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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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상황] 도발적인 캠퍼스 보기 (2): 닮음꼴

/김용주


"기독교 복음이 사회를 새롭게 하는 데는 우리 마르크스 철학보다 더 강한 무기임을 나도 인정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당신들에 대하여 승리할 것이다.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말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다.

우리는 현실주의자들이다.

우리는 우리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동원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획득하는지도 안다.

어떻게 사람들이 기독교 복음의 최상의 가치를 믿을 수 있겠는가! 당신이 그것대로 실행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그것을 전파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그것을 위해 시간도 돈도 희생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우 리는 공산주의의 메시지를 믿는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것을, 심지어 우리의 생명까지도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다. 당신들은 가족과 함께 휴일을 야외에서 즐긴다. 하지만 우리는 휴일뿐만 아니라 주말의 시간까지도 당을 위해 바친다. 우리는 큰 즐거움으로 기름때를 만지지만 당신들은 손에 흙 묻히는 것조차 괴로워하고 있다..."

(한 공산주의자의 공개도전장)


지 난 달에 GT를 읽다가 위와 같은 '공개도전장'을 받았다.(GT 3-4월호, 99면 인용) 처음엔 그냥 쉽게 읽고 넘겼는데 한 달 내내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찜찜하고 마음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아마 내심 이 도전에 응할 수 없는 나와 내 공동체의 형편들을 생각하면서 시작된 마음의 짐 때문이었으리라.

지난 4월에 실린 필자의 글은 '기나긴 겨울잠에서 깨어나라'는 구호를 내걸었지만 꽤나 냉담한 반응을 접했다. TNT논쟁 때 보여졌던 긍정적, 혹은 부정적 의견을 온라인과 오프라인 상에서 그리고 개인적인 메일로 받았던 것을 돌아볼 때, 이번에는 지극히 조용한 한 달을 보냈다. 간신히 접한 글이라고는, 복상 게시판의 논객인 Gramsci님이 5월호에 쓴 독자의 글로 주된 내용은 희망이 없다는 것이었다. '제발 절망하라'는 Gramsci님 특유의 글은 내게 '절망을 인정하고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쓰디 쓴 교훈을 주었다. 이 묵은 실타래들을 풀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 나또한 절망 가운데에 있음을 자각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그 문제들을 딛고 살아가야 하는 이 시대의 기독인들의 현실을 돌아본다. Gramsci님보다 더 못한 삶을 살고 있는 부끄러움을 안고.


<닮음꼴 하나: 대집회 장소와 콘서트 홀>

복 상에서 전혀 반응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번 연중기획으로 시작된 <SF가 판치는 교회>는 지난 달에도 교회 중심의 시각을 회복하려는 글들이 많이 선보였고, 그 중에는 내가 속한 캠퍼스에 적용될수 있는 류의 도전적인 글도 있었다.

' 하지만 저들은 왜 저곳에서 멈추지? 왜 삶의 현장으로 달려가지 아니하는 것이지? 또 저 탁월한 영성(?)의 찬양 인도자는 저곳에서 항상 영적 전쟁을 선포하고 그곳을 위해 중보기도는 하지만, 왜 자신의 직장과 현장에서 불의에 항거하고 또 소외되고 가난한 자들에게로 나아가라고 말하지는 않는 거지?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기도하면서 그 누구보다도 많은 교제를 나누었을 자신의 사랑하는(?) 동역자들이 행하는 교회 세습, 헌금 유용 등 - 예컨데 서울의 거대한 교회 지도자들의 악한 죄악을 두고는 기도하지 않는 거지? 왜 음란을 위해 기도하면서 스포츠투데이 같은 신문의 폐간을 위해 기도하지는 않는 거지?'...(중략)...돌아와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합법적인 대우 자동차 정리 해고 집회를 경찰이 무력으로 진압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중략)...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 찬양 인도자는 연약한 민중들의 피 흘리는 그곳에서 "기독청년이여 깨어나라! 하나님의 백성이여 깨어나라!"라고 말하지 않는지, 왜 그렇게 하지 않는지...

(복상 5월호, 김채완 "가까운 곳에 있는 영적 허구", 98-99면)

김채 완님의 이와같은 언급은 나로 하여금,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찬양 집회에 갔을 때의 느낌을 상기하게 만든다. 그 느낌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려면 잠시 하나의 프로그램과 비교해야 하겠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찬양집회의 세상적(?) 모델이 있다면 그것은 <열린 음악회>가 될 것 같다. 가사는 대형 화면으로 전달되어 손쉽게 따라부를 수 있다. 애창가요와 최신가요, 그리고 가요와 클래식의 분배를 적절하게 함으로써 세대간의 벽을 허물고,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음악이란 매개물로 하나라는 정서를 승화시킨다. 이들은 마치 진정으로 옆사람과 하나가 되었다고 느끼며, 통일을 노래하면 통일을 이룬 것 같고, 사랑을 노래하면 사랑이 서로의 마음 속에 풍성한 것 같지만. 공연이 끝나고 세트장을 정리하게 되면 항상 출구는 서로 나가려는 사람들의 이기심에 눈살을 찌푸리며, 그렇게 돌아가는 발걸음 가운데엔 어느새 한 바탕 잔치를 하고난 허전함이 찾아온다. 다음날 시작되는 일상은 변함이 없으며 그들은 허구적인 공연 뒤의 공허함을 메우기 위해 다시 다음 공연장소와 날짜를 다이어리에 기록해 둔다.

난 며칠 전 또다시 꽤나 유명한 찬양예배 광고지를 받았다. 이번엔 찬양예배 가운데 삶을 고취시키려나...절망 속에 또 기대하는 마음으로 집회 날짜를 다이어리에 적어둔다.


<닮음꼴 둘: 성령체험의 코드화와 주술적 행위>

고 등학교 시절, 고등부 임원회에 속해있던 시절에 우리는 그 시절에 <두란노 경배와 찬양>의 찬양 스타일을 흉내(?)내곤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찬양예배 시간에 찬양 인도자의 멘트(?)를 똑같이 따라하는 임원들이 있었다. 그리 오래지 않아 어린 시절과 비슷한 일이 한국 교회에서도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고 씁슬해 한 적이 있다. 찬양과 치유사역이 맞물리는 빈야드교회의 찬양을 교회와 선교단체가 흡수하면서 겪었던 일이 그것인데, 대부분의 사역자들이 빈야드교회의 신학은 받아들이지 못한 채, 예배의 스타일만을 차용하여 적용시켰던 일이 있었다. 교회 안에서 어느 정도의 부작용을 감수해야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 러한 모조적인 행태는 내가 속한 캠퍼스에 들어오면서도 꽤나 괴상한 모습으로 변질되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영적 체험의 코드(code)화이다. (특별히 명명(命名)할 만한 말이 떠오르지 않던 차에 <바이블 코드>라는 책을 '구경'하면서 생각했던 그 '코드'를 떠올려 보았다) 특히, 이것은 찬양 인도자나 중보기도 인도자가 이야기하는 가운데에 가장 자주 보여지며, 때때로 함께 기도하는 기독학생들 사이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이들은 특정한 기독교적인 단어들을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을 불러 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생각이 그들을 지배하게 되는 것 같다. 이런 영적 체험의 코드화는 마치 신접하는 행위나 주술적인 행동들과 비슷하게 보일 때가 있다. '성령의 임재',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같은 말들로 시작하여 모두가 눈을 감고 그런 단어들을 되내이면 신이 내려오는 것과 같이 생각하고 느낀다. 흥미롭게도 그들이 주목하는 것은 각 개인에게 찾아오는 인격적인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깊은 이해, 그리고 우리의 개인적, 혹은 공동체적 죄에 대한 회개와 각성이 아니라, 현상적인 치유와 능력, 이적과 기사들의 현현을 기대하는 수가 많다. 그런 현상이 없거나 기대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단지 순서가 되바뀐 게 심각한 문제다. 간혹 사역자들 중에서도 로이드죤스의 <성령세례>는 좋아하면서, <성령의 주권적 사역>에서 경계하는 것들을 공공연히 프로그램화하는 이들을 본다. 특정한 코드를 되내이며 램프를 문지르면 능력이 임한다? 경계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닮음꼴 셋: 선교단체와 JMS>

99년에 TNT논쟁을 하는 가운데 기숙영님의 글에 대한 반론을 쓰면서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한 적이 있다.

개 인주의적인 20대의 특징은 자신이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공동체, 또한 핵가족화된 가정에서는 누릴 수 없었던 친밀한 공동체를 원한다. 자신에게 맹목적으로 잘해주며 그래서 자신의 마음을 맡길 수 있는 편안한 공동체가 존재한다면 그들은 이성적 사고를 접어두고서라도 그 단체를 선택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자신에게 잘해주는 이단 단체에서 친밀함을 누리는 것이 바람직한가? 오히려 그들의 잘못된 집단적 행동에 대해 '바른 교리'라는 진리의 지성적 영역에서 일깨워주어야 할 부분이 있지는 않는가 하는 말이다.

한국 교회는 두 가지 측면에서 잘못했다. 첫째는 친밀한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실패하여 많은 기독청년들을 이단 단체에게 넘겨준 것. 둘째는 그들에게 세계관의 중요성을 부각시키지 않고, 지성의 영역에서 복음을 이해하는 훈련을 제대로 시키지 않은 것. 여기에서 두 번째 문제에 대해 지금의 30대가 20대에게 도전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또한 여기에 대한 선교단체의 사역방향이 이단단체와 똑같이 맹목적으로 잘해주는 공동체의 형성에만 치중하여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면, 그것은 기독교와 이단의 구분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처사임에 분명하다. 그들의 개인주의적 성향 이면에 존재하는 왜곡된 집단성을 긍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지 않는가. (복음과상황 1999년 9월호, 73면)

난 요즘 선교단체를 대하면서 "선교단체의 사역방향이 이단단체와 똑같이 맹목적으로 잘해주는 공동체의 형성에만 치중하여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면, 그것은 기독교와 이단의 구분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처사임에 분명하다"라고 했던 이야기를 곱씹어 보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내 주변에는 기독교와 이단을 구분할 수 없는 많은 기독학생들을 본다. 물론, 엄밀히 말하자면 구분을 못한다기 보다는 서로를 진리의 영역이 아닌 패거리의 영역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기독학생들을 본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이들은 성경에 대한 이해가 많이 부족한 실정이며, 코드화 된 기독교적 표현들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 무지한 편이다. 그러나 '빈번한' 공동체 생활이나 수련회에서 너무나 친밀한 나눔을 통한 집단적 결속력과 유대가 강해지기 때문에 학생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미 자신의 학과에서는 부실한 참여로 아웃사이더가 된지 오래며, 자신이 속한 선교단체를 나오면 학교 내에서 관계를 맺고있는 인맥의 거의 전부를 버려야만 한다. 그러한 결단을 할 수 없는 많은 기독 학생들이 공동체에서 복음을 경험하지 못한 채로 의무감에 신앙을 지켜간다. 어느 정도 중세의 카톨릭적이며, 좀더 심하게 말하면 JMS와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다!

(계속...)


2001년 6월.
2001/06/01 23:00 2001/06/01 2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