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Posted
Filed under 기고글 모음/복음과상황
<김용주의 세상보기>도 실리지 않아야 합니다

** 이 글은 <복음과 상황> 홈페이지에 올린 글입니다.

 

1999년 5월까지 복음과 상황에는 장대익 편집위원과 창조과학회의 창조, 진화 논쟁이 꽤 오랫동안 이어졌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개인적으로도 George M. Marsden의 <미국의 근본주의와 복음주의 이해>란 책의 5장, "진화론과 근본주의의 싸움", 6장 "왜 창조과학인가?"와 Phillip E. Johnson의 <defeating Darwinism>을 '힘겹게(?)' 읽고 있던 차였기 때문에 관심 있게 지켜보았었고, 복상 측에서도 오랜 기간동안 충분히 반론글들이 올라올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개인적으로는 창조과학을 신뢰하지만 장대익 편집위원의 지적들은 되새길 가치가 있었으며, 오히려 나이를 문제 삼거나 권위적, 혹은 근본주의적인 반응을 보인 창조론 옹호자들의 대응에는 많은 문제가 있음을 보기도 했습니다.

저는 당시 2월에 실린 복상의 입장에 크게 고무되었던 기억이 납니다. 다시 옮기면 아래와 같습니다.

"연말연시에 벌어진 창조, 진화 논쟁은 <창조과학회> 측으로부터 "도대체 <복음과 상황>이 무슨 의도로 진화론을 옹호하는 듯한 글을 계속 싣느냐?"는 거센 항의에 접하게 했습니다만, 신앙의 문제로 치부하려 들지 말고 지면을 통해 생산적인 논쟁을 계속함으로써 판단은 독자들의 몫으로 돌려야 한다는 게 저희의 생각입니다."
(서재석 편집장)

이렇게 공식 입장을 밝힌 지 3개월 후에 복상에서는 다음과 같은 알림글과 함께 창조, 진화 논쟁을 마감하였음을 기억합니다.

"본지는 특정 이슈를 놓고 다양한 의견과 주장들이 자유롭게 개진될 수 있었던 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앞으로도 우리 사회와 신앙 현실에 대한 독자 여러분들의 복음적 고민과 대안 모색이 본지를 통해 활발하게 전개되기를 기대합니다. 동시에 이번 <창조 진화 지상논쟁>은 모든 논점이 명백하게 다뤄지면서 그 실체가 정확히 규명되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논의의 범위가 드러나고 이슈가 분명해졌다고 판단해, 이번 글을 끝으로 <지상논쟁>을 마감하고, 두세 달 후 이 주제를 집중적으로 해부하고 조명하는 특집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 편집자 주"

여기에서 저는 두 가지를 상기하고 싶습니다. 먼저는 <복음과 상황>이 "특정 이슈를 놓고 다양한 의견과 주장들이 자유롭게 개진될 수 있었던 것을 기쁘게 생각"하는 잡지라는 것과 <창조 진화 지상논쟁>이 마무리된 것은 "논의의 범위가 드러나고 이슈가 분명해졌"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서론이 좀 길었습니다만,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려 합니다. 1999년 10월호 <복음과 상황>에서는 시론으로 연정희씨가 출석하는 교회의 목사님의 "옷 로비 의혹 사건과 복음"이란 글을 실은 바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달인 11월호에 다시 시론으로 "누구를 위한 변명인가"와 "옷로비 옹호론에 대한 일고"라는 반론이 올라왔고, "논고개에서"에서 편집장님은 균형감각을 역설하였습니다.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럴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1월호의 태도입니다. 제가 참석하지 못한 복상포럼은 제쳐 두고라도 다시 사과문을 발표한 것 때문입니다. 당시 옷로비 사건은 마무리되지도 않았었습니다. 사과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지는 국민적 의혹과 교계 안팎의 관심이 집중된 옷 로비 사건의 검찰 조사가 완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한 쪽 당사자의 이해를 대변하는 글을 실어, 마치 본지가 그 입장을 대변하거나 두둔하는 듯한 인상을 준 데 대해 독자 여러분께 사과를 드립니다. 본지는 이같은 상황을 초래한 편집 실무진에 대해 강력히 주의와 염려를 전달하고, 향후 이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균형잡힌 편집에 힘쓸 것을 천명합니다." ("복상은 작년 10월호 시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공식 입장을 밝힙니다" 중에서)

저는 "검찰 조사가 완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한쪽 당사자의 이해를 대변하는 글을 실"은 뒤, 바로 그 다음 달 두 편의 글을 통해 반론을 편 것만으로도 충분히 "균형잡힌 편집에 힘"썼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특검팀 검사 중인 시점에, 포럼을 통해 10월 시론을 쓴 목사님의 변론을 들을 기회조차 주지 않은 복상이 창조 진화 지상논쟁에서 보여준 "특정 이슈를 놓고 다양한 의견과 주장들이 자유롭게 개진될 수 있었던 것을 기쁘게 생각"하는 잡지인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또한, 그런 눈치를 보는 복상이 "앞으로도 우리 사회와 신앙 현실에 대한 독자 여러분들의 복음적 고민과 대안 모색이 본지를 통해 활발하게 전개되기를 기대"할 수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몇 번이나 저는 여러 곳에서 공개적으로 <인물과 사상>이란 잡지와 강준만 교수를 높이 평가하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 사회 여건 상 균형없이 특정 인물을 심하게 지지하거나 질타하면 색안경끼고 보게 되어 있음을 잘 알면서도 저는 그런 일에는 별로 개의치 않아 왔습니다. 제가 복상보다 <인물과 사상>을 더 열린 잡지라고 생각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인물과 사상>에서 몇 달 전 상식 이하의 글이 실린 적이 있습니다. 물론, 편집진의 잘못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몇 분이 정말 심하게 편집진과 강 교수, 그리고 글을 쓴 필자를 욕을 해대고 글에 대한 사전 검열이 없었음을 질책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인물과 사상>은 공식 입장이 다음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판단을 내리는 것과 '검열'을 하는 것 사이의 차이가 분명하지 않다는 데에 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인물과 사상>은 실정법에 저촉되지 않는 한 그 어떤 주장이든 그대로 다 싣고자 합니다. 물론 그로 인한 부작용이 왜 없겠습니까. 다만 <인물과 사상>은 그로 인한 부작용보다는 기존의 매체들이 독자들의 글에 대해 행사하는 '검열'을 그대로 따르는 것으로 인한 폐해가 훨씬 더 크고 심각하다는 비교적인 관점에 주목하는 것입니다......앞으로 이와 유사한 일은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아니 그런 일이 자꾸 일어나야만 '보통 사람들이 주체가 되어 만드는 잡지'라고 하는 <인물과 사상>의 독특한 목표가 변질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점 잘 헤아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강준만, "김정환, 김창은씨의 반론에 답합니다" 중에서)

그래서 저는 기숙영님의 아래 의견에 동의합니다.

"적어도 복상에 올려진 글로 인해 비판이 쏟아지자 서둘러 사과문을 내는 그런 줏대 없는 복상으로 내버려두지는 말자 이겁니다."

저는 "비판이 쏟아지자 서둘러 사과문을 내는 그런 줏대 없는 복상"이 아니라 "논의의 범위가 드러나고 이슈가 분명해졌다고 판단"되었을 때까지 반론을 여과 없이 개진할 수 있는 복상으로 되돌아가기를 기대합니다. 또한, 제가 좋아하는 어느 잡지처럼 복상도 그렇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이와 유사한 일은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아니 그런 일이 자꾸 일어나야만 '보통 사람들이 주체가 되어 만드는 잡지'라고 하는 <복음과 상황>의 독특한 목표가 변질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점 잘 헤아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기까지가 본론이었습니다.
이제 결론을 내야 합니다. 물론, 독특한 이 글의 제목이 결론이 되겠습니다. 1999년 10월호를 보면 아시겠지만, "옷 로비 의혹 사건과 복음"이라는 시론이 실리기 전 복상카페에서 저는 지유철님의 글을 소개한 바 있습니다. "연정희를 위한 변명"과 <인물과 사상> 홈페이지 게시판에서 있었던 지유철님의 토론내용을 보고 거기에 동의했으며 "좋은 지적이다"라는 말을 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그 글이 10월호에 편집되어 시론 뒤편에 같이 실렸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아마 제 글을 포함한 그런 글들로 인해 복상에서는 시론을 청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의이든 타의이든 "옷 로비 사건"으로 인해 지유철님의 "데오빌로의 로마통신"이 연재되지 않고 있다면 저의 "세상보기"또한 연재를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복상의 공식 입장이 사과해야 할 만한 일이었다면, 정말로 반론 두 편과 포럼으로 모자라서 사과문까지 올려야 할 중대한 실수였다면, 제 글도 연재가 중단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균형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10월호에 편집된 제 글에 대해서 후회되는 바도 없습니다.

저는 글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내색하진 않아 왔지만 개인적으로 작년 한해 동안 가장 저를 들뜨게 만든 일이 있었다면, 제 삶의 일부분과 같았던 짧은 글들이 제가 가장 크게 신뢰한 잡지에 실리게 된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제 나이를 고려한다면 정말 제겐 너무 과한 대접이었다고 진정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하지만, 이제 제 글이 실리는 것은 부당하다고 느껴집니다.

그런 이유로 저는 이 글을 씁니다. 다음과 같은 말을 하기 위해 많이 고민하였습니다...

"<김용주의 세상보기>도 실리지 않아야 합니다"

생각있는 필진과 독자들의 숙고어린 글들을 기대합니다.
2000/01/22 00:39 2000/01/22 00: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