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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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스티브 잡스가 소파에 앉아서 아이패드를 시연한 이후 우리에게도 태블릿PC(아래 태블릿)는 스마트폰과 더불어 친숙한 IT 기기가 되었다.

나는 '메모광'에 '노트중독자'라고 불릴 만큼 평소에 종이에 끄적이는 것을 즐겼는데 이 노트들을 보관하는 것은 정말 골칫거리였다. 게다가 플래너도 매일 꼬박꼬박 기록하는 편이었고 가방엔 항시 몇 권의 책을 넣어 다녀야 안심이 됐다. 언제나 내 가방에는 종이들 뭉치로 가득했고 아내는 자주 백팩을 멘 나에게 '거북이 등껍데기' 같다고 놀리곤 했다. (사실 아내도 나 못지 않게 가방이 무거운 편이어서 나는 '달팽이'라고 맞받아쳤다. 부부란 원래 좀 유치해야 제맛이다.)

그런데 이런 내게 태블릿의 출현은 종이더미 삼종 세트로부터 내 등짝을 해방시켜 주리라는 희망을 안겨다 주었다. 플래너와 노트, 그리고 종이책이 그것이었다. 지금은 더 많아졌지만 노트와 플래너 어플(Application)들이 물리적인 노트들의 대용품이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심어줬고 그 시기부터 전자책 시장의 전망도 밝다는 류의 기사들이 매체에 종종 등장했다.

이제 거북이에서 진정한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는 가능성이 엿보이게 된 셈이다. 그 해 연말 육아의 책임(이라 쓰고 즐거움이라 읽는다)을 충실히 수행했다며 갖고 싶은 선물이 있으면 사주겠다는 아내의 말에, 망설임 없이 태블릿을 선택했고 그렇게 태블릿 유저로서의 삶이 시작됐다.

태블릿PC 덕분에 '거북이 가방' 벗고 가벼워졌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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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에서 출시된 전자책단말기 페이지원
ⓒ 김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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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태블릿 출현 이전부터 전자책이나 전자출판 자체에 관심도 많았고 이미 당시 시중에 유통된 '페이지원'(페이지원 골수 사용자였던 우리들은 그녀를 '지원이'라고 불렀다)을 사용하면서 전자책 시장의 가능성을 엿보았다.

당시에도 하드웨어 측면에서 단말기의 완성도가 높아 보였고 전자책 시장의 남은 과제는 그저 라이센스를 둘러싼 출판업계와 온라인서점, 그리고 소비자 간의 문제로 여겨졌다. (쉽게 말해, MP3 파일처럼 종이책도 광범위하게 불법유통, 다운로드되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릴 것 같은 두려움이 그 실체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지원이'를 사용하면서, 그리고 본격적으로 태블릿 헤비 유저가 되어가면서 문득 막연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태블릿이 종이책을 구원하지 않을까.

종이책을 구원한다고? 물론이지. 나만 하더라도 가방에 항시 넣어 다니던 대여섯 권의 책과 노트들이 사라졌다. 이렇게 종이로 둘러싸인 내 생활방식이 전자매체로 변하게 되면 수많은 나무들을 살릴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 내가 잠시 '지름신'이 강림하여 내 한 욕심 차리자고 구입한 태블릿은 사실 전 지구적 환경 보존에 도움이 되는 방향이기도 한 것 같았다.

고가의 태블릿을 사기 위해, 은근히 아내 눈치도 보고 마음 한 구석도 찜찜했는데 잘됐다 싶어 관련 책들을 찾아봤다. (나는 일상적 논리를 만들 때조차 일단 책을 찾아보는 편이다. 떨쳐내지 못하는 모범생 기질이여.) 몇 시간의 검색 끝에 적절한 책을 찾았다. 애니 레너드라는 환경학자의 유명한 책 <물건이야기>. 이 책은 내가 고민하던 문제를 쉽고 자세하게 다룬 듯했다.

그 책에서 애니 레너드는 북아메리카 나무의 절반이 신문, 포장재, 문구류에 이르는 종이를 만드는 데 쓰이며 매년 미국에서 판매되는 책에 나무 3000만 그루가 들어간다고 말한다. 우리가 독서를 열심히 하면 엄청난 양의 나무가 끊임없이 죽어가는 셈이다. 게다가 종이를 만드는 데에는 나무만 희생되는 게 아니다.

종이 제조업은 온실가스 배출 5위 안에 들며 많은 양의 물과 독성 화학물질이 사용되는데 이것은 생태계로 가감없이 방출된다. 종이에 사용되는 대표적인 화학물질은 염소와 수은이 있으며 이는 내분비계, 생식계, 신경계, 면역체계 손상 및 암을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무염소 표백이나 대안적인 방법을 모색하는 등 이러한 화학 물질들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비용도 많이 들고 종이의 질을 악화 시키는 방향이므로 개선이 쉽지 않다.

결국 종이책을 소비하는 것에는 나무를 좀 더 심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 공정상의 수많은 유해한 작업들이 내재해 있다. 책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쉽게 구입하면서도 쉽게 버리는 노트들과 박스들도 동일한 공정을 거친다.

이렇게 본다면 생태적 마인드를 고취하는 의미에서라도 태블릿은 대안적인 삶의 지표가 되리라는 내 가설은 옳았다. 나의 '지름신 강림'의 사적 욕구가 전 지구적 차원에서의 구원을 이뤄주는 건 아닐까 하는 흥분감마저 드는 순간이다. 내가 1년에 소비하는 책만 전자파일로 태블릿에 들어온다면 많은 나무들의 잔혹사 없이도, 화학물질 처리나 폐수들의 오남용 없이도 클린 소비가 가능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이제 나는 아내에게 더 당당하게 태블릿을 자랑할 수 있게 되었다. 헤헷.

전자기기가 만들어내는 환경오염의 실체 알고 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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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블릿이 종이책을 구원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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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책은 그렇게 끝나지 않았다. 종이 제조는 이 책에서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고 그 다음부터는 전자기기들의 환경 문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게 아닌가. 어쩔 수 없이 책장을 계속 넘겼다. 역시나 애니 레너드는 별로 알고 싶지 않았던 노트북과 태블릿의 제조 과정도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상상대로 전자기기는 종이책의 제조공정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제조공정이 복잡했다.

한때 실리콘밸리도 하이테크 개발에 의한 독성물질 오염지역이 너무 많아 청정화 프로그램이 최우선적으로 필요하다고 판정받았다. 현재는 공장의 상당수가 인건비가 더 낮고 노동자안전 및 환경규제가 덜 엄격한 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로 이전되었다.

태블릿에 들어가는 마이크로칩만 보더라도 그 작은 칩 안에 2000개 이상의 물질이 들어가며 그 물질들에는 금, 탄탈, 구리, 알루미늄, 납, 아연, 니켈, 주석, 은, 철, 수은, 코발트, 비소, 카드뮴, 크롬 등의 중금속이 포함된다. 태블릿에 들어가는 기판 하나의 무게는 대략 0.16그램인데 기판 하나를 생산하는 데 물 20리터와 화학물질 45그램이 들어가며 100와트짜리 전구를 18시간 동안 켤 수 있는 에너지가 들어간다고 한다.

그렇다면 태블릿 한대가 환경을 오염 시키는 수준은 종이책 몇 권에 상당한 것일까. 처음의 희망은 접고 어차피 태블릿 유저가 된 이상, 최소한 그 정도로는 사용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의무감 같은 게 막 생기려고 한다.(일단 후퇴다…) 정확한 셈을 할 수는 없었지만 태블릿을 오래 가지고 있으면 있을수록 생태계에 도움이 되리라는 셈 정도는 누구나 할 수 있으리라.

허나 문제는 태블릿의 신제품 주기가 1년밖에 되지 않으며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소비자들은 2~3년 주기로 태블릿을 신형으로 바꾸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는 점이다. 해상도가 좋아졌다는 이유로, 무게가 줄었다는 이유로, 과거에 지원되던 OS를 지원하지 않게 되었다는 이유로 우리는 되도록 빨리 새 기기로 갈아탈 것을 '뽐뿌질' 당한다. 기업 입장에서도 신제품 출시 없이 같은 기기를 장기적으로 시장에 방치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우사인 볼트에게 더 천천히 달리라고 요구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주문이다.

솔직히 올해 초 나는 사용하던 태블릿을 중고로 처분하고 새 제품을 구입했다. 기기는 올림픽 구호처럼 '더 빨리 더 높이 더 힘차게' 작동했다. 가격은 2년 전과 동일하거나 때론 더 저렴해졌다. 조금만 공부해 보면 당신이 태블릿으로 종이책을 구원하려는 원대한 포부를 가졌다면 최소한 5년에서 10년은, 아니 제품이 고장 나기 전까지는 자신의 전자기기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줘야 할 판이다.

다시 말해 아이패드 사용자는 지금도 2010년에 출시된 초기 모델을 꿋꿋이 써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나는 그럴 자신은 없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생태적 마인드를 가지고 일상을 살아간다는 건 거대담론의 논지에 동의하는 것 이상의 그 무엇을 항상 수반하는 듯하다.

문득 홀쭉해진 가방쪽을 쳐다봤다. 가방 속 태블릿에는 70권이 넘는 전자책이 들어있다. 매일 가방에 넣을 책을 고르느라 고민하던 시간이 줄긴 했다. 더 이상 거북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더 '인간'다워졌다고 할 수도 없는 내 출근길. 이렇게 또 반복된다.
2014/02/25 23:04 2014/02/25 2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