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상] 약간은 도발적인 캠퍼스 보기4: 비유
/김용주
<밭에 감추인 보화>
한 사람이 밭에서 일하다가 멀리서 보화처럼 보이는 물건의 일부분을 발견했다. 그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꽤 가치가 나갈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 사람이 밭을 사려고 계산을 해 보니 자신의 전 재산을 다 팔아야만 살 수 있었다. 부담을 느낀 그는 주변 인맥들을 불러다가 밭에 보화가 있으니 우리가 돈을 합하여 그 밭을 사자고 이야기했다. 주변 인맥들이 확신을 못하고 증거를 보이라고 재촉하자 그가 밭으로 가서 보화의 반짝이는 일부분을 먼 발치에 서서 가리키며 이렇게 소리쳤다.
"어때, 내 말이 맞지? 저거 보화 맞지? 이제 저 밭만 사면 우린 부자라구!"
요 즘 후배들을 만나면서 하는 비유 중에 많이 쓰는 것이다. 좀 엉성하긴 해도 이 사이비(似而非) 비유에 등장하는 남자와 같은 기독학생들은 꽤 많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처음 선교단체에 들어와서 약간의 훈련을 받고 기독교인의 정체성에 대한 개략적인 청사진을 발견한다. 그리고는 미심쩍긴 하지만 자신이 본 것을 보화라고 생각하기로 '결단'한다. 행여라도 보화인지 아닌지를 살펴보는 것은 교만한 행동이며 믿음이 부족한 이유라는 이야기를 듣기 때문에 쉽사리 보화에 가까이 가서 만져본다든지 제대로 확인해 본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문제는 '제자로의 부르심'은 전적인 헌신에 있다는 사실인데, 비유에서처럼 전 재산을 팔아야만 하기 때문에 주변 동역자들과 고통을 분담하여 그 부담을 좀더 줄이고자 하는 노력들을 하게 된다. 이제는 보화인지 아닌 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화라고 믿고 함께 재산을 처분할 동지를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한 일이 된다. 언젠가 한 친구가 기독 공동체를 떠나면서 기독교는 '다단계'(피라미드식 판매구조)같다는 말을 했다. 이 친구는 전에 다단계 판매조직에 연루된 적이 있었는데 그의 말인즉슨, 그 안에서는 그 말이 진짜 같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을 계속 엮어가면 뭔가 될 것 같았는데, 그 안에서 힘들게 빠져 나온 지금 돌아보면 그것은 '완전한 사기'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나가면서 공동체가 '다단계'같다고 얘길 했으니 나로선 여간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토착화는 한국적 민주주의(?)>
' 다단계'는 나와보니 사기였지만 기독교는 거기에서 나왔어도 여전히 진리임을 확증해야 하는데, 기독 공동체에 있다가 나와보니 이것도 '사기'란 생각이 들었다면 이건 보다 심각한 문제이다. 이른바 '보화 확인작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 바꿔 말해서 우리의 신앙교육이 어느 정도 당위적이고, 수동적이며 반지성적이라는 진단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때로는 주변에서도 지적 탁월함은 '교만하다'의 우회적인 표현으로 쓸 때가 많고, 토론과 비판 문화에 대한 반응은 '깐깐함'과 '인격의 부족함'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물론 이것은 지식이 있는 기독학생들이 보다 낮은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비판을 하는 가운데에서 어느 정도 과격한 스타일을 보인 이유도 있다. 하지만 지적인 성실함은 신앙훈련에 있어서 중요하며, 그런 부족한 부분에 있어서는 겸손한 마음으로 후배에게라도 배우고자 하는 성실함이 동일하게 필요하다. 지난 호에도 언급되었던 오강남 교수의 "예수는 없다"라는 책은 그리 새로운 내용의 책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기독학생들에게 그런 책은 두려움으로 다가오며, 섣불리 그 책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회의는 곧 불신앙으로 번질 것을 두려워하여 경계하는 것이다.
이렇게 피라미드식 판매구조와 다를 바 없는 신앙을 이제는 계속해서 유지 시키려면 무엇보다 강한 유대와 운동성을 위한 동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것은 쉽게 권력화와 통제로 번질 위험이 있다.
어 릴 때, 초등학교 시험에 '유신은 박정희 대통령이 서양의 민주주의를 우리 나라의 실정에 맞게 새롭게 고안한 ( ) 민주주의이다'라는 문제가 나온 적이 있었다. 이 문제의 답은 "한국적"이었으며, 엄청난 암기교육 탓에 그 당시 거의 모든 아이들이 그 문제의 답을 맞추었다. 유신정권이 독재정권인 줄 알게 된 건 그 이후로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였지만,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한국 사회는 박정희의 유령이 떠돌고 있다. 이른바 헝그리 정신이란 말들이나 "독재자가 때려야 우리 민족은 발전한다"는 논리가 그런 류다.
우리 나라의 기독교도 토착화라는 주제로 많은 고민을 했겠지만, 이른 바 '박정희 신드롬'같은 것을 토착화라고 생각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많은 대형교회의 목사님들이 절대 권력을 행사하고, 재정을 임의로 사용하지만 많은 평신도들은 '목사님이 우릴 위해 얼마나 수고하시는데 그 정도는…'이라는 반응을 보인다. 이는 일차적으로 영적 지도자의 문제지만, 함께 조금이나마 고려해 보아야 할 것은 스스로가 '왕 같은 제사장'임을 망각한 대부분의 평신도들도 자신들과는 완전히 차별적인 영적 지도자가 나타나서 강권적으로 끌어주는 것을 열망하고 그것에 익숙해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것은 책임을 평신도에 돌리는 게 아니라 현실을 어느 정도는 직시하자는 얘기다. 내가 속한 캠퍼스에도 이런 문제들이 고스란히 기독 학생들에게 남아 있다. 리더들은 회의감을 가진 멤버들을 정죄하기 쉽고, 또한 그 회의감을 없애기 위해 멤버의 삶을 통제하려고 한다. 멤버들 스스로가 생각하고 성숙할 수 있는 훈련을 통해 자발성을 살리는 방향보다는, 당위적이고 회의감 자제를 정죄하는 권위적이고 강권적인 방법으로 신앙 훈련을 해 나간다.
<감시와 처벌: 감옥의 탄생(?)>
한창 포스트모더니즘에 관심이 있을 때, 풋내기 독자인 나의 눈에 호감을 가져왔던 내용은 <감시와 처벌: 감옥의 탄생>에서 말한 "감금 사회"였다. 이 책을 쓴 미쉘 푸코(Michel Foucault)는 현대사회에 존재하는 사회 질서유지의 그 근본뿌리를 "교도소"에서 발견했다. 그에 따르면, 현대 사회 기구들이 어떻게 운용되고 있는지에 관해서는 교도소의 운영방식을 알아보면 당장 드러나는데, 왜냐하면 그것들-현대 사회의 많은 조직들, 이를테면 병원, 학교, 공장-의 억압적인 형태는 감옥에서 행해지고 있는 기율방식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범법자들을 외부 세계와 차단해, 감금시켜 놓고, 엄격한 감시와 규율로 교정하는 방법을 학교, 병원, 공장과 같은 다른 사회에서도 똑같이 적용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아주 흥미로웠던 부분은 학교의 생활기록부와 병원의 환자기록부, 그리고 회사의 인사관리카드의 뿌리를 감옥에서 죄수들의 명부에서 찾았던 것, 그리고 이 모두는 사람에게 등급을 매기고 그에 따라 객관적인 수치로 규정 지어버리는 것이었다. 장황하게 얘기했지만, 사실 나는 요즘 그 내용이 자주 떠오르곤 한다. 자크 엘룰도 <뒤틀려진 기독교>에서 그리스도인의 내적 증거인 '회심'이 단순한 외적 표지인 '세례'로 대체되면서 중세 기독교의 타락상을 이야기하기도 했는데, 이런 것들이 한국 교회에도 팽배해 있음을 돌아보게 되는 일도 있다.
또한 캠퍼스의 선교단체들에서도 그런 경우를 찾아보게 되는 수가 있다. 리더들은 멤버들을 규정지으려하고 그 결과. 각각의 멤버들에게 등급을 매긴다. 이 멤버들에 대한 신상과 생활 기록은 리더들이 작성하고 이 기록과 리더들의 한 주간 동안의 생활과 시간표는 복사하여 이들을 관리하는 그 위의 리더들에게 제출된다. 기독학생들은 모임에 빠진 일수와 경건의 시간(QT)과 같은 기본적인 개인영성훈련 과제(?)를 지키지 못한 날들을 계산하여 그 기준에 다다르지 못했을 때, 섬김의 위치가 제한되며, 심한 경우 제명되기도 한다.
솔 직히 내가 쓰긴 했지만, 내 생각에도 이렇게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는 건 좀 오버인 것 같다!(웃음) 사실 학생들의 경우, 그들의 신앙의 성숙도에는 제각기 차이가 있기 마련이며, 그에 맞게 학생들을 돌보고 신앙훈련을 돕고자 이런저런 정보들을 듣고 기록하고 함께 기도해주는 일들은 그 자체로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조심스럽게나마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수가 많아지고 조직의 효율성을 생각하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서로를 규격화하고, 등급을 매기고, 후배들을 제 임의대로 관리(?)하고 통제하려는 '감금의 공동체'로 거듭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떠나는 개인주의자, 남은 충성된 종>
요 사이 선교단체의 기독학생들의 수가 줄고 있다. 기연운동도 그렇고, 주변에서 보는 선교단체의 기독학생들도 그런 추세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뜨내기 기독학생들 수가 늘어났다고 하는 게 맞겠다. 선배들은 두 눈을 부릅뜨고 요즘 애들이 개인주의적이다, 자기만 안다, 이기적인 세대다 라고 비난한다. 그들은 '예전에는 선배들이 수련회를 가자고 하면, 군소리 없이 따라가야 했고 공동체를 섬기면 자기 몸도 돌보지 않고 죽도록 충성을 다했다'는 식의 푸념을 늘어 놓는다. 나도 그런 선배가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나도 조만간 후배들에게 물어봐야 되겠다) 그리고, '한국적 민주주의'자처럼 신앙에 있어서도 군기를 잡으려고 한다.
이 런 선배들 앞에서, 보화가 보화인지 모르는 후배 개인주의자들은 두려움에 전전하다 결국 '감금의 공동체'를 떠나서는 자기가 있었던 공동체가 '다단계'라고 얘기한다. 남은 '충성된 종'은 별다른 회의감없이 지칠 때까지 죽도록 공동체에 충성한다. 이들의 대부분은 '근본주의자'이다. 나는 이 두 부류 모두 비난할 마음이 없다. 어쩌면 지금 함께 생활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겠지만 이들 모두의 아픔은 나의 아픔이며, 또한 내 신앙의 여정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전자에게는 냉소적인 태도가 후자에게는 끊임없는 마음의 상처가 남는다. 베드로 사도는 그의 서신에서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1:8)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해야 할 이들에게 보화가 보화인 것을 확인시켜줘야 한다. 그리고 이들이 자발적인 사랑의 수고를 할 수 있도록 '감시'가 아닌 '섬김'과, '처벌'이 아닌 '사랑'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해 주어야 한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룬다고 하셨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요일4:12) 이제 캠퍼스의 영적 허구(Spiritual Fiction)는 영적 실재(Spiritual Reality)의 '보화'로 거듭나야 하지 않겠는가!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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