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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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인해 많은 것들을 돌아보고 있다.
1.
컨테이젼, 나아가 인터스텔라에서나 보던 디스토피아의 정서에 물들고 있다. 사실, 이 또한 지나가겠지만 이따금씩 이런 불편하고 어려운 상황들이 지나가는 게 아니라, 지속되어서 이런 환경에 적응해야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반복적으로 하고 있다. 이게 그냥 일상이라면 나는 삶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갖게 될까, 가져야 할까.. 이런 생각.

2.
뜬금 없겠지만, 코로나19 사태로 '호텔엔조이'가 기업회생절차에 들어갔다. 생각이나 했겠나. 식당을 운영하는 자영업자들도 당장 월세를 감당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많은 교회들도 교인들의 헌금을 담보로 건물에 월세를 감당하고 있을 것이므로, 한 두번은 주일 예배를 포기할 수 있겠지만 장기화되면 교인돈을 땡겨 은행돈을 막아야 하므로 최대한 온라인 예배 시점을 늦추고 싶을 것이다.

3.
디스토피아와 교회 월세 생각까지 이르다 보니. 기독교 신앙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나는 기독교인이면서 그간 기독교인으로 살아온 흐름과 이질적인 요즘의 분위기를 경험한다. 사실 밀레니엄 이전의 기독교의 한축은 '선교'였다. 노스트라다무스를 신봉하거나 이단이 아니더라도, 2000년이 오기 전에 예수가 재림하길 갈망하는 교회의 분위기가 분명 존재했다.

3-1.
이런 교회 분위기의 전제는 새하늘과 새땅, 천국, 즉 내세 신앙이 근저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교회는, 목사는 주저함없이 이 땅에 미련을 두거나, 재산을 쌓거나, 현세에 즐거움을 취하는 태도를 정죄했고 천국을 기다리고, 재림 예수를 기다리는 신앙을 독려했다. 내 생각에 이른바 '카르페디엠' 철학을 교회가 흡수한 것은 2000년 이후에 '사회참여' 이슈와 헨리나우엔 영성을 거쳐 독특하게 기독교에 들어온 세속적인 성향의 흐름이라는 생각도 든다. (물론, 그런 흐름이, 세속적이라는 것 자체가 부정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3-2.
사실, 전XX 목사의 망발 중에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떠드는 대목은, 아이러니하게도 다분히 2000년 이전에 빈번했던 기독교적인 언사다. 지금도 몇몇 또라이 목사들만 코로나19와 관련하여 심판이니, 하나님의 뜻이 있다느니 떠들어대고 있고 그런 이들과 거리를 둔 멀쩡(하게 보이려고 그들을 비판하고 구별된 입장을 견지)한 목사들은 개인 위생, 정치적인 이슈의 경계 등등과 같은 다분히 비종교적 영역, 상식적인 영역, '세속적 영역'의 설교와 언사만을 일삼는다.

4.
아마도 내가 아는 기독교, 2000년 이전의 그 종교성의 틀이라면 코로나19에 대한 신앙적인 언사들이 빈번했을 것이다. 가장 드라마틱한 언사를 가정하자면 신천지를 심판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 보다 온건하게는 인간의 죄가 땅을 병들게 하고, 동물들을 병들게 하여 이제 심판날이 가까이 왔으니 더 간절히 회개하고 기도하라는 설교가 빈번했을 것이다. 하지만, 별종이 아닌 이상, 대부분의 기독교 신앙인들은 서로에게도 그런 류의 언사를 자제하는 것 같다.

5.
내가 가장 흥미로워하는 대목은 밀레니엄 이전과 이후의 (한국) 기독교는 분명 불연속적 신앙관이 있는 것 같은데, 그 불연속점에 대한 적절한 설명, 신학, 변론 같은 게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미 그러나 아직'이라거나 '복음전도 사회참여, 양날개' 등등의 양쪽을 어정쩡하게 긍정하는 움직임이 있긴 했지만, 이렇게나 적극적으로 세속적 가치를 부여잡고 '재림예수'라는 단어조차 혐오하면서 문재인 정부와 마스크 얘기만 나누는 기독교는, 정작 그 안에 차별적 종교성이 존재하는 것일까. 신천지나 극우기독교 단체와의 구별된 모습을 보이기 위해 종교성 자체를 제거한 건 아닌가. 혹은 이전과는 다른 길을 발견한걸까. 종종 그런 의문이 든다.

사족.
이건 거의 신앙에 대한 내 독백에 가깝다. 고로, 꽤 끄적이긴 했지만 소셜하게 나눌 거리는 아니라는 말.
2020/03/16 21:32 2020/03/16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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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dmap booklist: 뇌과학 by YJ.
2018/08/09 00:07 2018/08/09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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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dmap booklist: 꿈해석, 신화, 융심리학 by YJ.
2018/08/09 00:05 2018/08/09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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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dmap booklist: 세계사 by YJ
2018/08/08 23:58 2018/08/08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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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간이 꿈얘기 들으면 제가 주변에 자주 권하는 고혜경 선생의 벙커원특강 링크 공유합니다. 개인적으로 꿈 해석하면서 많은 내적으로 큰 도움이 된 것 같아 자주 권하게 되네요. 고혜경 선생 말에 따르면 악몽이나 가위눌림조차 나에게 꼭 필요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의미라고 하더군요. 모든 꿈은 나의 성장을 위한 신의 연애편지라는 이야기에 조금씩 공감하고 있습니다. 본 강연을 바탕으로 나의 꿈 사용설명서라는 책도 나왔는데, 저는 강연을 더 권하는 편입니다. 관심있는 분들은 들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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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혜경 나의 꿈 사용법-나의 무의식 들여다보기1
http://www.podbbang.com/ch/5478?e=21877378
고혜경 나의 꿈 사용법-나의 무의식 들여다보기2
http://www.podbbang.com/ch/5478?e=21188826
고혜경 나의 꿈 사용법-꿈을 들여다보는 눈 청소하기1
http://www.podbbang.com/ch/5478?e=21188834
고혜경 나의 꿈 사용법-꿈을 들여다보는 눈 청소하기2
http://www.podbbang.com/ch/5478?e=21188835
고혜경 나의 꿈 사용법-아니무스와 아니마 이야기1
http://www.podbbang.com/ch/5478?e=21188840
고혜경 나의 꿈 사용법-아니무스와 아니마 이야기2
http://www.podbbang.com/ch/5478?e=21188841
고혜경 나의 꿈 사용법-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 만나기
http://www.podbbang.com/ch/5478?e=21195751
고혜경 나의 꿈 사용법-나의 뜻과 신의 뜻 사이에서
http://www.podbbang.com/ch/5478?e=21201650
2018/05/11 21:37 2018/05/11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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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책을 출판하자는 요청을 네 번 정도 받았다.
한 번을 제외하고는 일언지하에 거절한 적은 없었지만
나머지 세번 모두 이러저러한 이유로 흐지부지되곤 했다.
.
책을 쓰고 싶다는 염원(?)이 간절하던 삼십대에는
글로 제대로 '가오'를 잡고 싶었는데 어느덧 이제는 
'가오'로 글을 쓰고 싶지는 않은 사람이 되어 버렸다.
.
그러고 나니,
글을 쓰고는 싶으나 또 딱히 쓸 필요는 없는
잘 쓸 수도 있을 것 같으나 정작 잘 써지지는 않는 
뭔가 될듯 안 될듯 어정쩡한 상태가 지속되는 느낌이다.
.
쓸모있는 책을 읽고 싶고, 쓸모있는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의 바람은 여전히 있는데, 
모래 한 줌을 손 안에 움켜쥐면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그런 처지의 나를 계속 지켜보고 있다.
2018/05/09 21:35 2018/05/09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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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어른의 칭찬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많다. 누굴 위해 사는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나이가 들어도 그 대답에 제대로 답하기가, 우리 모두 쉽지 않다. 마치 칭찬과 인정이 존재이유인 것처럼 살다가 죽을 운명이었던 것처럼.
2018/05/09 21:35 2018/05/09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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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글쓰는 일보다 몸으로 하는 일을 즐기는 편이다. 짬이 나면 음식을 만들거나 냉장고나 집안 정리를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혹은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간단한 사주를 봐주기도 한다.ㅋㅋ 
전에는 일 때문에 사람을 만나는 편이었는데 요즘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 소소한 일거리를 만든다. 그마저도 주객전도가 되어 가벼운 수다나 맛집탐방으로 전락하는데, 나쁘지 않다. 
요즘 가장 큰 문제는 오지랖인 것 같다. 꿈해석이나 사주명리, 직장생활 등 뭔가 '촉'이 와서 이야기를 하다보면 혼자 너무 나가서 자주 상대에게 불필요한 말까지 하게 된다. 되도록, 나쁘지 않은 수준으로 하루를 보내는 걸 목표로 삼아야되지 싶다. 
너무 글을 안 쓰니 글자 쓰는 법을 까먹을까봐 끄적여본다.
2018/05/07 21:34 2018/05/07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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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성과 여성성'으로 부르면 젠더 논쟁이 될 소지가 있겠지만 '아니마와 아니무스'로 부르건, '음과 양'으로 부르건 간에 일단은 이 차이가 존재한다는 점에서의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이야기라고 시작해야겠다. 심리학을 공부하다보면 프로이트에서 융으로 넘어갔다가 라깡으로 옮겨가서는 머리에 쥐가 내리도록 지성적으로 파고들게 되는 지점이 있다. 물론 융에게 갔다가 라깡에게 갔다가, 왔다리 갔다리 하면서 정작 깊이는 없이 방황하는 시간도 길었지만.ㅠ 아무튼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물론 융심리학 배경의 이야기다.

지금도 나는 사회적인 영역에서 페미니즘에 공감하고 필요하면 그런 방향의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풀어내고 싶어하지만, 언젠가부터 페북을 포함하여 사적 영역에서 남녀 대립각을 세우는 논쟁 등에는 조금 거리를 두게 되었다. 지금은 시간과 내공 모두 부족하여 섬세하게 풀어낼 자신이 없지만, 우리 각자의 사적인 영역에서 페미니즘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와는 별개로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니만큼..)

융은 '온전성', 혹은 '개성화 과정'을 인간 성숙의 척도(궁극적 자기실현)로 보았는데 그 시기는 최소 중년 이후로 보았다. 중년이 되면 어쩔 수 없이 그간 자신이 가지고 있던 신념이나 삶의 태도를 고집하면서 돌파할 수 없는 시점이 오는 것 같다. 남성성이 강한 남성, 여성성이 강한 여성들의 경우가 더욱 그러한데, 일례로 퀸카나 여신 같은 여성이 중년 이후에도 여신 같은 모습과 행동을 유지할 수 없게 되거나, 반대로 남성은 힘 빼면 시체인 싸나이 중의 싸나이 혹은 직장에서 추진력 하나로 밀어붙여 성공한 남자가 중년 이후에도 자신의 힘을 내세우거나 부하직원의 감정을 묵살하듯 관계를 지속하려 해도 잘 안 되는 경우가 그렇다. 더욱이 어느 지점에서인가 자신도 지치고 이렇게 계속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자신없음, 우울함, 그에 따른 긴장감마저 생긴다.

융은 오랜 임상 끝에, 남성에게도 무의식적 여성성이 존재하고 여성에게도 무의식적 남성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른바 아니무스와 아니마가 그것이다. 직장에서 화통하고 넉넉한 상사였던 남자가 집에서는 아이처럼 투정을 부리거나 사소한 일로 아내를 닥달하거나, 평소에 싹싹하고 온화한 여성이 부부싸움이 커지거나 논쟁 끝에 주변사람들이 불편해질 정도로 단호하고 냉정하게 말하기도 한다. 자신의 무의식적 속에 있던 남성성, 여성성이 튀어 나오는 것이다.

대체로 우리는 차이에 의해서 자신을 타자와 구분짓는다. 이런 차이가 구별, 차별화를 낳게 되고 그 구별은 대립을 만든다. 남자와 여자의 젠더와 섹스가 적절히 섞인 채로 각자의 스탠스에서 타자를 바라보고, 자신의 성적 정체성에 걸맞는 문화적인 옷을 입는다. 사실 이십대에는 이러한 대립구도와 구별짓기가 자연스럽고 오히려 권장할만 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잘 하는 영역, 타자가 칭찬하고 잘해내길 원하는 영역에서 최대치를 끌어내고자 노력하는 과정, 훈련의 과정, 습득과 재능 발현의 과정이 분명히 필요하다. 설령 그것이 남성성, 혹은 여성성을 대변하는 경우에도 그렇다. 

하지만 중년 이후부터는 대립으로 치닫는 것으로 충분치 못하다. 내 안의 그림자와도 균형을 이루어야 하겠지만 내 안의 다른 성, 무의식적 남성성, 여성성을 이해하고 친해지고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가장 단적으로 연애를 하는 커플이나 부부가 처음에는 상대방에 대한 (이)성적 매력에 의해 관계가 유지되지만, 시간이 흐르면 남녀는 서로의 내면에 존재하는 무의식적 이성, 즉 남자의 여성성과 여자의 남성성을 깊게 대면하는 시점이 온다. 이 시점에서 4명(남성, 남성의 여성성, 여성, 여성의 남성성)은 서로 간의 투사, 그에 따르는 대립과 반사를 멈추고 의식과 무의식적인 조화를 이루는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고 융은 말한다)

중년 이후부터 이성은 서로 '경쟁'하거나 '대립'하거나, 혹은 서로를 '유혹'하는 타자로 보는 것에 한계에 직면하는 것 같다. 또는 강하게 '의존'적인 관계이거나 '주도'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되기도 한다. 서로 대립을 하는 것과 서로 유혹하는 것은 에너지의 준위상으로는 동일한 상태이다. 반대로 의존과 주도는 성적 불평등의 고착이다. 그런 상태에서 벗어나기 시작해야 한다. 대립각을 세우던 무의식적 이성과 의식적인 조화, 화해를 이루어야 한다. 쉬운 예로 이효리가 더이상 히로인이 아닌 '페밀리가 떴다'의 국민여동생 혹은 민박집 주인의 조화를 추구하는 면이나, 노주현, 이순재 같은 근엄하고 강인한 남성적인 배우들이 시트콤에 나와서 망가지는 모습으로 변신을 하는 것은 무의식의 완충, 혹은 조화로운 방향 추구 노력이기도 하다.

가부장제 속에서 페미니즘의 필요를 체감하고 그 이론의 메타담론적 특성을 경험하긴 했지만, 때때로 이 이론은 나의 중년의 온전성, 음양의 조화로움에 있어서 사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는 종종 대립적 요소로 작용하는 느낌을 받았다. 내 안의 여성성을 이해하고 화해해야 하는데 젠더적 여성성에 대한 구조적 모순에 천착하게 된다거나 여성 안에 존재하는 남성성을 화해와 조화의 대상이 아닌 주적이나 가부장제의 현현으로 바라보는 상황들이 그러하다. 

아무튼, 체화가 덜 되서 말이 투박하여 담백하게도 못 쓰고 있지만.. 요즘 그런 생각을 하고 산다. 시간이 지나면 좀더 다듬어서 제대로 말해보련다. (흙)
2017/10/07 23:04 2017/10/07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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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원가정을 향한 향수가 있다. 원가정이 좋았냐 나빴냐 깨졌냐 유지되었냐에 상관없이, 원가정의 이상적인 모습에 대한 동경 같은 게 누구에게나 있다고 생각한다. 해가 저무는 저녁 보글보글 끓는 찌개소리, 밥그릇과 수저 놓는 소리, 얘들아 밥먹어라 엄마 혹은 아빠의 무심한 톤의 목소리를 들으며 식탁에 오손도손 앉아서 먹는 밥. 대단한 일은 없었지만 건조하게 풀어놓는 하루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잘 먹었습니다, 잘 먹었어 라고 말하고 일어나는 저녁 식사 자리.

돌이켜보면 내 원가정의 저녁식사 시간이 그렇게 행복했던 건 아니다. 아버지는 자주 없었거나 만취 상태로 들어오면 우릴 깨우지 않고 곱게 잠들길 바랬다. 지친 어머니의 모습, 원망섞인 말들, 사춘기를 지나 점점 모이지 않게된 식사 시간, 결혼 후에는 딸이라고 말하면서도 딸처럼 대하지 않는 며느리, 내 딸 고생시킨다며 속으로 원망하는 것을 은연중에 느끼는 매형. 결혼, 취직을 못 했으면 인생과업을 달성하지 못한 듯한 시선, 시선을 넘어선 무례한 말들. 사실상 원가정의 식사 자리가 즐겁고 행복하다는 건 신기루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원가정에 대한 향수를 떨쳐내지 못한다. 차라리 혼자가 좋다고 대충대충 선을 지켜가며 스스로의 심적 공간에 숨어서는 외로움을 넘어선 어떤 결핍의 슬픔에 잠긴다. 선을 넘어 내미는 손들, 영화나 노래 가사에서 그 비슷한 정서를 느낄 때 잠시 그 따뜻함을 머리에, 가슴에, 눈가에, 그리고 내 소중한 세포들에 꼭꼭 심어놓는다.

일상. 지루한 노동, 자식에게 퍼주는 사랑. 삼십대 후반에 느꼈던 지루함과 분노, 무료한 삶의 반복들은 마치 내 인생이 꺾여서 내리막으로 달려가고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럴수록 난 여전히 재밌고 가치있고 찌릿찌릿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무료한 일상, 그것이 시스템을 유지하는 데는 가치가 있겠지만 난 거기에 매몰되어 노잼의 삶으로 인생을 마감하진 않겠다.. 생각했다.

요즘 나는 밥을 한다. 사실 계속 했었다.ㅋㅋ 뽀대 안 나면 재미없어서 칼도 사고 후라이팬도 샀다. 요리를 마치면 사진도 찍었다. 하지만 요즘 나는 그냥 밥을 한다. 원가정의 향수를 떠올리며 밥을 한다. 보글보글 국 끓는 소리를 듣는다. 그릇과 수저를 놓는 소리를 내며 곧 밥먹으러 오라는 신호를 보낸다. 무심하게 밥먹어..라고 말도 해본다. 늦게 오면 핀잔도 주고 의미없는 대화들을 던져보기도 하고. 요즘은 아이의 아재 개그를 듣는다. 원가정의 항수에 빠져있었는데 어느덧 내가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처지가 됐다. 그리고 나는 이 시기가 길지 않음을 알고 있다. 곧 이런 소소한 식사시간은 붕괴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또 상처입은 듯 향수를 느끼며 다음 단계의 삶을 항할 것이다.

지금은 부산에 간다. 가족이 모여도 우린 각자 이미 독립했고 원가족은 해체되었다. 하지만 우린 오늘 모여서 한두끼의 식사를 할 것이다. 의미없는 말들도 주고 받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자리도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향수를 도발하던 부족한 자리마저 향수가 될 것이다.

그 향수에 미리 머물러 가고 있다, 나는.

2017. 10. 2

2017/10/02 23:03 2017/10/02 2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