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누구나 원가정을 향한 향수가 있다. 원가정이 좋았냐 나빴냐 깨졌냐 유지되었냐에 상관없이, 원가정의 이상적인 모습에 대한 동경 같은 게 누구에게나 있다고 생각한다. 해가 저무는 저녁 보글보글 끓는 찌개소리, 밥그릇과 수저 놓는 소리, 얘들아 밥먹어라 엄마 혹은 아빠의 무심한 톤의 목소리를 들으며 식탁에 오손도손 앉아서 먹는 밥. 대단한 일은 없었지만 건조하게 풀어놓는 하루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잘 먹었습니다, 잘 먹었어 라고 말하고 일어나는 저녁 식사 자리.
돌이켜보면 내 원가정의 저녁식사 시간이 그렇게 행복했던 건 아니다. 아버지는 자주 없었거나 만취 상태로 들어오면 우릴 깨우지 않고 곱게 잠들길 바랬다. 지친 어머니의 모습, 원망섞인 말들, 사춘기를 지나 점점 모이지 않게된 식사 시간, 결혼 후에는 딸이라고 말하면서도 딸처럼 대하지 않는 며느리, 내 딸 고생시킨다며 속으로 원망하는 것을 은연중에 느끼는 매형. 결혼, 취직을 못 했으면 인생과업을 달성하지 못한 듯한 시선, 시선을 넘어선 무례한 말들. 사실상 원가정의 식사 자리가 즐겁고 행복하다는 건 신기루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원가정에 대한 향수를 떨쳐내지 못한다. 차라리 혼자가 좋다고 대충대충 선을 지켜가며 스스로의 심적 공간에 숨어서는 외로움을 넘어선 어떤 결핍의 슬픔에 잠긴다. 선을 넘어 내미는 손들, 영화나 노래 가사에서 그 비슷한 정서를 느낄 때 잠시 그 따뜻함을 머리에, 가슴에, 눈가에, 그리고 내 소중한 세포들에 꼭꼭 심어놓는다.
일상. 지루한 노동, 자식에게 퍼주는 사랑. 삼십대 후반에 느꼈던 지루함과 분노, 무료한 삶의 반복들은 마치 내 인생이 꺾여서 내리막으로 달려가고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럴수록 난 여전히 재밌고 가치있고 찌릿찌릿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무료한 일상, 그것이 시스템을 유지하는 데는 가치가 있겠지만 난 거기에 매몰되어 노잼의 삶으로 인생을 마감하진 않겠다.. 생각했다.
요즘 나는 밥을 한다. 사실 계속 했었다.ㅋㅋ 뽀대 안 나면 재미없어서 칼도 사고 후라이팬도 샀다. 요리를 마치면 사진도 찍었다. 하지만 요즘 나는 그냥 밥을 한다. 원가정의 향수를 떠올리며 밥을 한다. 보글보글 국 끓는 소리를 듣는다. 그릇과 수저를 놓는 소리를 내며 곧 밥먹으러 오라는 신호를 보낸다. 무심하게 밥먹어..라고 말도 해본다. 늦게 오면 핀잔도 주고 의미없는 대화들을 던져보기도 하고. 요즘은 아이의 아재 개그를 듣는다. 원가정의 항수에 빠져있었는데 어느덧 내가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처지가 됐다. 그리고 나는 이 시기가 길지 않음을 알고 있다. 곧 이런 소소한 식사시간은 붕괴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또 상처입은 듯 향수를 느끼며 다음 단계의 삶을 항할 것이다.
지금은 부산에 간다. 가족이 모여도 우린 각자 이미 독립했고 원가족은 해체되었다. 하지만 우린 오늘 모여서 한두끼의 식사를 할 것이다. 의미없는 말들도 주고 받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자리도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향수를 도발하던 부족한 자리마저 향수가 될 것이다.
그 향수에 미리 머물러 가고 있다, 나는.
2017. 10.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