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Posted
Filed under 기고글 모음/제이언니의 IT이야기
대학시절 그러니까, 대략 15년, 20년 전 즈음 '전자기학'을 가르치던 우리과(기계과) 교수님은 수업 진도와 무관하게 자주 흥분한 목소리로 '앞으로는 전자통신 분야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될 것이다', '전기전자 분야의 기업들이 길바닥에 뿌려진 돈을 갈고리로 긁어댈 날이 머지 않았다'며 이야기하곤 했다.

난 수업 집중도가 꽤 높은 학생이었음에도 그 과목의 수업 내용은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저 그분이 '황금알'이라고 말할 때, 뭐랄까 부러움, 애잔함, 기대감, 분노가 한데 뒤엉킨 듯한 교수님의 표정만 떠오를 뿐.

당시에 휴대용 전자기기는 CD플레이어가 전부였고 통신기기도 '삐삐'라고 불리던 무선호출기(비퍼)가 유행이었지만 휴학을 하고 다시 복학을 하는 그 몇 년 사이에 세상은 급변했다. 휴대폰이 대중화된 것이다. 나는 이동통신사들이 정부지원금을 받아가며 헐값에 뿌려댄 휴대폰 단말기들이 금세 꼬박꼬박 받아낸 할부금과 통신요금 명세서를 보면서 자주 '황금알' 비유를 떠올렸다.

건별로 부과되는 문자 메시지나 발신자 표시 서비스 등의 부가 서비스들이 특히 그랬다. 특별히 물건을 만들어 팔지 않아도 일단 통신망만 깔고 나면 사용자의 수만큼 고스란히 수입이 보장되는 정말 신기에 가까운 사업이 아닌가. 교수님이 말했던 예언이 성취되는 듯한 경험에 나는 자주 전율했다!

이제는 '카카오톡' 같은 무료 문자 어플이나 인터넷 전화 같은 데이터를 이용한 통신 방식들이 널리 퍼지면서 이른바 통신망의 '민주화'가 이루어졌지만 다시 통신사들은 이 환란을 극복하려고 애쓰고 있다. '데이터 무제한'의 유혹으로 고객 다수를 스마트폰 유저로 만들고 다시 데이터 망의 속도를 올려 고객들의 주머니를 털려는 전략인 셈이다.

물론 고객들도 변했다. 과거에는 흑백의 액정으로 의사소통만 되면 '장땡'이었지만 지금은 HD급 영상을 스마트폰으로 끊김없이 보고 싶어하는 '신인류'가 등장했다. 빠르게 급변하는 고객의 취향을 충족 시켜주기 위해서, 혹은 변덕스런 고객들의 주머니를 확실히 털기 위해서라도 기업들도 머리를 굴려서 황금알을 계속 만들어내야 하는 시대가 도래한 셈이다.

여섯살 아들의 애니메이션 중독... 콘텐츠 사용로가 '헉'

기사 관련 사진
 실내놀이터에서도 TV를 틀면 아이들은 놀이를 멈춘다.
ⓒ 김용주

관련사진보기


최근 여섯 살된 아들이 애니메이션 중독 초기 증상을 보였다. 시작은 이랬다. 우리집은 원래 TV 자체를 보지 않았는데 통신사에서 몇 개월을 무료로 보게 해주는 조건으로 (무료로)셋톱박스(디지털 방송 수신기기)를 설치해 줬고 무료기간이 끝나고 나서도 몇 달을 더 연장해 주고 그 이후에는 요금의 상당 부분을 할인해 줬다.

그렇게 트로이 목마처럼 우리집에 침투한 이 기기는 요술 상자처럼 끊임없이 아이가 원하는 만화영화를 보여줬다. 이 요술상자에 빠진 우리 아이는 무료 콘텐츠를 중심으로 시청하다가 조금씩 최신 애니메이션을 보기 위해 유료 프로그램들도 보게 됐다. 처음엔 내가 매번 결제를 해줬는데 어느 날 우리 아이가(날 때부터 IT 신동이었던지) 혼자서 패스워드를 '뚫었다'(사실, 비밀번호가 같은 숫자 4개였으니 그리 어렵진 않았으리라).

그때 나는 무얼 하고 있었냐고? 아이에게 애니메이션을 보여주는 시간은 부모가 지쳐서 쉬고 싶을 때다. 만화를 보는 그 시간만큼은 아이가 아빠를 찾지 않는다. 그렇게 애니메이션을 보는 시간은 조금씩 늘어갔고 아빠인 나도 은근히 그 여유가 싫지 않았다(젠장… 쓰다보니 무슨 중독자의 고백록 같다).

그렇게 우리 아이는 아침에도 꼭 한두 편의 만화를 보고 어린이집을 가야 하고, 집에 와서도 꼭 몇 편을 봐야 잠자리에 드는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당연히 통신비도 점점 올랐다. 급기야 최근에는 명세서를 보고 충격을 받았는데 콘텐츠 이용료가 무려 10만 원이 넘었다.

망연자실. 애니메이션을 보는 아이와 통신비 명세서를 번갈아 가며 보다가, 문득 그 교수님의 수업시간이 떠올랐다. 아아, 길거리에 뿌려진 돈을 쓸어 담듯 통신사가 우리집 주머니를 이렇게 털어가는구나 싶었다. 더욱 화가 나는 건, 이런 콘텐츠들은 한시적으로 볼 수 있게 되어 있어서 짧게는 하루 이틀, 길게는 한 달이 지나면 다시 같은 금액을 결제해야 한다는 점이다.

아이들은 같은 애니메이션을 반복적으로 보기도 하고 한 편을 보다가 쉽게 질려 다른 것을 보기도 하지 않나. 결국 아이를 둔 집에서는 동일한 콘텐츠를 구입하기 위해 몇 번이고 반복적으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그린 파일'이나 굿다운로더 콘텐츠도 한 번 구입해서 다운받으면 컴퓨터에 영구적으로 소장할 수 있는 요즘 같은 세상에, 아이의 욕망과 부모의 나태함을 조장한, 정말 악한 상술이 아닌가 싶다.

아내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결국 셋톱박스를 없애기로 결정했다. 박스를 제거하던 날 아이는 진심으로 걱정스런 눈빛으로 그 요술박스를 쳐다봤다.

"아빠, 이제 OO는 못 봐? OO도?"

아, 왠지 측은하다. 갑자기 애니메이션 천국에서 현실로 돌아와야 하는 아이의 일상을 생각하니 너무 갑자기 환경을 바꾸려고 한 게 아닐까 하는 우려감도 들었다. '대인배' 엄마와 달리 잔 걱정이 많은 나는 아이가 걱정이다. 뭐, 좋은 방법이 없을까.

창고에 있던 하드디스크, 셋톱박스로 딱이네

기사 관련 사진
 하드 외장 케이스는 셋톱 박스처럼 활용이 가능하다.
ⓒ 김용주

관련사진보기


아무래도 갑자기 없애면 역효과가 날 것 같아, 즐겨보던 애니메이션 몇 개라도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문득 집에서 굴러다니던 오래된 하드디스크를 보고 갑자기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구입한 지 10년이 넘은 이 하드디스크는 예전에 쓰던 조립PC에서 떼어낸 것인데 IDE방식(인터페이스 타입의 일종)의 구형이라 SATA방식만을 사용하는 최근의 컴퓨터 메인보드에는 연결하기도 쉽지 않아 창고에 처박아둔 것이었다. 이 하드디스크를 USB에만 연결할 수 있으면 TV에서도 동영상 파일을 재생할 수 있겠다 싶어서 인터넷에서 구형 하드디스크 인터페이스를 지원하는 케이스를 만 원에 구입했다.

기사 관련 사진
 구형 하드디스크를 지원하는 외장케이스
ⓒ 김용주

관련사진보기


이 케이스는 외부전원을 지원해서 하드디스크를 USB처럼 쓸 수 있게 만들어 주기 때문에 굴러다니던 애물단지 구형 하드디스크를 마치 셋톱박스처럼 TV에 연결해서 사용할 수 있었다. 다운받은 파일 몇 개를 보여주자 아이도 조금은 안심하는 눈치(하지만 이제 애니메이션 천국의 시대는 갔단다).

사실 일상적으로 가계 비용을 털어가는 통신항목들이 적지 않다. 기기도 통신상품도 점점 새로워지고 더 좋아지고 있지만 그와 더불어 기업들은 소비자의 무지, 불성실, 나아가 욕망의 구멍을 찾아 주머니를 털어간다. 적절한 상품에 대해 합리적인 비용을 지불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때때로 IT기술들은 소비자로 하여금 카지노 룰렛을 돌리는 형태와 유사한 행위를 조장하는 것 같다. 어쨌거나 우리 아이의 애니메이션 중독이 아빠를 자극했고, 폐기될 운명의 하드디스크도 구했다. 이제 아이와 물리적으로 좀 더 많이 놀아주는 일만 남은 건가.(휴…)
2014/02/25 23:05 2014/02/25 2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