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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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기고글 모음/제이언니의 아빠일기
결혼, 출산, 육아. 이전에는 몰랐던 여성문제에 눈을 뜨게 된 남편의 반성과 성찰을 담았습니다. 육아를 통해 얻는 소소한 즐거움과 더불어 조금씩 가부장적 가치관에서 벗어나 '언니', 내지는 '엄마'의 정체성을 발견해 가는 과정 중에 쓰는 사적이지만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은 글들을 모았습니다. - 기자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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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야말로 퇴근 없는 프로젝트의 시작이다. 처음 겪는 막중한 의무감과 쉼없는 일상으로 인해 여성은 심리적으로 불안함을 경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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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태어난 직후 부부의 일상은 바뀐다. 아이 중심으로 일상이 재편되는 셈이다. 일단, 여성은 아이를 낳으면 회사를 휴직하고 집에서 육아에 집중한다. 짧게는 2시간, 길어봤자 3~4시간 간격으로 모유 수유를 해야하므로 밤이 돼도 편히 자기는커녕 집앞 가까운 곳으로 외출을 하는 것도 용이하지 않다. 아이가 돌이 될 즈음엔 상황이 어느 정도 나아지지만 이유식, 기저귀 등 하루 종일 아이의 입고 먹고 자는 행위에 계속 개입해야 한다.

그야말로 퇴근 없는 프로젝트의 시작이다. 처음 겪는 막중한 의무감과 쉼없는 일상으로 인해 여성은 심리적으로 불안함을 경험한다. 출산 후에 호르몬 때문에 생기는 여성의 감정 변화는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지만 육아 과정 내내 우울함이 이어지는 경우에는 치료가 필요할 수도 있다.

원래 하던 집안일도 만만치 않다. 게다가 장기간 휴직이 보장되지 않아 직장으로 복귀를 해야 하면, 싱글 혹은 신혼부부일 때보다 1.5배 이상의 물리적인 힘이 더 필요하다. 남편이 중간중간 도와주지만 꼭 본인(애엄마)이 챙겨야 하는 특정한 것들이 있으므로 남편은 육아에 관한 한 영원한 '조수'일 뿐이다. 게다가 둘째나 셋째가 생기면 이 무한 프로젝트는 이후로도 몇 년 간 다람쥐 쳇바퀴처럼 반복해서 돌아가게 되고 일상의 피로도는 가중된다.

엄마가 된 여성을 옥죄는 일상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여성은 아이가 생긴 후부터 매순간 자기가 책임져야 하는 상황 가운데 놓인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친구나 동호회 모임, 혹은 중요한 약속이 있어도 내 마음이 침체되는 날이면 그냥 잠수를 타면 그만이었다. 하다못해 회사도 하루이틀은 아프다고 '뻥을 치고' 월차를 낼 수도 있었다. 내 지옥같은 내면을 숨기기 위해 세상과 잠시 격리된 시간을 확보할 수가 있었다. 사실 그땐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

결혼 후에도 남편과 심하게 다투면 다른 방에 들어가서 각자 생활을 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난 후엔 더 이상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내 마음이 지옥같고 내 속이 타들어가도 모유나 이유식은 반드시 먹여야 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기저귀를 갈아줘야 한다. 답답한 마음에 현관문을 박차고 나가보지만, 조금만 머리를 굴려봐도 할 일이 산더미다. 내일 입을 아이 내복도 빨아야하고 어린이집 아이 친구가 생일이라 선물도 준비해야한다.

일상이 엄마된 여성을 옥죄고 있는 것이다. 물론 '싱글 때의 철없던 내가 이제 책임감도 커지고 세상 사는 게 만만치 않다는 걸 깨닫는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마음을 다잡아도, 하루하루가 매번 정서적으로 기쁠 수만은 없다. 반복되는 허드렛일이 더 마음 속 어둠을 불러온다. 마음을 아무리 다잡아도 일순간 허물어질 것 같은 날들이 있고 그런 날들을 한 번 두 번, 여러 번 참다보면, 어느덧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은 우울이 마음 속에 똬리를 튼다.

엄마가 아이를 아프게 한다?

이게 내가 주변에서 경험하는 여성 육아 우울증의 전형적인 형태다. 경중의 차이는 있겠지만 현대 여성들은 누구나 육아 스트레스를 받는다. 하지만 그 스트레스를 털어내야 한다는 인식마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내가 아는 몇몇 착한 아내들은 부부싸움을 해도 아침은 꼬박 꼬박 차려주고 출근을 시키는 반면 남편은 기분이 상해서 더욱 육아에 신경을 쓰지 않는 '기현상'을 보였다. 육아 조수인 남편은 기분 나빠서 '도와주지' 않겠다는 거다.

육아 스트레스는 고스란히 아이에게 전이된다. 마트에서 장을 보던 중, 빨리 따라오지 않고 장난감 코너를 두리번 거리는 아이의 등짝을 때리며 끌고 가는 엄마를 보고 사람들은 쉽게 손가락질 해댄다. 하지만 그 엄마의 내면이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고립된 섬'이 된 지 오래라면 어떨까.

어떤 육아책의 제목은 <엄마가 아이를 아프게 한다>던데 제목 자체가 불만족스럽다. 엄밀히 말하자면 한국 사회가, 이 세상이, 그 가정이 엄마를 아프게 했고, '그래서'(그 결과로) 엄마가 아이를 아프게 하는 것이다. 엄마도 안다. 자신이 별 시답잖은 이유를 참지 못하고 아이에게 분노를 쏟아낸다는 사실을. 죄책감이 얹혀진 채로 엄마의 아름답던 영혼은 침잠하고 썩어간다.

따라서 엄마가 살려면, 가장 먼저 '엄마만 할 수 있는 집안 일'이 없어져야 한다. 엄마가 없어서 돌아가지 않는 가정 내 일상이 사라져야 한다. 엄마의 마음이 지옥 같을 때 훌쩍 어딘가로 사라질 수 있어야, 그 시간이 보장되어야 다시 천사의 미소로 아이에게 돌아올 수 있다. 육아 프로젝트에 있어, 엄마의 '무한책임'에서 풀려나야 한다. 그럴려면 남편이 '조수'로만 기능해서는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단 하루 이틀이라도 아빠가 육아를 완전히 대체할 수 있어야 한다. 

'장사한 지 사흘된 예수' 같았던 아내의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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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중의 차이는 있겠지만 현대 여성들은 누구나 육아 스트레스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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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아내가 개인적인 일로 세미나를 준비할 일이 있었는데, 세미나가 끝난 후에 그간의 피로가 몰려왔던지 주말 내내 '장사한 지 사흘된 예수'처럼 누워서 일어날 줄을 몰랐다. 준비 과정 중에 피로가 쌓인 모양이었다. 결국 아이와 나는 일요일 저녁까지 둘만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아이가 가끔 누워 있는 아내에게 말을 걸었지만 아내는 정말 죽은 사람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사실, 2~3일간 아이는 가끔 내복 상의와 하의를 짝이 맞지 않게 입었고 끼니 중 한두 끼를 피자와 치킨으로 때웠으며 피곤한 아빠의 무관심에 한두 번 울음을 터뜨려야 했다. 그래도 우리 집은 그럭저럭 정상적으로 돌아갔다.

일요일 저녁. 아내가 부활했다. 아내가 주섬주섬 주변을 정리하자 집안이 금세 빛이 나고 아이는 웃으며 엄마를 안아 준다. 엄마는 아빠를 보며 말한다.

"수고 많았음묘. 담주에 이틀 놀다오삼."
(휴가 이틀 받았다!)

평소에는 아이를 씻기고 재우는 건 내 일이지만 피곤함을 털어낸 아내가 아이를 데리고 가서 씻기고 눕혀 놓고 쓰다듬으며 재운다. 난 멍하게 풀린 눈으로 둘이 잠들기까지 지켜봤다. 그리곤 컴퓨터를 켠 뒤 미드(미국 드라마)를 한 편 때렸다(봤다). 주말 동안의 피로가 확 풀리는 느낌이었다.

이 모든 것을 깨닫는 데에는 나도 사실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했다. 사실 나는 가부장적인 사고를 하면서도 스스로 착한 남편이라고 굳게 믿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나고 아내와 함께 많은 대화를 나누고 육아를 분담하면서 한국 사회에서 '아내'가 '엄마'가 어떤 포지션인가에 대해 실감했다.

아내와의 결혼, 출산과 육아의 경험은 나를 '유사 페미니스트'로 만들었다. 간혹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나는 '제이언니'로 불린다. 아내 문제, 엄마 문제, 쉽게 말해 여성 문제에 관심이 많아지면서 얻게 된 별명이다. 아빠의 위치에 있지만 '언니'의 시선으로 풀고 싶은 이슈들, 일상들이 종종 뇌리를 파고든다. 앞으로도 종종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2013/07/04 22:52 2013/07/04 22: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