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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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즘 집으로 가는 버스 정류장 앞에서 한 아저씨가 붕어빵을 팔기 시작했다.
삼일 째 되던 날. 버스 정류장을 향해 가다가 끝내 붕어빵 포장마차 앞에 멈춰섰다.
날씨도 추운데 매번 아무도 사는 것 같지 않아 신경이 쓰이기도 했고
그 날 따라 붕어빵이 갑자기 땡기기도 했다.
"아저씨, 천원어치 주세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를 뒤따라 들어온 두 커플이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첫 손님은 아니었겠지만 갑자기 세 그룹의 손님이 함께
들이닥치자 아저씨 얼굴에 화색이 돋았다. "허허, 갑자기 손님이 많아지니까.."
아저씨는 뒷말은 더 하지 않고 붕어빵 기계에 재료들을 급하게 넣었다.

2.
집으로 가는 버스 정류장 앞에서 다시 붕어빵 포장마차를 보았다.
저녁을 많이 먹은터라 그냥 지나려다가, 날도 추운데 붕어빵 팔아드리자 생각했다.
"천원어치 주세요." 나는 오천원짜리를 꺼냈고 아저씨는 붕어빵 기계를 뒤집느라
정신이 없었다. 잔돈을 내가 가져가겠노라고 말하고 돈통에서 천원짜리를 꺼냈다.
천원짜리 네 장을 집어들었을무렵 아저씨가 갑자기 "잠깐만"이라고 말하고는
붕어빵 뒤집는 갈고리로 내 손을 펼쳤다. 거기엔 만원짜리 한 장이 끼어 있었다.
나는 대수롭지않게 만원을 내려놓고 천원짜리로 바꾸려는데 갑자기 아저씨가
소리쳤다. "야, 너 뭐야? 이거 도둑놈아냐?"
붕어빵을 뒤집던 갈고리로 나를 쑤셔댔고 급기야 갈고리가 내 가방끈을 붙잡았다.
"이 새끼 사기꾼아냐? 너 내가 경찰에 신고할꺼야! 어? 꼼짝마 이 새끼야!"
생각도 못한 반응에 갑자기 심장이 내려앉는 듯 했다. 사기꾼이라니.. 내가?

3.
아저씨는 내가 도망이라도 가려고 했다는 듯이 갈고리를 든 손을 흔들어대며
길가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들을 정도로 큰소리로 내게 호통을 쳐댔다.
머리 속이 하얗게 변하며 심장은 더욱 크게 쿵쾅거렸다.
자칫 잘못하다간 정말 경찰서에 끌려갈 판이었다. 그제서야 나는 정신이 버쩍 들었다.
"아저씨, 왜 이러세요?" "저 지난 번에도 여기서 붕어빵 사먹었잖아요, 기억 안나세요?"
"생각을 해보세요, 제가 만원짜리를 집어 들었으면 도망을 갔지 순순히 돈을 내려놓았겠어요?"
"아무려면 아저씨 붕어빵 장사하는데 제가 그 돈을 훔쳐가려고 했겠냐구요? 예?"
아무리 진정하고 말하려해도 평소와는 다르게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4.
아저씨는 인상을 쓴 채로 나를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갈고리를 든 손이 풀렸다.
나는 재빨리 지폐를 돈통에 다 내려놓고 계속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정말 아니다, 믿어달라.. 뭐 그런 류의 이야기를 계속 떠들어댄 것 같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흘렀을까. 아저씨가 입을 열었다.
"나도 사람을 오해하고 싶지 않지만 상황이 그러다 보니 당신, 신뢰가 안가서."
"왜 오해할 행동을 하냔 말이지."
아저씨는 자신이 잘못 생각했을 거라고 마음을 정리한 듯 했다.
"됐으니까 변명은 그만하고 붕어빵 가지고 그만 가봐."
한참을 변명하던 나는 멈칫 서 있다가 붕어빵과 잔돈을 챙겨서 포장마차를 나섰다.

5.
집으로 가는 길. 조금 안정이 되자 이내 억울한 마음에 울컥 화가 났다.
오늘은 붕어빵을 먹고 싶지도 않았고 그저 아저씨의 지난 번 즐거워하는 모습이
눈에 선해서 도와주자는 마음으로 갔던 건데 나는 길바닥에서 그야말로 개망신을 당했다.
'나도 길길이 뛰며 화를 낼 걸 그랬나..
아저씨의 기를 팍 누르는 미운 말들을 더 쏟아내 줄 걸 그랬나..
그깟 만원 훔칠 생각도 없었다고 말해줄 걸 그랬나...'
갈고리로 멱살 잡히다 시피하며 큰소리로 망신을 주던 아저씨의 모습이 자꾸 아른거린다.
고개를 숙인 채 걷는 듯 마는 듯 너털 걸음으로 집을 향하다가 문득
내 손에 쥐어진 만원짜리를 발견하고 다급한 소리로 날 붙잡던 아저씨의 얼굴이 떠오른다.
돈통에는 많아야 3만원 정도가 있었다. 내가 들고 있던 돈은 만삼천원.
붕어빵 39개를 팔아야 하는 돈이다. 그 날 판 붕어빵의 대략 절반 정도의 돈인 셈.
하루 일당의 절반을 갖고 도망칠거란 생각에 아저씨도 갑자기 눈이 뒤집혔을 것 같다.

6.
나는 사회봉사나 구제에 관심이 많지만 때때로 노동자들의 거친 일상과 험한 입담이 싫다.
작은 일에도 버럭 화부터 내거나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술을 마시면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는 부류의 이들과 함께 있으면 은근히 나는 불편해서 어쩔 줄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안다. 지친 일상이 그렇게 사람을 만든다는 것을.
나도 회사에서 궁지에 몰리면 흥분하고 과로를 하면 짜증을 내고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평소와 달라진다. 그런 일들이 지속적으로 사람을 괴롭히면
누구나 그렇게 또다른 누군가에게 화풀이를 하게 되어 있다. 
붕어빵 아저씨는 사실 내 속마음이 어떻든지 관심이 없겠지만,
어쩌면 만원을 잃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 아저씨를 이해하고 그에 대한 마음 속 분노를 거두기로 했다.
누구나 궁지에 몰리면 누군가를 물게 되어 있다. 나는 개망신을 당했지만 오해가 풀렸고
아저씨는 만원을 잃지 않았으며 나는 도둑이 아니었던 거다. 그것으로 됐다.

7.
오늘 붕어빵 포장마차를 지나는데 다시 심장이 두근거린다.
용서하기로 마음 먹었지만 다시 어제 생각이 나니 억울한 마음이 조금 올라온다.
오늘은 붕어빵을 살까 말까.. 소심한 A형.. 별 걸 다 걱정하고 있네...
이런 저런 생각하고 천천히 포장마차로 다가가는데, 오늘은 장사를 안 한다.
왜지? 어제 일로 자학하시는 건가? 설마..
아니면 몸이 안 좋으신가. 이 길목에 장사가 잘 안 되나. 하긴 사람들이 잘 안 사먹더라..
뭐냐. 개망신 당한지 얼마나 됐다고 나는 벌써 아저씨 걱정을 하는거냐.
혼자 독백 아닌 독백을 중얼거리며 오늘도 너털 걸음으로 집을 향한다. (끝)

2010/01/26 20:17 2010/01/26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