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NT세대론, 그리고 나를 위한 변명** 이 글은 월간 <복음과 상황> 9월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전투적 글쓰기'에 대한 반성
최근 한국IVF 인터넷 홈페이지(www.ivcf.or.kr)에 올라 온 글들을 읽으면서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들의 글은 신앙인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과격한 측면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문제의 부분만을 옮겨보려 한다.
"...혹 형제의 사랑이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사랑이 없이 할 수 있느냐 등등...말을 하고 싶으시다면 이 글 읽지 마세요. 도저히 수준을 내가 못 맞추겠으니까"
"...결론은 우린 서로 형제가 아니란 것이지요. 끼나 고동이나 제 형제로 보입니까?(내가 좀 만만하게 보이는것 같군)"
"회개기도도 하고 자기가 죄인이라고 열나 씹닥대는 사람이 어디 한둘인감유?"
"그것참 건방스럽기 짝이 없는 개소리군요."
"상식적으로 짱구를 한번 굴려보세요.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
"제가 바보로 보이나요? 제발 고상한 척 내숭 좀 떨지 마세요."
좋게 생각하고 백 번 양보해서 이들의 글이 논리적으로 옳다고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 상대방을 비하시키고 타인의 글에 대해 감정적으로 대처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글을 읽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또한, 서로 얼굴을 대하지 않은, 인격적 관계를 형성할 수 없는 인터넷 게시판 특유의 환경이 그런 표현의 과격함과 용감함(?)을 가져다주었다고 진단해보았다.
타산지석(他山之石)이라고 했던가.
나는 원론적인 부분에서 나름대로 연구하고 고민하는 것과 동일하게, 삶 속에서의 작은 실천도 중요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 시각에서 보았을 때, 복음과 상황 6월호에 실렸던 내 글에 대해 공적인 언로(言路)를 통해 잘못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고, 또한 알리고 싶은 뒷이야기도 있었다. 시기도 적절하여 8월호에는 양승훈 교수가 장대익 편집위원의 글에서 보여졌던 과격한 표현에 대해 유감을 표한 글이 실려있어 이후 복상에서 이루어질 논쟁들에 있어서도 긍정적 작용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물론, 양승훈 교수도 장대익 편집위원을 향해, "'재방송'이나 '설사'수준에 있는 청년들"이라고 표현한 부분에 대해서는 동일한 조심성이 필요했다고 생각한다)
이를 나에게 적용해 볼 때, 내 글에서 문제라고 생각한 부분은 글의 뒷부분에서이다. 나는 유은하씨에게 '기지촌 지식인'이란 딱지를 붙인 후에 "그에게는 대안도 없고 그에 따른 책임의식도 없다"라고 말하면서 그가 생각하는 대안을 '유치하다'고 표현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나는 유은하씨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일을 하는지 와는 별개로 그의 글만을 따져보았을 때, 그의 글은 대안을 제시하지 않고 불만만을 토로하는 것 같아서 그렇게 쓴 것이었다. 몇몇 분들은 나에게 전자우편(e-mail)을 통해 논지가 선명해서 많은 도전이 되더라고 얘기해 주기도 했지만, 글을 쓰고 정작 나는 내내 유은하씨의 글을 비판함으로 '인간 유은하'씨에게 너무 과격하게 대한 것 같아 바른 기도생활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아무래도 복상에 연락해서 유은하씨에게 개인적으로나마 사과의 글을 적어야겠다고 생각하던 중, 먼저 연락이 왔다. 유은하씨는 자신의 논리가 부족했다고 인정해주었고, 책임있는 기독인이 되겠다고 하면서 오히려 다음과 같이 내 글을 변호해주었다.
"...제 자신도 빈다고 생각했던 논리를 빈틈없이 잡아주었거든요. 제가 우려했던 것은 오히려 그 논리가 형제가 택한 어법으로 인해 다른 이들에게 오히려 잘 전달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거였습니다. 아무튼 저를 적(敵)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해서 기분은 참 좋습니다."
나는 유은하씨가 본받을 만한 신앙인이라고 생각한다. 비난을 당한 사람이 먼저, 그것도 자신의 글을 낮추고 오히려 내 글에 대한 염려까지 하는 그의 자세에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물론, 그에 대해 나는 유은하씨의 5월에 실렸던 글만을 문제삼았을 뿐, 유은하씨는 책임있는 신앙인으로 여겨지며 그가 쓴 다른 몇몇 글들은 좋았다고 전했다. 또한, 6월에 실렸던 내 글도 표현이 심했다고 시인하고 용서를 빌었다. 우리는 이러한 몇 번의 전자 우편의 교환으로 서로가 좋은 신앙의 동역자임을 확인했다.
유은하씨의 글의 허와 실: 무엇이 문제였는가?
그건 그렇고. 복음과 상황 7월호에는 내 글에 대한 반론의 글이 실렸다. 기숙영씨의 <'2인3각'경기 안 해보셨나요>가 그것인데 덧붙여서 몇 가지를 지적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냥 인정하기엔 기숙영씨가 내 글을 너무 왜곡시켰기 때문이다. 솔직히 나는 그의 글을 읽고 이 글이 내 논지를 비판하려고 쓴 것인지 옹호하려고 쓴 것인지 분간하기가 힘들었다. 한 마디로 얘기해서 그는 내 글을 표지로 삼아 자신의 논지를 내세우려 한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렇게 생각하는 데는 제시할 근거가 있으니 차근차근 근거들을 다뤄보도록 하겠다.
먼저 기숙영씨는 내가 유은하씨의 글에 대해 많이 오해하고 있다면서 유은하씨의 글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주었다.
"무슨 말인지 아는데요, 우리는 아직도 많이 부족하거든요. 조금만 기다려 주면 우리 스스로 한 번 멋지게 해 볼께요!"...(중략) 오히려 열정만 가지고 달려든 많은 사람들의 결과가 어떠한지 뻔히 알기 때문에 자신들은 그러고 싶지 않아서, 뭔가 책임지는 행동을 하고 싶어서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말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싶다. (기숙영, 복음과 상황 7월호 59면)
문제의 핵심은 이것이다. 유은하씨가 가진 전제를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 기숙영씨와 내가 다른 부분이다. 기숙영씨는 처음부터 "어차피 연합하기로 마음먹었다면..."(위의 글, 58면)으로 글을 시작하고 있다. 즉, 다시 말해서 기숙영씨는 유은하씨가 연합이라는 관점에 동의한다는 가정으로 글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위의 글과 같이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러울지도 모른다. 글의 말미에서 '...해석하고 싶다'고 했으니 기숙영씨 개인적으로도 그런 방향으로 정리하고 싶은 생각이었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유은하씨가 '연합'이라는 관점에 동의했다고 전제할 수 없었다. 다시 거론하자면 길어질 것 같아 내 글의 논리적 개요만을 반복하자면 이렇다. 유은하씨는 지금의 20대가 '다른 싸움'을 하고 있어서 지금의 30대가 쉽게 간섭할 수 없다고 했고 부족한 몇몇 근거를 들어 '제자도'의 측면도 어렵고 연합에도 회의적으로 반응하면서 후배들에게 '그대 길을 계속 가라'고 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그들의 화려하지 않은 여행일지를 기대한다고 했다. 이 부분에서 나는 감정이 많이 상했고 결국 나는 유은하씨의 글에 동의할 경우 20대는 30대와 어우를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고 이해했다.(복상 6월호, "그럼에도 불구하고 20대가 30대와 연합해야 하는 이유")
교회에서 있었던 한가지의 경험을 얘기하는 것이, 내가 유은하씨의 글을 문제삼은 것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작년에 교회 청년부 수련회 준비 모임이 있었다. 사실 처음 모였을 때는 모두가 오랜만에 야외로 나가는데 대해 마음이 많이 부풀어 있었다. 회원의 대부분이 직장 생활에 찌든 데다가 모임의 규모가 커지고 있는 시점에서 많은 기대감이 있기도 했다. 한데 소수의 사람이 넌지시 던지는 말들이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장소문제를 논의하다가 너무 멀면 피곤하다고, 또 너무 가까우면 왜 그런 곳에 가냐는 말이 나왔다. 성경공부에 대한 프로그램을 짜려니 오랜만에 놀러 가는데 부담이 없어야 한다고 했고, 그러면 계획없이 가자고 하니 그럴거면 뭐하러 교회 수련회를 하냐고 했다. 종국에는 직장인들이 많아서 휴가내기 힘들다는 마지막 푸념 섞인 한마디에 우리는 결국 수련회를 가지 못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아마 처음부터 강하게 가지 말자고 했다면 대부분의 회원들은 반발했을 것이다. 하지만 '에이~그건 어려워', '그것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라고 '균형'이라는 현실적 회의감을 표현하다보니 결국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기숙영씨의 글에 대해
나는 유은하씨의 글을 정당하게 비판하기 위해 대부분 그의 글을 인용했고 그가 쓴 표현만을 골라 재사용함으로써 반론을 썼다. 나는 반론을 쓰기 위해 그의 글을 10여 차례 반복해서 읽어보았고, TNT세대론이 흐지부지하게 무너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복상에 글을 보낸 것이었다. 그렇게 쓴 글에 비해 기숙영씨가 나에 글에 대해 반박한 내용들은 내 입장에선 너무 허술했다. 특히 그는 내가 표현한 부분도 아닌데 원색적인 표현으로 나를 몰아붙이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잔말말고 따라오라고?"라는 문구와 '2인 3각'경기도 안 해봤냐는 식의 말은 아무리 고쳐 생각해도 내 글을 너무 성의없이 대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혹시 내 글을 기숙영씨의 생각대로 잔말 말고 따라오라고 '해석하고 싶'은 것은 아닌가 싶다. 물론, '제로섬(zero-sum) 게임'을 좋아하지 않는 나는 유은하씨의 글에 공감하는 부분도 없지 않다. 가장 공감하는 부분은 "제자 훈련과 연합이라는 끈은 확인될 필요가 있다. 내용과 전달 방법 면에서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제자훈련과정은 이제 그들의 '상황'에 비추어서 재조정되어야 하지 않는가"(유은하, 복상 5월호 56면)라는 부분이다. 문맥에 비추어볼 때, 제자도와 연합에 부정적으로 반응했지만 유은하씨의 주장이 여기에 머물렀다면 나도 흔쾌히 그의 의견에 동의했을 것이다. 하지만, 유은하씨는 너무 멀리 나아갔다. TNT세대론을 확인하자던 그는 결국 20대를 바라보며 그들의 길을 가도록 방치하면서 혼자서도 잘해 나가라고 말해버렸다. 그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물론 기숙영씨는 내가 한 표현을 문제삼기도 했다. 먼저, 기숙영씨는 내가 "왜 '깊음의 영성'과 '상황에 대한 인식'이 대치된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대천덕과 헨리누엔의 영성이 상황으로부터 얻어졌다고 근거를 제시했다. 나는 '깊음'의 영성이 문제가 된다고 말하지 않았다. 문제는 '깊음'이라는 개인영성으로 '상황에 대해 인식'을 하지 않고, 그에 대해 관심없이 살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상황을 바라보아야 할 시점에서 다시 자신의 개인영성회복에 다시 눈을 돌리고 사회정의보다 자신의 내면의 평안, 자아상 회복을 목표로 삼는 것이었다. (실상, 헨리 누엔의 저작들이 우리 나라에서 인기있게 번역되는 이유가 이런 영성의 유행 때문 아닌가. 문제는 헨리 누엔이 아니라 우리가 헨리 누엔의 저작들을 좋아하는 영성의 '성향'이다!)
또한 기숙영씨는 내가 지적한 20대의 특성인 '개인주의'적 성향이 편협하다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히려 이들은 더욱 자신이 속한 그룹이나 공동체에 강한 충성심을 갖고 있고 공동체성을 추구한다(Donovan & Myors, 1996), 동감하는 바이다. 다만 자신에게 이익이 있는 공동체를 형성하기를 원할 뿐이다. 이것이 문제인가? 아니 오히려 바람직하다. 개인의 선택이나 자유, 성장이 보장되지 않는 공동체, 이런 것이 결국 지하철 노조가 파업에 참여하지 않은 그들의 동료들을 집단 폭행하는 그러한 집단주의로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기숙영, 복상 7월호 59면)
좋은 지적이다. 이런 좋은 자료를 나는 왜 내 주장의 근거로 사용하지 못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기숙영씨의 생각과 내 생각은 '동전의 이면' 같을 지도 모르겠다.
아는 사람 중에 JMS에 다니는 자매가 있다. 몇 번이나 교회 목회자가 방문도 하고 집의 부모와 언니가 설득도 했는데 소용이 없었다. 그러던 중 최근에 들어서 대중매체를 통해 JMS의 이단성과 정명석씨의 비리들이 보도되면서 다시금 그 자매 생각이 나서 물어보았더니 여전히 방송을 보고도 모임에 나간다는 것이었다. 어이가 없어서 이유를 묻자 그 모임이 너무 재미있고 선후배간에 친밀한 관계성 때문에 그 단체가 이단이든 아니든 상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개인주의라는 동전의 이면이다. 개인주의적인 20대의 특징은 자신이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공동체, 또한 핵가족화된 가정에서는 누릴 수 없었던 친밀한 공동체를 원한다. 자신에게 맹목적으로 잘해주며 그래서 자신의 마음을 맡길 수 있는 편안한 공동체가 존재한다면 그들은 이성적 사고를 접어두고서라도 그 단체를 선택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자신에게 잘해주는 이단 단체에서 친밀함을 누리는 것이 바람직한가? 오히려 그들의 잘못된 집단적 행동에 대해 '바른 교리'라는 진리의 지성적 영역에서 일깨워주어야 할 부분이 있지는 않는가 하는 말이다.
한국 교회는 두 가지 측면에서 잘못했다. 첫째는 친밀한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실패하여 많은 기독청년들을 이단 단체에게 넘겨준 것. 둘째는 그들에게 세계관의 중요성을 부각시키지 않고, 지성의 영역에서 복음을 이해하는 훈련을 제대로 시키지 않은 것. 여기에서 두 번째 문제에 대해 지금의 30대가 20대에게 도전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또한 여기에 대한 선교단체의 사역방향이 이단단체와 똑같이 맹목적으로 잘해주는 공동체의 형성에만 치중하여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면, 그것은 기독교와 이단의 구분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처사임에 분명하다. 그들의 개인주의적 성향 이면에 존재하는 왜곡된 집단성을 긍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지 않는가.
마지막으로 기숙영씨는 글의 끝부분에서 '2인3각'경기를 언급하면서 "스승이 제자를 찾아야 한다", "다리를 묶은 채 두 사람이 함께 골인해야만 한다"고 했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앞에서 "조금만 기다려 주면 우리 스스로 한 번 멋지게 해볼께요!"라고 하지 않았던가? '2인3각'경기는 '우리 스스로 멋지게' 할 수 없는 게임이다. 그래도 기숙영씨가 나에게 물은 것이니 대답해야겠다.
'2인3각'경기는 처음 대학에 들어가서 몇 번 해보았다. 그전까지 나는 그런 경기를 해 본 적이 없던 터라 조바심이 나기도 했지만, 원래 새내기는 용감하지 않던가! 끈을 묶고 별로 안면도 없는 선배와 별 얘기도 없이 경기가 시작되자 미친 듯이 달렸다. 결과는 내가 넘어져서 우린 거의 꼴찌를 했다. 두 번째 시기에서는 같이 끈을 맨 선배가 인사를 했고, 이 경기의 방법을 일러주었다.
"용주라고 했지? 이 경기는 두 사람의 발을 맞추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 아마 '하나, 둘'하며 구령을 붙이면서 뛰면 도움이 될거야"
경기가 시작되고 우린 하나, 둘, 하나, 둘, 소리치며 발을 맞추었다. 참으로 설레이는 경험이었다. 두 사람이 보조를 맞추어 달리는 것. 사실, 우리 팀은 각자 놓고 봐도 달리기를 잘못하는(?) 처지였기 때문에 상을 타진 못했지만 경험없는 열정만으로는 쉬운 게임에서조차 승리할 수 없다는 진리를 발견한, 나름대로는 좋은 기억이자 배움이었다.
나는 지난 번 글에서 '우리'라는 책임의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우리'라는 이름으로 얽어매지 말고 그들 나름의 길을 가게 놔두라는 유은하씨의 글에 반대하며 내 놓은 나의 주장이었다. 그렇다. "다리를 묶은 채 골인"해야 한다. 또한 "선배들이 이런 고생스런 스승의 역할을 감당해"주어야한다. "스승이 제자를 찾아야 한다." 한 마디로 말해 기숙영씨의 비유 그대로 TNT세대론은 '2인3각'경기인 셈이다. '우리'라는 이름으로 먼저 그들의 삶 속에 들어가서 고생스런 스승의 역할을 해 주면서 그들이 훈련되지 못한 부분을 채워 주어야 하며 함께 끈을 묶은 채로 한국 사회에 가공할 폭발물로 '본색'을 드러내야 한다.(복상 6월호 61면)
이만하면 기숙영씨가 "내 논지를 비판하려고 쓴 것인지 옹호하려고 쓴 것인지 분간하기가 힘들었다"는 내 심정을 이해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우리는 오히려 좋은 동역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강지석씨의 글에 대해
덧붙여서 복상 7월호에 실린 강지석씨의 글에 대해서도 짧게 언급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는 "단 한 문장을 가지고 비판한다거나, 평한다는 것이 정말 쓸데없는 일인 줄은 알고 있습니다만..."(복상 7월호, 60면)이라며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적어 주었다. 물론, 나는 그렇다고 단 한 문장을 가지고 비판하는 것을 쓸데없다고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기회에 털어놓는 것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기 위해 내 생각을 어림짐작한 부분에 대해서는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특히, "김용주님은 세계관 정립이라는 것이 책 몇 권을 읽어서, 또는 함께 스터디를 해서 해결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라는 부분이 그렇다. 내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치자. 사실, 나는 요즘 후배들로부터 그런 류의 이야기를 많이 듣는 편이다. 그들은 책 몇 권으로 세계관을 정립한다는 것이 탁상공론이라며 전 세대 신앙의 선배들이 일구어 놓은 귀한 열매들을 창고 속에 버려둔 채 '복음주의는 실존주의다'라고 외치는 것 같다. 물론, 세계관은 삶으로 드러나야 한다. 하지만 기독교 세계관이 삶으로 드러나기 위한 최소한의 지식이 기독 청년들의 머리 속에 깔려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쉐퍼의 말대로 우리는 우리가 인식하는 일을 행한다고 생각해보면 단순히 책 몇 권 읽는 것을 그렇게 가볍게만 여길 수는 없지 않겠는가하는 말이다. 문제는 책 몇 권 읽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책을 읽고 삶으로 뻗어나가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책 몇 권을 읽는 것을 탓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가 속한 교회에서 혹은 선교단체에서 그러한 기본조차 준비되지 않은 채 떠나가는 후배들을 보며, 그들의 뒤에서 손이나 흔들어 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과거에 그렇게 떠나갔던 선배들이 다시 돌아오지 않고 있음도 알고 있다. 물론 개중에는 강지석씨처럼 돌아와서 좋은 신앙인으로 성장하는 이들도 간혹 있지만, 그런 이들이 다수가 아님을 상기할 때, 그들이 군대를 향해 떠나는 여행을 쌍수들고 환영할 수는 없는 것이 슬픈 나의 현실이기도 하다. 또한, 그들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사르트르처럼 '모든 상황은 네 실존적 선택에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 기독청년 사역자들의 현실이기도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