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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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출산, 육아. 이전에는 몰랐던 여성문제에 눈을 뜨게 된 남편의 반성과 성찰을 담았습니다. 육아를 통해 얻는 소소한 즐거움과 더불어 조금씩 가부장적 가치관에서 벗어나 '언니', 내지는 '엄마'의 정체성을 발견해 가는 과정 중에 쓰는 사적이지만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은 글들을 모았습니다. - 기자 말

대학을 졸업하면 공부와는 영영 '빠이빠이'일 줄 알았는데 웬걸 30대에도 여전히 직무 관련 교육부터 프레젠테이션, 어학까지 여전히 배워야 할 게 많다. 인터넷에 떠도는 자기계발서 사진 속 책 제목들이 '10대, 꿈을 위해 공부에 미쳐라', '20대, 공부에 미쳐라', '30대, 다시 공부에 미쳐라', '40대, 공부 다시 시작하라', '공부하다 죽어라'인 걸 보고 많이들 웃던데 정작 나의 일상만 봐도 이건 웃을 일이 아니다. 30대에 공부는 전쟁이다.

얼마 전 기한 내에 마쳐야 하는 온라인 수업이 있어서 새벽녘에 간신히 잠을 깼으나 알람 소리를 들은 아이가 하필 그 시간에 깨서 뒤척이며 우는 바람에 끝내 수업을 못 들었다. 아내가 달래보았지만 주로 잘 때는 내가 아이를 재우는 탓에 끝내 내가 자리에 누워서야 아이도 잠이 들었다. 싱글일 때나 신혼 때는 느끼지 못했는데 아이가 태어난 후로는 때때로 육아로 인해 해야 할 일을 못하거나 발이 묶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내는 뭐하고 네가 아이를 데리러 가냐?

최근 아내도 꼭 듣고 싶은 강의를 발견했는데 시간이 좀 애매했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강의인데 어쩔 수 없이 내가 조금 일찍 퇴근해서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데려와야 하는 상황. 처음엔 일찍 퇴근하면 회사 눈치를 봐야하는 게 싫어서 반대하려 했지만 며칠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내는 육아를 위해 거의 모든 일정을 포기하고 사는데 주 1회 퇴근을 조금 앞당긴다는 걸 절대 안 된다고 말하는 건 부부 사이에 공평하지 않은 행동이란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그 강의가 영원히 지속될 것도 아닐텐데, 처음부터 막기보다는 일단 해보고 정 안 되겠다 싶으면 다시 상의를 해보자는 생각에 그러자고 했다(그조차도 아내가 어린이집에다가 평소보다 조금 늦게까지 아이를 봐달라고 아쉬운 소리를 해야 했다).

일단 그러자고는 했는데 한 주가 지나고 두 주가 지나고 매주 같은 날 회사를 일찍 빠져나오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한두 주는 이리저리 둘러대면 그만인데 매주 같은 날 다른 직원들보다 일찍 의자에서 '엉덩이를 쳐 들어야' 하는 상황이 슬슬 눈치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무슨 일 있냐는 물음에 어린이집에 아이 데리러 나간다고 말하기도 좀 그렇다. 아마 다수는 '아내는 뭐하고 네가 아이를 매번 데리러 가냐'고 물을 것이고 내 상사는 그런 나를 배려하기보다는 도리어 나를 주시하게 될 게 뻔했다. 매주가 첩보작전 같은 이 상황이란.

아빠가 이럴진대 엄마는...

'아빠가 이럴진대 엄마는 오죽할까.'

퇴근길을 도망쳐 나오는 몇 주간의 경험 속에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간헐적인 매주 한 번의 이른 퇴근. 게다가 지속적으로 아이를 데리러 가지 않아도 되는 내(남편) 입장에서 이건 그저 하나의 육아 체험, 혹은 '엄마 코스프레'에 불과하겠지만, 매일 아침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저녁이면 '짤없이' 데리러 가야 하는 직장 여성들은 출퇴근 그 자체만으로도 스트레스 '만땅'일 것 같다.

듣기로 최근에 몇몇 수도권에서는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3~4시 이후로는 안 봐준다고 하여 아이를 어린이집에서 데려와 엄마의 퇴근 전까지만 봐주는 직업도 성행한다고 한다.

임신 때부터 직장에서는 업무 능력이 떨어졌다고 눈치 주기 일쑤고 출산 후 최소 2~3년은 아이를 돌보는 일에 자신의 시간과 노력 대부분을 쏟아야 하는데, 우리나라처럼 아이를 낳으면 사회가 제대로 책임져주지 않는 나라에서는 자녀를 낳고 키우는 일은 쉽지가 않다. 아이를 데리러 가려고 일찍 퇴근하거나 회식 자리를 빠지면 뒤통수가 따가울 정도다. 따가운 수준을 넘어 임신, 출산 전후로 퇴사를 종용하는 회사도 넘쳐난다.

이렇듯 복직을 하면 하는 대로, 일을 그만두게 되면 그만두는 대로 엄마들의 맘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회사를 다니면서도 온라인 수업 하나만 제대로 못 들어도 답답함을 느끼는데 출산 후에 자신의 사회경력이 멈춰버린 엄마들은 오죽할까. 아이를 잘 키우는 것은 다음 세대의 진보와 행복을 위해 사회와 국가를 위해서도 정말 중요한 일일텐데 정작 사회구조적으로는 이 핵심과제를 방기한 채 여성에게만 그 의무를 무한정 부담시키고 있는 건 아닌지.

요즘 한창 뜨는 용어 중에 '지속가능한(sustainable)'이란 말이 있다. 이는 환경을 파괴하지 않으면서도 성장을 담보로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나는 이 용어가 한국사회의 엄마들에게 더 강조되어야 할 용어가 아닌가 싶다. '알파걸'들이 넘쳐나던 캠퍼스에서 사회로 직장으로 스며들어간 많은 대한민국의 딸들은 출산과 육아를 맡을 시점에서 원치 않게 사회와 격리된다. 한때 잘나가던 여성들도 아이를 낳고 그 자리를 유지하려면 슈퍼우먼이 되어야만 한다.

아빠된 나조차도 5일 중에 하루를 흔쾌히 맡아주지 못하고 망설였는데 엄마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남편인 나부터 우리 사회 전체가, 여성이 임신과 출산, 육아에 배분된 에너지를 당연하게 여기고 이를 허용하는 사회 분위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거창한 담론들은 뒤로 한 채, 무엇보다 여성이 이 사회에서 '지속가능한' 사회생활을 할 수 있도록 내 아내부터 도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가 지지 않은 시간에 아이의 일상을 경험하는 것

오늘은 아이를 데리러 가는 날. 어린이집에서 "아빠아아~" 하고 아이가 뛰어 나온다. 요즘은 이 녀석도 은근히 아빠가 데리러 오는 날을 기다린다. 가끔 아침 출근할 때 "오늘은 아빠가 데리러 와?" 하고 묻고는 그렇다고 하면 좋아서 껑충껑충 뛴다.

아내보다 내가 더 인기가 높다(보고 있나, 당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 무릎에 앉은 아이의 머리에 내 턱을 대고 앉았다. 창문으로 바람이 아이와 내 뺨을 나란히 스쳐가고, 내 품에서 꼼지락거리는 아이를 안은 채 해 저무는 풍경을 바라보며 집으로 가는 길. 갑자기 마음이 뭉클해졌다.

사실 고통분담이라고 생각한 아이를 데리러 가는 길은 이렇듯 아이와의 절절한 감정을 키워주고 있다. 해가 지지 않은 시간에 아이의 일상을 경험하는 것이, 아빠에게 희생인지 아니면 기쁨인지 헷갈린다. 아내는 이런 감정을 더 자주 느끼겠지. '행복하다, 행복하다'. 언젠가 이 날을 떠올리며 나는 그렇게 회상할 것 같다.
2013/07/13 22:56 2013/07/13 22: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