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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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7)
- 언행 일치와 언행 해체 사이에서

/김용주


두 사람에 관한 기억
시간이 지나 교제는 끊어졌지만 가끔씩 기억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중 한 분은 <복음과상황>에서 일하시다가 지금은 청년목회자연합(Young2080)의 문서출판본부의 이은섭 팀장이다. 한창 복상 독자모임이 활발하던 시절, 그 분 집에서 모임을 했던 적이 있었다. 잡지와 교계에 대해 한참을 열심히 토론을 하다가 밤이 늦었다. 간단한 다과를 한 후라 정리를 급하게 하고 가려고 주섬주섬 음식을 정리하고 있었다. 비닐에 쓰레기를 버리고 있는데, 그는 내 비닐을 낚아채서는 다시 일일이 분리 수거에 들어갔다. 나는 시간이 너무 늦어 마음이 바쁘기도 했고, 사실 분리수거를 그렇게 철저하게 하며 살 지도 않았던 터라 그의 행동이 조금 낯설고 불편했다. 그는 과일 껍질과 나무 젓가락, 그리고 각종 일회용 접시에 하다못해 프린트물에 박힌 철심까지 다 분류하여 정리하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날 그가 내게 해준 환경오염에 대한 다소 투박했던 이야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에게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진 분리수거가 내게는 낯설게 다가온 사실이 많이 부끄러웠다. 내가 기억하기로 그 날 처음으로 나는 환경을 보호해야 한다는 내 생각과 실제 습관 사이의 괴리감이 얼마나 큰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더 있다. 독자 모임 때 만났던 ‘그람시’라는 아이디를 쓰는 형이었다. 그에 대한 몇몇 기억이 있지만, 무엇보다 그가 간식을 사 온 날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좌파였고 신자유주의를 반대했던 그는 간식도 동네 노점상에서 파는 것들을 사왔다. 그 때 그 음식이 뻥튀기였는지 붕어빵이었는지, 혹은 튀김이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지만 그가 겸연쩍게 웃으며 ‘동네 장사하는 분들의 주머니를 채워드려야 한다’는 말은 아직까지 기억이 난다. 퇴근 할 때 나는 당산역에서 버스로 갈아타야 하는데, 역의 오른쪽에는 맥도날드와 롯데리아가 있고 오른쪽에는 포장마차 노점상들이 즐비하다. 지금도 나는 가끔씩 허기진 날에는 왼쪽과 오른쪽을 번갈아 돌아보다가 그를 떠올리며 노점상 쪽을 향하곤 한다.


언행일치? 언행해체!
모 방송 개그 프로그램 중에 ‘언행일치’라는 코너가 있었다. 아내와 즐겨보곤 했었는데 그 코너의 개그 코드는 말과 행동의 불일치를 넘어 몸과 말의 ‘해체’에 가까웠다. 가족으로 분장한 그들은 서로가 대화를 하는 중에도 대화와는 전혀 상관 없는 몸개그를 선보였고 그런 그들의 스타일이 참 기발하단 생각을 했다. 지금 생각해도 참 ‘포스트모던’한 개그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요즘의 우리가 그렇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미 우리는 우리가 어떤 독립적인 결정자가 아님을 인정하고 있으며, 나아가서 스스로를 여러 가지 단편적인 경험과 정보, 그리고 습속의 조합 내지는 혼합유기체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특별히 고민하고 살지 않은 많은 개인들은, 어찌 보면 ‘몸개그’에 가까운 이른바 ‘언행해체 현상’을 자주 경험하고 또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일례로 이제는 그 논의가 시들해졌지만 ‘보보스’ 논쟁이 그랬다. 강준만에 따르면, 데이빗 브룩스가 그의 책에서 처음 언급한 보보스(Bobos)는 미국의 부르주아이자 좌파-엘리트 그룹으로 권력과 금력을 누리며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녀 ‘리무진 진보주의자’라고도 불린다. 좌파-엘리트인 그들 대부분인 명문대학을 나오고 유복한 생활을 하면서도 사회적 약자나 소수 세력의 대변자로 행세하여 ‘좌파처럼 생각하고 우파처럼 생활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자본주의 축복을 한껏 즐기면서 혁명 투사 체 게바라를 좋아하는 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그들은, 그 존재 자체가 일종의 퓨전 현상이다. 나는 그들이 사회에 기여하는 긍정적인 영향으로 인해 이들에 대한 평가가 유보되거나 혹은 매체가 나서서 구매의 주체인 그들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현상이 신기했다. 대외적인, 그리고 거시적인 자신의 주장이 소외된 사회 계층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그와 동시에 자신의 소신과 상반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 그리고 그런 삶 자체가 어떤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흥미롭지 않은가. 게다가 우리 나라의 젊은 부자들은 그들의 ‘관(觀)’보다는 ‘스타일’을 흉내낸다는 것이 더 흥미롭게 느껴졌다. 그들의 삶이 어떤 의미에선 퓨전이라기 보다는 ‘해체’에 가깝지 않은가.


‘오래된 습관, 복잡한 반성’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갑자기 마음이 씁쓸해진다. ‘언행일치’의 몸개그에 한껏 웃으며, ‘보보스’같은 좌파 엘리트들을 위선자라며 정죄까지는 안 해도 어느 정도 불편하게 여기는 나도 사실은 여전히 환경 문제에 둔감하고, 가격이 싸다는 이유만으로 동네 슈퍼마켓과 납품업체들의 목을 조여대는 대형할인매장에서 별 고민 없이 물건을 구입한다. 그 뿐이랴. 버거킹 햄버거와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고, 외국 프랜차이즈 식당에서 식사하는 것을 즐기며, 할리우드 영화와 미국 드라마에 열광하며 살아간다. 좌파 지식인들처럼 자본주의나 신자유주의를 부정하며 살 자신은 없어도 김진석의 책 제목처럼 이른바 ‘기우뚱한 균형’ 상태로 세상을 바라보며 나름의 비판적인 잣대를 들이대보려 하지만, 내 미시적인 삶 가운데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파편적인 기호들과 습속들은 지속적으로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 일상 속의 일정 부분은 통일된 자아를 소유하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일정 부분은 내 의도와 기대와는 달리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잔존한다.

꿈은 해결되지 않은 현실의 문제가 무의식 중에 나타나는 것이라고들 한다. 어떤 의미에서 지금은 교제조차 없어진 과거의 사람들을 회상하고 자꾸 돌이키는 건 지금의 내 모습에 대한 불편함과 부끄러움에 대한 해결되지 않은 내면 때문일 것이다. 때로 내뱉는 주변 사람들의 한 마디가 그 사람의 일관된 오랜 습관처럼 느껴질 때 나는 자꾸만 나를 돌아보게 된다. 설령 그가 바른 삶을 살지 않을 때조차도 자신의 말과 원칙에 자신의 삶을 길들이는 사람들을 통해 나는 자주 나를 반추한다. 살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개중에는 부러울 만큼 많은 지식을 소유한 사람도 있고 멘토로 삼을 만큼 존경할만한 선생도 있다. 하지만, 가끔씩 회사에서 프린트물에 박힌 철심을 떼어낼 때마다, 퇴근길에 맥도날드와 호떡집 골목에서 갈팡질팡하는 내 모습을 볼 때마다, 그래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이 나를 괴롭힐 때마다 그 두 사람이 떠오르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이리라. (끝)

*월간 <복음과상황> 08년 11월호 기고글.
2008/11/01 00:07 2008/11/01 0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