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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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다수의 남성들은 이 영화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좀더 깊이있게 말한다면 다수의 남성들은 이 영화가 함의하는 변화의 조짐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영화를 보는동안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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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레알 여성이 아니므로 페미니즘을 관찰자의 눈으로 읽는다. 지적인 영역에서 분석하고 그 패러다임에 놀라움을 표하고 그저 변화의 코드들을 주워다 읽을 뿐이다. 그렇기에 어떤 면에서 나는 사이비로서는 꽤 성실한 관찰자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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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은 없다>를 봤다. (이제부턴 스포일러 모드)
일단 놀란 것은 그간 어떤 의미에서건 '아름다움을 연기'하던 손예진이란 배우의 정형화된 연기 패턴이 깨졌다는 사실이었다. 손예진의 연기를 보면서 이 영화의 감독은 절대 남성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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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선거와 딸의 행방불명. 
이 두 사건을 풀어가는 영화의 내러티브의 시작은 다분히 남성적이다. 아내의 내조 속에 권력의 치밀한 조작과 거래들이 남발하고 딸의 행방불명은 객관적 단서를 찾는 경찰과 선거라는 큰 그림 속에서 상대진영의 행동을 의심하는 거대한 비밀, 음모가 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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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주검이 되어 돌아온다. 
아내는 갑자기 실성한 듯 이상한 이름과 이상한 전화번호로 경찰을 헷갈리게 만들고 선거 중인 남편의 캠프 사람들을 힘들게 만든다. 가는 곳마다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무례하게 군다. 
역시 냉정함을 잃지 않는 남성 중심적인 사고와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남자들의 사회가 이 문제를 정리할 것이다. (해결은 못하더라도 적어도 사건 '정리'는 할 것이다) 그러니 딸이 걱정은 되겠지만 아줌마는 그저 기다리며 안정을 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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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녀의 이상한 행동들은 이내 실타래에 구슬을 꿰듯, 어려운 퍼즐이 그 윤곽을 드러내듯, 사건을 재해석해내고 연관성을 찾아간다. 다음단계와 그 다음단계로 넘어가는 추리과정은 남자들의 세계, 그 투박한 상황 판단과 정리로는 담을 수 없는 미세한 끈을 따라 집요하게 파고든다. 아이의 노트, 노랫말, 인터넷 메일, 친한 친구,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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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미치지 않았다. 
그녀의 행동들은 세상에 무례한 모습이 되었지만 내면은 그 어느 때보다 집중을 하고 관계의 복잡한 실타래를 풀고 자신의 위선과 싸운다.
엄마는 그간 자신이 생각하던 아이의 모습이 진짜가 아닐 수 있다는 인식과 더불어 아이에 대한 신뢰 사이에서의 자신의 편견과 감정을 끊임없이 걷어낸다. 다른 (남자) 사람들은 그 아이의 행실, 의도, 그간의 일탈 횟수를 통해 객관적, 통계적인 추론에 이르고 섣불리 윤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과 대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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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은 흘러흘러 비밀에 다다른다. 
이 영화의 클라이막스는 남편의 불륜이라는 '비밀'의 허망함에 있었다. 거대한 정치판에서의 암투와 그 사이에 발생한 아이의 죽음, 그것을 둘러싼 상대진영에 대한 의심, 그 와중에도 아이의 실종과 죽음을 놓고 펼쳐지는 언론플레이. 판세의 역전...그런 거대한 이야기, 남자들의 거친 암투 때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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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남자들의 가벼움, 남자 세계의 시시함이랄까. 
아이가 죽어도 영영 찾아내지 못하는 '냉철하고', '논리적인' 남자들, 그나마 착하고 멀쩡해보이는 이 남자가 결국 자기 불륜 따위를 막겠다가 사람을 사서 자기 딸을 죽인 결말이 드러난다.
그 과정을 광기어린 침착함으로, 혹은 과열된 집요함으로 엄마이자 아내는 묵묵히 사건을 해석하고 풀어내고, 마지막으로 심판한다. 그것도 남자들의 세계에서 보여지는 피끓는 복수가 아닌 합리적인 댓가를 선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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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페미니즘 '관찰자'로서 본 이 영화의 뛰어남이다. 나는 그렇게 봤다.
2016/07/16 11:42 2016/07/16 11: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