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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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제도 10시에 성하와 함께 떡실신했다가 아침일찍 눈을 떴다. 요즘 아내가 미드 <한니발>과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에 꽂혀 있는 게 생각이 나서 시리즈 잘 정리된 파일을 다운 받아서 아이패드에 옮겨주고 쓰다듬 당하면서 출근.ㅋㅋ 강아지처럼 혓바닥도 내밀고 싶었지만 이건 좀 아니다 싶어서... 실행하진 않았다.

2.
시카고 공항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 나의 소심함, 조바심은 여지없이 드러난다. 비행기를 탈 때마다 이 비행기가 추락하면 어쩌나 하는 막연한 불안감을 떨쳐낼 수 없다. 걱정이 되거나 무서운 건 아닌데 그 불안함의 끝을 보고나서야 잠을 청한다. 그 끝이란 게 내가 죽고 아내와 성하가 내가 없는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한없이 하다보면 아.. 이것만은 하고 죽어...야 하는데 하는 안타까움이... (아... 이런 얘기 너무 솔직히 하다가 싸이코취급 받을텐데..ㅠㅠ)

3.
출장 중에 시간이 없어서 성하 옷만 간신히 샀다. 꽤 많은 옷과 신발을 샀는데 결재는 78불. 옷들도 세련된 아빠의 안목이 빛났(다고 믿고 싶)다. 아내에게는 바빠서 성하옷만 간신히 샀다고 문자를 보낸 상태였지만 출장 마지막 날 맘에 드는 시계가 있어서 아내 선물도 이미 준비가 끝났다.^^ 문제는 비행기가 뜨는 마당에 이 모든 게 생각이 났고 비행기가 추락하면 성하는 내 센스돋는 옷선물을 받지 못하고, 아내는 내가 선물을 준비했다는 사실조차 모르게 된다는 사실이 못내 나를 괴롭혔다.ㅠㅠㅠㅠ

4.
아... 아내 선물 샀다는 사실을 알릴 길이 없나, 성하 선물은 비행기가 추락해도 누가 좀 전달해줄 수 없을까... 비행기는 한참 잘 날아가고 있는데 나는 이미 시작된 생각의 꼬리를 자를 수가 없는 상태... 문득,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도 참...

아내는 평소에도 종종 내가 어떤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는 걸 답답해한다. 그 반대급부로 어떤 의무를 다하지 않는 일상에 대해 내 까칠함을 빛을 발하고 그런 압박에 대해 아내는 분노할 때가 더러 있다. 아내는 이 모든 게 내가 여전히 부모의 영향력 아래 있다는 반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상당 부분 그건 사실이다.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나는 라깡이 언급하는 이른바 '아버지의 이름'에 여전히 묶여 있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부모의 언어가 내 언어가 되고 부모의 기대가 나의 기대인 양 무의식 중에 전가된 어떤 무거운 의무감, 꼭 해야하는 부모노릇, 아들노릇, 사원노릇... 통칭하여 누구나 그러해야만 하는 사람노릇.

5.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아버지의 이름'으로 대변되는 부모의 불편한 옷이 아닌 나라는 사람 자체의 욕망 중에 하나로서 베품의 기쁨을 의식하게 되었다. 그 차이는 인지할 수준인데 주로 부모에게 전가된 의무감을 하고나면 불안함이 사라지고 안심이 되는 정도로 끝나지만, 누구에게 무언가를 해줄 때 드는 어떤 카타르시스랄까 그 자체로서의 기쁨이 나름의 자기만족을 가져온다. 나쁘게 보자면 그것은 '인정받고 싶은 욕망'의 또다른 얼굴이기도 하겠지만, 어쨌든 나는 내가 곧죽어도 아내 선물을 산 걸 알리고 싶을 정도로 그 부분의 욕망이 큰 사람이다.^^

나이가 들수록 해야 하는 (옳은) 일에서 어떤 만족감을 찾던 시기를 지나 하고 싶은 일에서 어떤 옮은 방향을 찾고 그것을 향해 내달리는 삶에 관심이 더 간다. 내 적성과 천성에 맞는 옷을 입고 그것으로, 나다움으로, 세상과 교감하는 삶. 세상과 공존하는 삶,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

#.
일단, 비행기가 추락하지 않았고, 성하는 내가 산 옷과 신발을 신고 뛰어다니고 있고, 아내는 내가 선물을 샀다는 사실도 알고 있고 시계도 차고 있고, 오늘 동영상도 아이패드에 넣어 놓았다는 사실이. 꽤나 유쾌한 아침이다. 모두 굿모닝.^^
2013/06/02 00:17 2013/06/02 0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