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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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4)
- 직업과 소명 사이에서


예 전에는 더 많이 들었지만 지금도 간간이 지인들을 만날 때마다 듣는 질문이 있다. 자동차회사가 적성에 맞느냐는 거다. 이런 류의 질문은 대학교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같은 과 친구들도 자주 묻곤 했다. "넌 공대생 같지 않아" 사실이 그랬다. 나는 철학과 신학, 그리고 세계관과 기독교 문서운동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다. 교회 목사님은 내가 신학을 할 거라고 생각했고, 선교단체 사람들은 내가 문서사역 내지는 기독 출판계로 갈 것이라 생각했다. 나 또한 전공필수 과목 외의 선택 과목은 과학철학이나 논리학, 미학 같은 공대생들이 거의 듣지 않는 과목에 시간을 쏟고 있었고, 때때로 기독교 단체들 주변을 기웃거리곤 했다. 내겐 그런 일들이 더 신앙적인 것으로 느껴졌고 다른 무엇보다 더 가치가 있어 보이곤 했다. 물론 전공이 싫었던 건 아니다. 장학생은 아니었지만 매주 해야 하는 과제들은 나름 재미가 있었다. 단지 믿는 사람들이 소위 이야기하듯 이 일이 내 소명은 아니라는 생각, 하나님이 주신 부르심은 아니라는 생각 때문에 전공에 몰입할 수 없었고 졸업을 앞두고는 최선을 다하는 일에 자주 머뭇거리곤 했다. 졸업할 시기가 되어 진로를 고민하다가 문득 4년 동안 공부한 전공을 살리지 않겠다는 생각이 옳은 일인지 갈등이 되었다. 나의 신앙적 기준으로 볼 때 나 같은 사람은 대학을 다니면 안 되었다. 부모의 도움 없이 자신의 힘으로 학교를 다니지도 못했으면서 4년간 써먹지도 않을 공부를 한 것이니 말이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결국 나는 대학원을 가기로 했다. 대학원 진학의 목적은 오직 하나였다. 내겐 4년간의 학문적 공백을 메울 수 있는 물리적 시간이 필요했고 졸업 후, 6년간의 투자에 맞는 전문직을 얻어 사회 생활을 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그 시간이 내겐 중요했다.

그렇게 시작된 대학원 생활은 유익했다. 유익했다는 말이 좋았다거나 즐거웠다는 말과는 다른 의미다. 나는 형이상학적인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이론에 충실하고 큰 그림을 그리는 것에 익숙했다. 글을 쓸 때에도 스토리에 관심이 있지 통계치나 디테일한 부분을 그리 잘 챙기는 성격은 아니었다. 내가 들어간 연구실은 주로 전산설계를 하는 곳이었고 대부분의 시간을 프로그래밍에 할애하곤 했다. 프로그래밍은 흥미로웠다. 사실 내게 모든 학문은 흥미로웠다. 특히 개론 과목들은 언제나 나의 구미를 당기게 했다. 석사 1년차에 나는 첫 세미나를 하게 되었고 논문과 책에 나온 자료 구조(data structure)와 컴퓨터 그래픽 알고리즘(algorithm) 몇 가지를 발표했다. 새로운 개념들이 즐비한 논문들에 나는 매혹되었고 발표하는 내내 내가 요약한 발표 자료들과 힘있는 내 목소리가 한 곡의 클래식처럼 흘러갔다. 그러다 갑자기 박사과정 선배가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매우 디테일한 질문들이었다. 프로그래밍 환경은 어떤 것인지, 코딩 시에 인터페이스는 어떻게 구현되는지, 데이터가 초과되면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 등등 지금은 잘 기억나진 않지만 대략 그런 질문들이었다. 당시에 나는 좀 귀찮다는 표정으로 그게 뭐 대수냐는 류의 대답을 우회적으로 했던 것 같다. 선배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너, 해봤어?" 난 논문에 나온 결과들을 다시 읊었고 선배는 다시 되물었다. "네가 직접 코딩해봤냐고." 결국 한 주 뒤에 프로그램을 짜서 다시 발표를 하기로 했다. 나로서는 더 많은 것들을 공부할 수 있을텐데 사소한 코딩에 시간을 쏟는 것이 아까웠지만, 못 믿겠다는 선배의 표정을 바꿔놓고 싶어졌다. 한 주가 지나고 두 주가 지났지만 코딩은 끝나지 않았다. 새로운 방법도 아니고 10여년 전에 이미 완성된 논문 속 알고리즘을 짜는데 한 달이 걸렸다. 알고리즘은 간단해 보였지만 컴퓨터 환경 안에서 구현해야 하는 알고리즘들은 많은 제약을 받았다. 윈도우즈 환경에서 입출력을 쉽게 하기 위해서는 UI(유저 인터페이스)를 구성해야 했고 데이터를 저장하기 위해서는 메모리 관리를 해야 했다. 내 프로그램이 메모리 부족으로 다운되지 않으려면 다른 프로그램의 동작들을 자주 방해했기 때문에 다른 프로그램과 컴퓨터 메모리를 효과적으로 나눠 쓸 수 있도록 자료 구조를 설계해야 했다. 물론 지금은 컴퓨터 환경이 더 좋아졌고 반복적인 코딩 작업들은 자동화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컴퓨터 안에서 직선 몇 개를 보여주는 데에도 알아야 하는 그래픽 관련 함수들이 많았다. 더욱 당혹스러운 건 한 달 후 시연을 보인 프로그램은 돌발 상황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갑자기 마우스를 더블 클릭을 한다거나 보이는 창의 사이즈를 키우거나, 데이터를 극단적인 방식으로 입력하는 경우 프로그램은 오작동했다. 그러한 돌발 상황에 대한 에러 처리 코딩을 매번 해 줘야만 완벽한 프로그램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난 한 달 동안 이 허접한 프로그램과 씨름하고 나서야 박사과정 선배의 "해봤어?"가 마음으로 와 닿았다. 안 해보면 모르는 거다. 난 모르고 있었다.

실행 의 중요성에 대한 맛보기를 경험했지만 여전히 이론과 개론에 안주하고 싶어하는 내게 대학원 2년이란 기간은 충분치 않아 보였다. 대학원을 졸업할 즈음 나는 손에 잡히는 물건을 만드는 회사에 들어가기를 원했다. 결국 나는 2만개의 부품으로 이루어진 자동차를 만드는 회사에 입사했고, 그 2만개의 부품 중 몇 개의 아이템을 설계하는 일을 맡았다. 처음 개발회의에 들어간 날을 나는 잊지 못한다. 회의실에 온 연구원들은 부품들의 배치를 놓고 의견 조율을 하고 있었다. 말이 의견조율이지, 까놓고 말하자면 자기가 설계하고 있는 부품들 간의 간격을 확보하기 위해 대놓고 싸우고 있었다. 자동차 안의 공간은 정해져 있는데 개발 컨셉트에 따라 그 공간 안에서 부품들은 서로의 간격을 정해진 규칙대로 확보해야 한다. 신입 연구원인 나에게 그 회의 광경은 어처구니가 없어 보였다. 5~6밀리미터 정도의 간격 때문에 머리가 하얀 아저씨들이 세상이 끝나기라도 하는 듯 언성을 높여가며 다투고 있었으니 말이다. 내 키보다도 훨씬 큰 자동차에서 손가락 한 마디조차 안 되는 길이를 가지고 티격태격하는 모습이 하찮게 느껴졌다. 그 날 나는 사수에게 흔히 하는 말로 엄청 깨졌다. 자기 부품이 못 들어갈 수도 있는 상황을 관망하고 있는 내 모습에 화가 난 것이다. 그 날 나는 과거 대학원 시절 선배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사실 부품의 치수들은 내 어림짐작보다 더 중요했다. 5밀리미터 간격을 더 두느냐 안 두느냐에 따라 차량 주행 중에 소음이 발생하곤 한다. 치명적인 문제가 생기는 것도 내가 그렇게 쉽게 생각했던 손가락 한 마디보다 짧은 간격으로 인해서다. 그 뿐이랴. 3D모델로 정교하게 설계하더라도 실제 부품을 만들 때는 고려해야 할 문제들이 많다. 금형(金型)에 쇳물을 부어서 식힌 후에 빼내어 완성되는 대부분의 자동차 부품들은 금형의 뽑기 방향에 따라 크기가 미세하게 차이가 난다. 이도 반드시 설계자가 고려할 부분이다. 공차 관리도 해야 한다. 0.2밀리미터까지 도면으로 관리하는 공차에 따라 볼트나 너트가 들어가기도 하고 안 들어 가기도 한다. 이런 설계자의 작은 실수들로 인해 부품지원이 늦어져서 결국 차량 제작이 몇 주씩 늦어지기도 한다. 게다가 이 모든 것이 성능은 배제한 순수 부품의 조립만을 고려한 것이다!

MBTI 성격유형에 따르면 나는 ENTJ(지도자형) 혹은 ENFJ(언변능숙형)에 속한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나는 가능성 있어 보이는 일들에 당위성을 부여하고 말로 논리를 세우는 일들을 곧잘 했던 것 같다. 창피한 일이지만 때때로 나는 실행해보거나 경험해보지 않은 일들도 대략 감만 잡히면 마치 모든 것을 겪어본 것처럼 과장하기도 했다. 난 가끔 내가 고등학교 때 문과를 선택하여 공과대학으로 진학하지 않았다면, 더욱 허풍이 세져서 말을 과장하는 데에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내 본성이 그랬다는 말이다. 난 경험하지 않은 일에 있어서조차 상대방에게 신뢰감을 주는 말을 곧잘 하지만, 사소한 것들을 꼼꼼히 챙기고 작은 일에도 책임감 있게 끝까지 그 일을 마무리 짓는 데에는 서툰 사람이었다. 물론 지금도 상당 부분에서 그러하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직업은 최소한 나의 모난 성격을 다듬어 주고 있다. 특히 말단 연구원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마치 내가 CEO라도 된 것처럼 큰 방향이나 설정하고는 사소한 일들에는 의미를 좀처럼 부여하지 않는 내 부족한 모습을 직시하고 교정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지금의 내 직업이 천직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처음부터 내 직업은 공학에 호감을 가지고 전공으로 선택한 데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시작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선택한 직업은 이렇듯 나를 바꿔놓고 있다. 지금 내가 몸담고 있는 이 자리는 내 인격의 성장을 위해 하나님이 허락하신 자리이며 작은 일에서조차 최선을 다해야 하는 곳임을 조금씩 깨닫는다. 앞으로 펼쳐질 삶의 많은 여정 가운데 나의 선택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부르심이 어떠하든지 말이다. (끝)


*월간 <복음과상황> 7월호 기고글.
2008/07/01 00:05 2008/07/01 0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