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은 도발적인 캠퍼스 보기 3: How should we ‘then’ live?
/김용주
<한국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
친 한 후배와 <목회와 신학>이란 잡지를 보면서 느꼈던 점이 있었다. 그것은 그 잡지가 마치 <리더스 다이제스트>의 한국판과 같다는 생각이었다. 한국 교회의 거의 대표격인 신학잡지의 절반 이상이 외국-주로 미국-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그리고 그 터전 속에서 일구어진 상황으로 즐비한 모습이었던 것이 많이 아쉬웠다. 물론 우리 둘 다 신학생이 아니었기 때문에 비록 전문적인 입장에서의 관찰은 아니었지만, 책을 읽는 내내 찜찜한 마음이 들었다. 양희송 편집위원도 지난 호의 브리스톨 통신을 다음과 같이 맺지 않았던가.
이 글이 한국 복음주의자들에게 건강한 신학적 자극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한국 복음주의는 이런 국제적 복음주의 신학의 미래를 논하는 자리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혹은 기대 받고 있을까?…(중략)…그러나, 아쉬운 것은 여전히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로부터의 목소리들을 그 논의에서 실제로 찾아볼 수는 없었다는 점이다.
(복음과 상황 7월호, 77면)
몇 년 전 즈음에 마크 놀 교수(Mark A. Noll)가 쓴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 The Scandal of the Evangelical Mind>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당시 나는 스스로 복음주의자라는 사실을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터였는데, 다행스럽게도 그 책은 나의 생각을 많이 교정 시켜 준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 책에서 마크 놀 교수는, 복음주의의 역사를 돌아보며 진단하고 그것에 대한 평가와 제안들을 내어 놓았다. 우리에게도 이런 작업이 늦었지만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글의 성격상 범위를 좀더 좁혀서 이제는 캠퍼스로 돌아가 보자. 작년 여름에 선교단체에서 조장으로 수련회를 갔었다. (올해는 졸업논문과 시험으로 가지 못했다!) 그곳에서 조장들은 같은 숙소에 묵었고, 쉬는 시간마다 서로의 조원이 어떤지, 요즘 관심사는 무엇인지 등의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 수련회에서도 뒤쪽에 북테이블이 설치되었는데, 사실 해를 거듭할수록 책은 적게 팔리는 실정이었다. 자연스럽게 대화는 신앙서적으로 넘어갔고, 나는 이내 많은 조장들이 지성을 요구하는 책들을 기피하는 것을 알았다.
‘그 책은 너무 어렵게 쓴 거 같아.’
‘지식 쌓기에 골몰하다 보면 정작 하나님의 초자연적 일하심을 경험할 수 없다니까.’
‘내용을 읽어도 느낌이 안 와.’
조 장들이 읽기 힘들어 하는 책은 유감스럽게도 저학년 필독서였고 솔직히 난 좀 허탈했다. 많은 조장들이 정말 많이 수고하고 기도하고, 조원들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에 크게 감동한 한 주간이었지만, 그들에게 듣게 되는 신학의 부재에서 비롯된 많은 판단과 생각들은 솔직히 대화하는 내내 좀 불안했다. 성경적이거나 기독교 세계관적이라기 보다는, 몇 년 동안 겪어 온 기독교 ‘문화’ 속에서 터득한 어떤 코드(code)가 그들의 삶의 지침이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많은 리더들은 하나님을 알기 위해 신학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에 무관심하거나 심지어는 거부감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나는 우리가 복음주의 지성의 미래이고, 따라서 우리의 지성은 ‘한국 복음주의의 스캔들’이란 생각을 했다!
<대안 없는 비판(?)>
이제까지 캠퍼스 안에서의 SF(영적 허구)에 대한 나름의 비판적인 이야기들을 풀어 보았다. 실제로 글을 쓰면서는 여러 반응들을 접한다. 거의 대부분이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선교단체 학생들의 것들이다. 캠퍼스 사역자들의 생각들도 접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아직 별 의견이나 조언을 들을 수 없었다. 각종 수련회와 많은 사역으로 인해 여력이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또래 학생들 가운데에서는 여러 반응들을 듣게 되는데, 가장 감사한 것은 충실한 반론을 들을 때다. 서로의 생각을 나누다 보면 미처 생각치 못했던 많은 것들을 서로가 얻게 되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또 다른 감사의 경우는, 본인의 비판적 시각에 공감하고 고민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스런 마음으로 대안들을 생각해 보자고 연락하는 이들이다. 물론 가끔은 당혹스러운 경우도 있는데 그것은 기존 선교단체에 안티(anti-)적인 생각을 가진 이들 때문이다. 내 개인적으로는 그런 문제의식을 가진 이들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주류로 들어갔으면 한다. 그리고 힘들겠지만, 그곳에서 가장 낮은 본을 보이며 섬김의 삶을 살아 가길 기대한다.
솔직 히 나는 문제의식을 느끼고 그것을 지적할 때, 반드시 대안까지 고려되어야만 비판을 할 수 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하지만 문제의식을 느끼고 그것을 분석하기 시작했다면 그 이후부터는 쉐퍼의 유명한 책 제목처럼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나는 이강일 편집위원이 1998년 8, 9월호 <복음과상황>에 실었던 “기독 신세대의 신앙교육”이라는 글에서 언급했던 내용이 어느 정도의 텍스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기사의 전문은 복상 홈페이지의 자료실에서 검색할 수 있다.)
신앙 훈련의 내용
1. 복음주의의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
2. 한국의 역사와 사회현실을 가르쳐야 한다.
3. 통합적이고 일상적인 복음주의의 영성을 훈련시켜야 한다.
4. 개인주의적 특성을 교정 시킬 수 있는 공동체적 실천의 장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5. 말씀을 연구해서 성경 전체를 조망하는 눈을 길러야 한다.
효과적인 기독 청년들의 교육 조건
1. 예수님의 생애를 중심으로 한 복음설교가 지속되어야 한다.
2. 일관성 있는 교과과정이 확정되어 학생들 스스로가 배울 내용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3. 학생들의 인격적, 신앙적 스승으로서 멘터(mentor)가 구비되어야 한다.
4. 대학 내에 가족과 같은 기독공동체가 튼튼히 서 있어야 한다.
<몇 가지의 경험적 대안>
많이 부족하겠지만 개인적으로 교회 청년부와 선교단체에 있으면서 경험했던 몇 가지의 대안들을 나누고 평가를 하는 것으로 글을 정리해야겠다.
1. 이원론의 탈피, 총체적 복음을 신앙훈련 처음부터 조명해준다.
선 교단체나 교회에서 사회참여가 복음전도와 함께 총체적 복음의 한 쪽임을 이야기하는 것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이는 한국 사회의 ‘레드 콤플렉스’에 기인하기도 했고, 내가 속한 선교단체(IVF)의 상처이기도 했다. 또한, ‘이원론적 신앙관의 탈피’에 관한 문제도 그러했는데, 이것은 교회에서 더 극복하기 어려운 과제였다. 청년들이 교회에서 봉사해야 할 일들이 많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생기는 문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두 가지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처음에는 교회에서 임원들과 함께 임원모임 때 스터디를 해보았으나 솔직히 별 효과가 없었다. 이미 굳어진 신앙 성격과 그것에 대한 익숙함 때문이었다. 오히려 자신의 신앙 형성에 아직 별 다른 기초가 없이, 고등부를 갓 마치고 청년부에 들어온 학생들을 몇 그룹으로 모아서 반 학기 정도 따로 성경공부를 해 보았을 때 더 나은 결과를 얻었다. 성경공부 교재는 복음의 핵심에 관한 것을 4주 과정으로, 그리고 송인규 목사님이 복상에 연재했던 평신도 신학강의를 선별(?)해서 4주정도, 그리고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간단한 책 나눔과 토론으로 4주정도, 그리고 귀납적 성경연구(inductive Bible study)를 임원들이 강의하고 함께 그룹별로 공부하고 나누는 것으로 4주정도하고 특강으로 ‘로잔 언약’이나 창조진화논쟁 같은 것으로, 모두 3~4개월 정도를 하고 나서 기존의 청년부 소그룹을 다시 편성해 보았다.(물론, 공부만 한 건 아니고 삼겹살을 구워먹기도 하고 MT도 갔다!) 그 결과, 다행스럽게도 조금은 이질적인(?) 그룹이 형성되었다. 아마 이들이 임원이 되면 공동체는 좀더 변화될 것으로 생각된다.
2. 복음주의 역사를 조명함으로 방향성을 제시해야 한다.
대 부분의 학생들은 로잔언약(Lausanne Covenants)과 그랜드 래피즈(Grand Rapids)에서의 신학 협의회를 통해 복음주의권에서 사회참여라는 이슈가 어떻게 정리되었는지, 마닐라 선언(Manila Manifesto)을 통해 은사주의자들에 대한 복음주의자들의 입장이 어떻게 바뀌었는지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많은 학생들이 그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영향을 받고 있지만, 그리고 그러한 역사 속에서 자신의 신앙이 어느 정도는 결정되고 있음에도, 정작 스스로는 그것에 대해 인식하지 못한 채로 생활한다. 시대를 좀더 거슬러 올라가서 살펴보면, 알미니안과 칼빈주의의 차이점과 그로 인해 생기는 신앙의 서로 다른 입장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한다. 화란의 개혁주의나 독일의 경건주의, 웨슬리와 메쏘디스트를 알지 못한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그리고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살아서 지금도 일하시는 그 분의 인도하심을, 실상 별반 인식하지 못한 채로 생활하는 것이다. 나는 가끔 많은 기독학생들이 불트만(R. Bultmann)을 어떻게 생각할까 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물론 많은 기독학생들이 불트만을 싫어할 것이다. 하지만 극과 극은 통한다고 하지 않는가. 이들 사고의 밑바닥에는 오히려 신앙의 역사성을 무시했던 유신론적 실존주의자들의 유산을 물려받은 것처럼 보일 때가 있어서일까… 요사이 과거에 비해 복음주의 역사에 대한 체계적인 가르침이 약해졌고 그에 따른 복음주의의 방향성을 제시하는데 부족함을 경험하고 있다. 한편으로 다행스럽고 감사하게도 어느 때보다 자료집과 좋은 책들은 많이 번역되고 있지만, 정작 사역의 현장에서 강조하지 않기 때문에 학생들은 그런 것들을 외면하게 된다.
되 도록 많은 리더들이 스스로 체득한 복음주의 역사를 자신의 소그룹 멤버들에게 전수할 수 있었으면 좋겠고, 그것이 어렵다면 스터디 모임을 단기간 동안만이라도 가지는 것도 좋을 듯 하다. 내가 속한 선교단체의 경우, 스터디 모임을 통해서 종교개혁과 대각성 운동, 그리고 복음주의 신학의 흐름과 그에 따른 시대별 세계관 파악, 로잔 언약과 마닐라선언의 특징, 복음주의 지도자들과 그들의 사역에 대한 간략한 공부를 하였다. 적지 않은 수의 학생들과 함께 스터디를 할 수 있었고 대부분은 많은 관심을 가지고 참여했다. 어떤 열매를 맺을지는 좀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3. 복음주의적 전문인을 양성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어야 한다.
선 교단체에 있으면 고시 준비를 한다든지 혹은 공과대에 속해있는 학생들이 있게 마련이다. 사실 이들은 정죄의 대상이 되기 쉽다. 하지만, 공동체에 전적으로 시간과 정열을 쏟을 수 없는 이들의 상황을 공동체가 받아들여주지 못한다면, 그리고 오히려 그들을 정죄하고 공동체에서 상처받은 채로 떠나게 되는 것을 방관한다면 우리의 공동체는 온전한 복음주의적 전문인을 키울 수 없는 곳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그들이 공동체를 떠나지 않도록 하면서, 그들의 상황과 형편에 맞는 구조를 세우고 그 안에서 그들이 전문인으로 양육 받을 수 있는 프로그램을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선교단체의 많은 리더들이 고학년으로 갈수록 전임사역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것은 공동체 사역의 목적이 일정부분은 왜곡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들이 많은 시간을 공동체에 쏟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장할 수 없는 것은 반복적인 모임에 계속적으로 시간을 보냄으로 생기는 정체 현상인 듯 하다. 이는 앞서 지적했기 때문에 각설(却說)하고 대안을 생각해 볼 때, 동질의 모임들이 어느 정도 축소되어야 할 것이다. 비슷한 형태의 모임들이 줄어들고 차별적이고 대안적인 모임들이 활기를 띨 때 학생들의 자발성과 역동성, 그리고 전문성 등을 고취시킬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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