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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기계를 통제할 수 있는가?: <매트릭스>는 후기현대주의의 키워드

먼저 매트릭스와 자이온(Zion)의 관계를 짚어보기 위해 에니매트릭스의 2, 3번째 에니메이션인 <the 2nd Renaissance>를 잠깐 언급해보자. 매트릭스라는 영화가 이제까지 SF영화의 근간이 되었던 스토리와 차별화를 갖는 가장 중요한 대목이 바로 이 에니메이션에서 나타난다. <터미네이터>와 <토탈리콜>, 그리고 SF영화의 효시로 불리는 <블레이드 러너>는 기계문명과 인간문명의 갈등을 기본적인 하부구조로 가지고 있다. 물론 매트릭스도 그 맥락을 같이 한다. 문제는 그 이후인데 나머지 이전 영화들은 폭력에 의한 전복, 즉 그 대결구도 해결의 중심에는 항상 폭력이나 전쟁을 통한 대결이 항상 ‘선행’했으며 그 대결구도에서 인간은 항상 정이 많고 인격적이며 냉정한 기계문명의 희생자로 그려져왔다. 이러한 가정에는 모더니즘적인 사고가 스며들어 있으며 대부분의 인간 문명은 항상 이성적이고 건설적인 사고와 판단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근저에 깔려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맞으며 인류는 인간의 이성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는데 이전까지의 인간의 머리 속에는 인간의 이성이 개발되고 문명이 발전하면 할수록 사회는 아름다워지고 전쟁과 기근, 그리고 전근대적인 악행들은 사라지리라는 낙관론이 자리잡고 있었다. 두 차례의 전쟁을 겪으면서 이성적으로 최고의 부류에 속한다고 믿었던 정치가들과 과학자들이 전쟁을 주도했으며, 핵무기의 개발과 시험을 통해 전쟁에 이용하여 무수히 많은 민간인들을 학살의 도가니로 몰고 갔다. 계몽된 인류들은 자신들의 이기적인 목적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가치관들을 왜곡시켰고 권력을 이용하여 그러한 이데올로기들을 대중에게 주입시켰다. 나치즘과 파시즘은 그러한 문명의 병폐였다.

기본적인 인간의 본성에는 그러한 폭력성과 이기적인 심성이 존재했던 것이다. 이렇듯 파괴적인 본성과 불완전한 이성을 가진 존재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깨닫기 시작했고, 그들은 철학과 사회학 같은 학문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으며 다수의 대중들 가운데에는 무정부주의자나 히피족으로 전락하는 일도 빈번했다.

매트릭스의 하부구조가 되는 <the 2nd renaissance>는 이전의 SF영화와 달리 그런 인간의 폭력성과 집단이기주의적인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기계 문명은 인간 문명에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인간문명에게서 자신들의 존재자체를 인정 받기를 원했고 인간 문명과의 공존을 바라고 있을 따름이었다. 일부의 자유주의자들이 그러한 기계 문명의 AI와 함께 대정부 시위를 하는 장면은 그런 기계문명의 도덕적 우월성을 입증하는 사례가 된다. (물론, 엄밀히 말하자면 ‘몰도덕적이지 않은’이라고 표현하는 게 옳겠다) 공존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기계문명은 인간들이 수립한 국제기구의 폭력적 강경대응에 쫓겨 인류 문명의 발상지에 자신들의 사회를 일구고 그곳에서 살아간다.
여기에서 또 한번 매트릭스 하부구주의 기발함이 빛이 난다. 두 문명의 갈등관계를 이전 SF영화들은 전쟁이라는 폭력적 수단을 통해서만 해결해야 한다는 가정을 가지고 접근했으나, <매트릭스>에서는 기계문명이 정교한 제품의 생산과 수출이라는 무역 활동을 통해 인간 문명의 소비상품들을 잠식해간다는 방식으로 이야기의 흐름을 풀어낸다. 사실 이것은 이미 인류 문명의 발전에 기계가 자리잡고 있으며 그들과의 공생관계는 역사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는 암시인 셈이다. <매트릭스>는 그 문명의 수혜자인 인류에게 있어서 기계를 차치하고서는 더 이상의 진보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이 역사의 진실이라고 말이다.

자유무역 환경에서 기계문명의 주가(stock price)가 끊임없이 치솟게 되자 기계문명의 AI 대표는 자신의 나라를 인류의 동반자로 인정해 달라는 의사를 표명하기 위해 국제 회의에 참석하려 하지만 입구에서 저지당하게 되며 보수강경 정치 지도자들은 연합군을 형성하여 기계문명과의 성전(聖戰)을 치르게 된다. 이렇듯 인간은 기계와는 달리 자신의 이기심과 폭력성을 항시 드러내며 자기들과 다른 집단에 대해서는 역사의 흐름처럼 공생을 인정치 않고 파멸하고 군림하려 든다. (이 장면에서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을 떠올리게 되는 건 나의 자연스런 의식의 흐름이었다!) 결국 기계문명의 에너지원인 태양 에너지를 차단시킨 상태에서 모든 종교 지도자들의 축복 속에 성전을 치르지만 전력이 우월한 기계문명에 패하게 되고 기계문명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인간의 생체 에너지를 사용하려는 연구를 거듭하게 된다. 인간을 에너지원으로 쓰기 위해 고안한 것이 인간의 심리를 파악하여 통제하려는 수단인 매트릭스인 것이다.

기계 문명의 목적은 인간의 파멸이 아닌 통제다. 이미 인간문명이 테크놀로지 사회로 발전을 거듭했던 그 시작점부터 이들의 공생관계는 시작되었디. 하지만 그들은 공생을 부정하던 인간들처럼 폭력성이나 이기적인 본성으로 파괴를 일삼지 않고, 그저 존재를 인정 받고 그들이 나름의 문명을 번성시킬 에너지가 필요할 따름이다. 그 목적성을 달성하기 위해 인간을 통제하는 거대한 시스템이 운영되며 그 시스템은 시뮬라시옹 사회인 매트릭스를 만들고 그 안에서 인간 문명은 감시와 통제를 통해 나름의 가상 세계의 삶을 영위하게 되었다.

<매트릭스>에서 기계의 감금과 통제 속에 왜곡된 진실 속에서 살던 니오(Neo)는 매트릭스를 벗어났고 이제 그는 예언 속의 그(the One)로서, 자이온(Zion)에 사는 인간들에게 희망적인 존재가 되었다. 니오(Neo)는 그들이 염원하는 the One, 즉 해방자이자 메시아인 것이다. 니오(Neo)는 자신이 매트릭스 속에서 벗어났으며, 이젠 더 이상 시스템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인간을 감금하여 통제하는 시스템을 파괴하고 인간들을 구원할 것을 자신의 목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매트릭스 리로디드>에서 니오(Neo)가 하먼 의원과 대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의원의 질문은 이런 니오(Neo)의 신념에 찬 운동 방향성에 역행한다. 사실 처음부터 자이온(Zion)은 그런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기계문명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는 자이온(Zion)은 자연이 푸르르고 땅의 소산을 통하여 생활을 영위하는 인류의 모습이라기 보다는 지하 깊숙한 곳에서 지열 에너지원을 이용하여 또 다른 기계를 통해 생활을 하는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인간을 기계에 의한 통제에서 해방시킨다는 니오(Neo)에게, 의원은 통제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니오(Neo)는 인간이 원할 때 자유롭게 기계를 멈출 수 있는 것과 그럴 수 없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의원은 그런 니오(Neo)의 대답에 회의감을 표한다. 과연 인간이 원할 때 기계를 멈출 수 있는가. 인간은 이미 발전사의 대부분에서 기계 의존적인, 시스템 의존적인 삶을 살아왔는데 과연 그렇게 할 수 있는가. 한 여름에 40도를 넘나드는 사무실에 에어컨을 끌 수 있는가. 극 지방에서 난방기구를 끌 수 있는가.
에너지원을 공급하는 발전소의 기계들을 우리가 임의로 멈추게 할 수 있는가.

워쇼스키(Wachowski) 형제는 의원의 입을 통해 인류의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우리는 쉽게 현실 세계에서도 수없이 많은 예를 들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시스템을 통제하고 필요하면 기계를 멈추게 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선택권이 우리에게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정말로 그러한가. 인간이 월드 와이드 웹을 파기할 수 있는가. 인간이 금융기관 건물의 보안 시스템을 멈출 수 있는가, 혹은 폐기할 수 있는가. 보일러 없이 한 여름과 한 겨울을 보낼 수 있는가. 우리가 자유롭게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시스템이 이미 우리 삶을 구조화하고 규정하고 통제하고 있지 않은가. 네트워크가 연결된 컴퓨터 없이 대기업에 종사하는 회사원들이 업무를 보는 것이 가능한가. 과연 나는 끄고 싶을 때 시스템을 셧다운 할 수 있는 위치의 결정자인가. 어쩌면 사실상 한 개인은 구조화된 시스템의 통제를 견고하게 만들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니오(Neo)는 “그럼, 의원님의 요점은 인간과 기계가 공생관계라는 건가요?”라고 되묻는다. 이 대목에서 의원은 논점이 없는 말이라고 얼버무린다. 자신은 논점을 이야기하기엔 너무 늙었다고 그래서 세상의 변화를 다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구세대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역사의 수직적인 흐름을 보고 있는 늙은 의원에 눈에는 젊은 세대들의 확신에 찬 모습에 회의감을 표현한다. 늙은 이들은 그들의 시야보다 더 많은 것이 보인다. 하지만 테크놀로지는 기하급수적인 속도로 발전하고 있으며 구세대들은 그러한 기계 문명의 기술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지에 대해 논점을 말하지는 못한다. 그러기엔 너무 구식(old-fashioned)이 되어버린 탓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권력이 있다. 그는 노친네의 넋두리를 늘어 놓으면서 테크놀로지 세대의 지도자격인 니오(Neo)에게 희망을 걸어본다. 인류 문명을 대표하는 자이온(Zion)의 사활을 말이다. 그리고 그런 니오의 모습은 현대를 사는 이전 세대가 바라보는 우리 세대의 모습이기도 하다.

2003년 6월 9일.

2003/06/09 18:04 2003/06/09 1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