에 버금가는 교회를 짓고자 애쓰는 교회도 보인다. 인간의 죄는 상처로 대체되었고, 전 지구적 구원은 개인의 내적 치유로 변질되고 있으며 사상의 중심에 서있던 복음주의자들은 도리어 신앙이 지극히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위안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듯한 생각을 품는다.

 

하나님 중심의 신학은 인간 중심, 인간 편의를 위한 시민종교로 대체되고 있다는 것이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를 쓴 호튼의 비판이었고, <복음이란 무엇인가>는 진정한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되짚어 보고자 하는 그의 충정 어린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할리우드 키드로 대변되는 우리도 그의 메시지에 진지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은지 자문해 보아야겠다. 

2005/04/01 23:57 2005/04/01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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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메이커에 대한 단상”
: <매트릭스>는 IT기술의 상징

매트릭스 리로디드를 보는 중에 많은 관객들이 웃었던 장면이 있었다. 2편에서 영화의 전개의 핵심이 되는 키메이커를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많은 관객들은 영화관 군데군데에서 황당하다는 투의 웃음소리를 내곤 했다.
그 웃음은 번역된 단어와도 상관이 있는데 굳이 ‘열쇠공’이라는 번역을 하지 않고, ‘키메이커’라는 그럴듯한 발음의 영어를 그대로 씀으로써, 관객은 과연 어떤 인물일까 궁금해 하다가 결국 우리 나라의 도로변에서도 볼 법한 열쇠집 아저씨가 화면에 나올 때 받는 황당함과 관계가 있었던 듯 하다. 그런 의미에서 만약 우리나라가 아닌 미국에서도 이 장면을 보면서 관객들이 그런 황당한 웃음을 지었을까 하는 의아함이 생긴다. 그들은 처음부터 키메이커를 말그대로 그냥 '열쇠공'으로 자연스레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하지만 단순히 단어와 인물의 미스매치를 넘어서는 흥미로움이 키메이커에게는 있는 듯하다. 그 흥미로움으로 인해 웃음을 짓게되는 사연을 조금 소개하자면 이렇다.

니오(Neo)가 오라클(Oracle)을 만나는 장면에 보면 무술을 잘하는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가 자신은 세리프(sheriff)라고 말한다. (세리프(sheriff)는 보안관 정도로 보면 된다) 니오(Neo)는 이제 매트릭스 안을 디지털의 조합으로 인식하는데 세리프(sheriff)는 코드가 보이지 않고 노란색 광채만 띠고 있어서 의아하게 쳐다보는 장면이 나온다.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이 두 사람의 쿵후 대결이 액션신을 삽입하기 위한 것이라 여기고 지루하게 느끼기도 한다. 혹은 오라클(Oracle)의 보디가드 정도로 보고 넘길 수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뜬금없이 한참 싸우다 이제 됐다면서 오라클(Oracle)에게 안내한다. 그러면서 당신이 니오(Neo)인지 확인해야 했다면서 싸워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오라클(Oracle)에게 데려다 줄 때 문이 많은 통로를 지나는데 니오(Neo)는 그것을 백도어 즉, 해커들이 소스에 편법적으로 접근하는 곳임을 알아본다. 그러고 세리프(sheriff)에게 프로그래머냐고 묻는다. 그는 중요한 곳을 지키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참고로 오라클은 1977년 로렌스 J. 엘리슨(Lawrence J. Ellison)이 설립한 데이터베이스 소프트웨어 회사다. 오라클이 예언자로 받아들여지던 1편에서도 대부분의 프로그래머 관객들은 DB에 많은 데이터가 있어서 그 DB를 검색하여 미래를 예측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문제의 장면.
키 메이커라는 영화 전편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가진 인물은 그야말로 열쇠를 만드는 사람이었다. 여기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열쇠공의 외모에서 웃고만다.
키 메이커도 백도어를 이용한다. 단지 그는 각 문에 해당하는 키를 가지고 있다. 그 문에 합당한 키를 꽂으므로 각 소스에 접근하게 되어 있다. 그런 식으로 니오(Neo)는 매트릭스의 설계자인 아키텍트를 만난다.

IT(정보기술)에서는, 정보의 보안 및 인증에 대한 부분이 하나의 분야로 설정되어 있다.
정보의 유출을 막기위해 네트워크 시스템은 보안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며, 이 정보에 접근(access)을 허용할지 말 지를 결정하는 인증 과정을 거친다. 대개 이 인증의 방법으로 키 값에 의존하게 되어 있다.
키는 크게 두 개의 범주. 즉 공개키와 비밀키가 있다.
공개키는 주변에서 쉽게 다운 받을 수 있으나 암호화되어 있어서 자신이 그 키 값을 가지고 있다해도 그것을 보안프로그램의 방식대로 풀지 못하는 한에는 그 내용을 알 수 없다.
비밀키는 암수 구별이 있는 것과 같이, 꼭 들어맞는 열쇠와 자물쇠처럼 유일한 한 세트를 서로 주고받아 인증을 하는 방식이다. 매트릭스가 다른 SF영화와 차별되는 하나의 모티프는 이런 IT쪽의 지식이 스며들어 있다는 점이다.

처음에 오라클(Oracle)이라는 프로그램에 접속하기 위해서는 그 앞에 작동하고 있는 보안프로그램인 세리프(sheriff)의 인증이 필요하다. 세리프(sheriff)는 누구나 상대할 수 있기 때문에 공개키를 상징한다. (제미있는 것은 보안에서 공개키를 표시할 때 노란색 열쇠로 표현된다. 따라서, 그의 노란색 광채는 공개키의 암시라고 볼 수 있다.) 단, 싸워보아야만 그가 누구인지를 인증할 수 있기 때문에 쿵후대결을 암호해독이라고 볼 수 있다. 쿵후실력으로 인증을 받은 니오(Neo)는 백도어를 통해 오라클(Oracle)이라는 프로그램에 접속하게 된다.
그에 반해 키 메이커는 비밀키를 상징한다. 그는 짝이 맞는 키를 만들어서 무수히 많은 비밀키를 들고 다닌다. 아키텍트를 만나러 가는 장면에서 니오(Neo)가 키메이커가 만든 키를 문에 꽂을 때 키가 문에 꼭 맞는다는 것을 클로우즈업된 화면으로 보여주는 것은 비밀키를 이용하여 인증을 받았고 접근이 허용되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따라서 키메이커를 보면서 웃는 이들 중에는 키메이커의 왜소함이나 아날로그 방식의 키를 만드는 그의 모습에 단순히 웃는 경우도 있겠지만, 아하! 하며 그 상징성에 흥미를 느끼며 즐거워하는 프로그래머들도 꽤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2003/06/09 18:06 2003/06/09 1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