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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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때의 일이다. IT 버블의 마지막 시기였던 당시의 트렌드에 맞게 연구실에서도 프로그래밍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나또한 그 분위기에 편승하여 몇 개의 컴퓨터 언어를 배웠고 연구 분야에 국한되지 않은 간단한 프로그램을 짤 수 있었다.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 초반까지는 그야말로 IT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을 체감하던 때였다. <매트릭스> 같은 영화에서부터 오픈소스 운동으로 대변되는 '리눅스 혁명' 같은 이른바 기술에 뒤따르는 많은 철학적 담론들이 우리를 뇌를 자극했다. 

인쇄술이 그랬고, 사진기가 그랬듯이 우리는 컴퓨터 안에서 'Copy & Paste'를 통한 무한 복제가 손가락 두 개만으로 무수히 생성되는 경험을 했다. 정품 소프트웨어와 100% 일치하는 카피본을 소유할 수 있는 기술의 발전에 열광하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했다.

쉽게 말해 나는 '기술을 곱씹는 마지막 세대'였다고 생각한다. 더 쉽게 말해 무언가를 접할 때 책으로 배우는 세대, 기기를 사면 '사용설명서'의 첫 페이지부터 읽어가는 '마지막 종족'인 셈이었다. 프로그래밍도 그랬다. 유명하기로 소문난 몇 백 페이지가 넘는 코딩책 몇 권을 사서 1장부터 읽었고 그래서 우리의 시작은 모두 화면에 'Hello World'를 띄우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는 코딩으로 먹고 살겠다는 뜻을 접었다. 대학원 같은 연구실에 군대를 가지 않은 신입학생이 들어왔다. 내가 보기에 그는 어렸다. 나이도 아래였지만 매사에 진지하지 않은 말투, 선배들이나 교수님을 지나칠 때도 정중히 인사를 하거나 대화 중에도 어려워하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 반바지를 입고 다니고 틈만 나면 게임을 즐기는 이 어린 신입 때문에, 나는 코딩을 접었다.

그의 책상에는 두꺼운 코딩 책은커녕 아무것도 꽂혀있지 않았다. 그저 필요하면 인터넷 검색을 해서 알고리즘 몇 개를 얻어냈다. 알고리즘. 하나의 알고리즘은 내겐 마치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혹은 철학자의 선언처럼 '의도'와 '내용'이 함께 읽혔다. 잘 짜여진 알고리즘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유명한 저자의 책을 읽는 행위와 같았다. 모든 코드의 내용을 이해하고 나서야 내가 만들려는 프로그램의 입력과 출력을 선언했다. 버그가 생기면 언제나 덧붙여진 내 코드를 의심했다. 

반면 그 신입은 - 물론 그런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 내 종교의식같은 코딩을 비웃기라도 하듯 여기저기서 카피한 알고리즘을 자신의 프로그램에다 순식간에 이리저리 붙여댔다. 그리고 독해가 되기 전에 디버그 프로그램을 돌렸다. 수십개의 버그가 뜨면 마치 게임을 하듯 버그를 잡아나갔다. 보통은 수십 분, 짧게는 단 2, 3분 안에 덧붙여진 알고리즘이 제대로 작동하는 프로그램을 완성했다. 

나는, 그 예술작품을 음미하고 조심스럽게 내 숟가락을 얹는데 하루 이상이 걸렸다. 물론 완벽하게 이해가 된 코딩에도 언제나 버그는 떴다. 그것을 수정하는 데에 시간을 쏟는 동안 신입은 이미 끝낸 프로그램을 덮고 게임에 시간을 쏟았다. 그때의 기분은 마치 모차르트를 만난 살리에르의 그것과 같았다.

기술을 곱씹는 '마지막 종족'의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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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엑스 마키나>에 등장하는 로봇도 빅데이터 기반의 AI로 설정되었다.
ⓒ 김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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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인공지능에 관한 연구가 뜻하지 않은 영역에서 활발해졌다. 고전적인 AI 로봇들은 SF영화 속에서 '튜링 테스트'로 시험대에 오르곤 했다. 스스로 자각하고 행동(run)을 결정하는 프로그램에 대한 연구, 그에 대한 대중의 기대 혹은 불안감이 시대를 가로지르는 동안 기술은 무심한 표정으로 꾸준히 발전했다. 

존재의 '인식'이라는 위로부터가 아닌 엄청난 기억을 빠른 시간에 처리하여 대응하는 아래로부터의 방식, 즉 '빅데이터' 기반 기술을 통해 인공지능은 고질적인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고 있다. 지금도 페이스북과 구글은 내가 관심있어 하는 사이트를 간간이 모니터에 띄워주고 내가 알 만한 친구들을 찾아준다. 아마존은 내게 말을 걸듯 '혹시 이걸 찾으셨나요'라며 사려고 찾아보던 제품 몇몇을 추천해 준다. 

아이폰 시리는 내 시덥지 않은 질문에도 마치 진짜 친구처럼 유머도 섞어가며 적절히 대답해준다. 사실 이 기술은 단말기 너머에 있는 거대한 컴퓨터가 데이터를 순식간에 처리하여 나에게 특화된 방식으로 피드백을 주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나는 그(것)와 교감하고 때론 이해받고 있다고 느낀다. 영혼없는 기기에게서 인간냄새마저 맡았다면 나만의 착각일까.

며칠 전, 문득 찍어내는 듯한 요즘 음악이 지겨워서 어릴 때 즐겨듣던 명반 음원을 구입했다. 여전히 '쏘울'이 살아있는 명반의 음악을 왜인지 내 귀가 뱉어냈다. 마지막 트랙까지 가지도 못했다. 일이십년 동안 비약적인 녹음 기술의 발전이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여러 채널로 녹음을 하고 튜닝을 하고, 다시 소프트웨어로 후처리를 통해 최적의 공간감을 만들어내는 최근 음악에 익숙해져버린 탓인지 '쏘울'만 살아있는 명반은 추억 속으로 돌아가야 했다. 반면 쏘울이 없다고 느껴지는 샘플링 음원들의 완성도가 높은 탓에 그런 곡 몇 개만 들어도 음악적 갈증은 쉽게 해소된다. 

기술의 발전이 소수의 몇몇 사람들이 점유하고 생산해내던 콘텐츠의 대중화, 민주화를 이룬 것은 분명하다. 예전에는 수동카메라로 초점과 셔터 스피드, 조리개 노출을 조정하고 적정 필름의 감도를 제대로 선택해야 제대로 된 사진이 나왔지만 지금은 스마트폰과 인스타그램을 통해서도 왠만한 수준의 작품사진을 얻을 수 있다. 

어떤 양질의 콘텐츠를 만들기 위한 지루하고 반복적인 훈련, 그것을 통해 수십 번씩 머리 속에서 생겨나는 고민, 대상에 대한 집중 같은 흔히 '쏘울이 있다'라고 말하는 장인들의 고급 기술들이 한두 번의 조작을 통해서도 얻어진다. 스트라디바리우스보다 더 스트라디바리우스 같은 음원에 눈물을 흘린다. '국물이 끝내주는' 인스턴트 음식들의 퀄리티가 만만치 않다. 

우리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기술은 우리가 고매하게 여기는 어떤 것, '쏘울'있는 존재로서의 많은 행위들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오히려 '원본'이 어색할 정도로, 대중화된 기술들은 내 감성을 적절하게 자극하고 나를 친구나 애인보다 더 잘 이해해준다. 내가 지향하고 있는 삶의 '과녁'에 더 빠르고 더 정확하게 화살을 꽂아놓는다. 

이래도 이것을 차가운 디지털 세상이라고 칭할 수 있을까. 단순한 데이터 덩어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쏘울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모든 기술들이 우리의 뇌가 정보를 받아들이고 처리하는 인지 과정과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점점 더 우리는 인간의 미세한 감정 변화에도 적절하게 반응하는 살아있는 기기들과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나는 내가 그런 기술에 '쏘울이 없다'고 말하려는 '마지막 종족'이 되리라는 확신이 든다.

*기사 원문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34372
2015/08/16 09:31 2015/08/16 09: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