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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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 (3)
- 손으로 쓴 편지


요즘은 기술이 날로 발전하고 있음을 피부로 느낀다. 더 이상 대다수의 사람들은 소설가 김훈처럼 연필을 깎아서 원고지에 글을 쓰지 않으며, 굳이 연필로 글을 써야만 고상해 보인다는 생각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음악도 그렇다. LP판으로 듣기를 고집했던 많은 클래식 애호가들도 CD나 SACD와 같은 진보된 기술에 마음을 열고 있다. 그 뿐인가. 휴대폰은 버스 안에서도 내 위치를 알려 줄 수도 있게 되었고, 이제 영상을 보면서 통화를 하는 시대가 왔다. 서울에서 부산까지는 고속철도로 2-3시간이면 이동이 가능하다. 처음 인터넷에 접속했을 때, MIT나 칼텍 같은 유명한 대학교의 웹사이트에 접속해서 원서로만 보았던 교수의 이름과 수업 커리큘럼, 그리고 참고 도서나 강의안과 같은 자료들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었다. 물론 그 당시의 인터넷 속도는 너무 느려서 문서 파일을 받는 데에만 몇 분이 걸렸지만, 지구의 반대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거의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또한 전자메일이 보편화 되어 지방에 있는 친구들이나 미국에 사는 이모에게도 실시간으로 편지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사실 나는 급속도로 빨라지는 기술의 발전에 비교적 호의적이다. 공학 전공자로서 이전에는 기술이 없어서 구현하지 못했던 많은 현실적인 제한들이 이제는 무의미해졌음을 절감한다. 상상력만 있다면 그것을 실현하기는 오히려 쉬운 일이 되어가고 있다. 특히 개인적으로는 빠르고 저렴한 방법으로 주변 사람들과 연락할 수 있는 많은 도구들이 생겨나는 것에 감사하기까지 하다. 내 할머니 세대의 어른들은 자식이 이민 가던 날,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란 생각에 마중을 나선 길에서 통곡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나는 아주 어릴 적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던 이모나 사촌 동생들을 블로그나 인터넷 공간에서 매일 만날 수 있다.

 

그들의 사진이나 글들을 읽으며 마치 옆에서 그들을 대하듯이 느끼고 경험하고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른다. 초등학교 시절만 하더라도 친척이 지방에 내려가서 살면 집으로 전화를 걸어 용건만 간단히 전하고 끊었고, 더 길게 이야기할 사연이 있으면 편지를 썼다. 편지는 답장을 받는 데에만 열흘이 남짓 걸렸다. 지금은 길을 걷다가도 생각만 나면 부산에 살고 있는 부모님과 대화할 수 있다. 편지를 쓰고 싶다면 인터넷의 우체국 사이트에서 쓴 글을 봉투에 넣어 하루나 이틀 사이로 배달까지 해준다. 어떤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지인들의 생일이나 경조일, 그리고 기념일들도 저장해두면 매년 잊어버리지 않고 나에게 그 날짜를 정확하게 알려주기도 한다.

 

허나 이런 기술의 최첨단 시대에도 문제는 있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연락도구들은 점점 발달하고 있는데 나는 이전보다 더 인간관계가 삭막하게 느껴지고 외로움과 고독감을 심하게 느끼며 살고 있다. 익숙한 것들에 더 무심해지기 때문일까. 처음에 환호했던 이메일이나 인터넷 블로그에는 상업적인 글들만 즐비하고 이젠 안부를 이메일로 묻는 이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언제 어디서나 ‘당신’에게 닿을 수 있다는 기술적 우월성은 사람을 더욱 나태하고 가볍게 만드는 듯 하다. 신영복 교수는 통혁당 사건으로 감옥에서 복역하던 중 제한된 종이에 가족에게 편지를 쓰는 것을 허락 받고는, 엽서에 글을 쓰기 전까지 쓸 말을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지극히 절제된 글을 가족들에게 썼다. 그가 시간적, 공간적으로 제한된 여건에서 썼던 글들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나 <엽서>를 통해 다시 읽어 보아도 한 줄 한 줄 가슴을 울린다. 내가 매일같이 소리의 속도보다 빠르게 지구의 반대편을 향해 날려보내는 많은 이메일과 정보들 중에도 이런 절제와 진중(鎭重)함이 있었던가. 마치 우리가 제사장 직분을 허락 받은 이후로 더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싫어하고 죄에 대해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어진 것처럼, 더 편해지고 가치 있어 보이는 ‘연락 도구들’은 우리를 서로에 대해 더 무관심한 존재로 만드는 듯 하다.

 

손으로 쓴 편지를 보내본 지가 10년이 넘은 것 같다. 아니 특정한 용건 때문이 아니라 사람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사람을 기뻐하여 사람을 위해 편지를 써 본 지가 참 오래되었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가족에게, 그리고 우정을 나눈 벗들에게. 매일 수많은 말들을 내뱉지만 그것들은 이내 허공으로 사라지고 그런 수많은 말들을 아끼고 아껴서 어떤 공간 안에 빼곡히 담았다가 전해주는 일이 그립다. 우리는 그리운 지인들이 생각나면 단축번호를 눌러서 안부 몇 마디에 수화기를 끊고는 오히려 더 외로움을 느끼곤 한다. 자주 들어가는 인터넷 공간 상의 짧은 댓글들 속에서 그 사람의 인격과 온기를 경험하기도 쉽지 않다. 때때로 지나친 편안함은 도리어 무심함을 가져온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기술과 속도의 진보는 내 순진한 기대와는 달리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의 영혼과 사람됨에 해를 끼치는 듯 하다.

 

언제든 손을 뻗으면 어디나 누구에게나 닿을 법한 첨단 환경 속에서도 절제와 진중함을 훈련해야 할 필요를 절감한다. 한 편의 글을 쓸 때에도 탈고하기 전까지 읽고 고치고 또 읽는 일을 반복하듯,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거나 전화를 거는 일도 좀더 준비된 마음으로 그 사람을 묵상하고 그리워하는 시간적 여유 속으로 충분히 빠져드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성 싶다. 매번 연락 가운데 그런 기다림과 성실함이 마음 속 깊숙이까지 전달된다면, 조금은 드문 지인들의 연락에도 세상살이가 덜 외롭다고 느껴지지 않겠는가. (끝)


*월간 <복음과상황> 2008년 6월호 기고글.

*김용주 님은 현대기아자동차 남양연구소에서 선행차량의 부품설계 및 해석업무를 담당하고 있으며, 블로그(http://myjay.net)를 통해 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꾼다. 그동안 <복음과상황>에 '회색지대 보고서', '도발적인 캠퍼스보기', '세상보기' 등을 연재한 바 있다.
2008/06/01 00:04 2008/06/01 0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