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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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거대 담론에서 미시적 일상으로

90년대 중반인가, 내적 치유와 상담 사역이 한차례 한국교회를 한 번 휩쓸었던 적이 있었다. 물론 지금도 그 영향이 크게 줄진 않은 것 같지만 그때처럼 관심이 컸던 적은 없었던 듯하다. 내적 치유나 상담에 대한 관심의 고조는 한국교회가 그간 조직의 논리에 따라 무조건적인 순종과 헌신을 강요한 나머지 사역자 개개인들의 미시적 삶의 문제들을 등한시하고 내면의 문제를 방치한 것에 대한 필연적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는 무엇보다 조직과 일 중심의 사역에서 관계 중심적이고 인격적인 교제의 중요성을 깨달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정치적으로는 정권 교체 이후 민주화 투쟁이 수그러들었고 포스트모던 담론이 대중들에게까지 퍼지면서 자연스럽게 조직이나 거대 담론에 대한 관심이 점차 개인과 미시적 일상으로 옮겨 가게 되었다. 이 시기에 많은 이들이 자신의 문제들, 이를 테면 과거 부모로부터 받은 치유되지 못한 상처들과 자신의 기질, 개인 영성의 성장 등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물론 이에 대한 부작용도 있었다. 반대급부적으로 생겨난 정치나 사회 문제에 대한 무관심과 기독 지성 운동 자체에 대한 회의감과 같은 부정적인 시각을 심어 주었고, 이로 인해 한국교회는 오히려 신앙적 근본주의로 회귀하는 기현상마저 보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당시 미시적 영역의 결핍에서 출발한 내적 치유와 상담, 개인 영성과 일상적 영역에 대한 관심이 교회 내에 끼친 긍정적인 면들은 그 자체로 높이 평가할 만하다.

 

 

2. 진보적인, 일상의 '귀남이들'

생각해 보면 겉으로 보기에 진보적인 이들 중에서도 일상생활에서는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인 경우가 참 많았던 것 같다. 비교적 여러 교회를 전전했던 나는 예배가 끝난 식사 자리에서 여성도들이 열심히 음식을 준비하고 주변을 정리할 때까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목사님들도 보았고(사실 대부분이 그랬다), 교계에 좀 더 깊이 발을 들여놓은 후 평소에 글이나 책을 통해 호감을 갖거나 존경했던 분들도 평상시에는 주변에 지나치게 가부장적이거나 마초 기질을 보이는 등 기대 이하의 행동을 보이는 일도 있었다. 대개 이런 경우는 평신도가 시중들고 목사나 신학 교수님은 대접받는 것이 익숙해 보였는데 결국 교회가 세상 조직 문화와 다를 바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보면 이 모든 것이 우리 세대의 어쩔 수 없는 한계인지도 모르겠다. 유년기 시절을 돌아보면 명절에 어머니는 나를 등에 업고 누나를 한 손에 잡은 채, 다른 손에는 보자기 짐을 들었던 반면 아버지는 코트에 손을 넣고 유유히 앞서 가던 모습이 가끔 생각난다. 나 또한 집에서는 물 한 방울 손에 묻히지 않는 '귀남이'로 자랐다. 어머니는 세탁기 하나 없이 손빨래를 하다가 급기야 허리 디스크로 쓰러지셨는데, 그제서야 나도 집안일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 동안 나는 왜 집안일을 안 했을까.' 돌이켜 보면 남자가 집안일을 돕는다는 것에 나도 모르게 거부감을 갖게 된 것 같다. 주변에는 꽤나 정치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진보성을 드러내는 이들 가운데 여전히 일상적 '귀남이'들이 많다. 이는 가부장적인 정서로 똘똘 뭉쳐진 우리 세대가, 진보적인 거대 담론의 습득과는 별개로 일상은 제자리 걸음인 경우가 많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3. 기독교 관조주의의 언행 불일치

한때 교회에서 유행했던 용어 중에 '기독교 관조주의'라는 말이 있었다. 이는 기독교 세계관을 공부하던 보수적인 신앙인들 사이에서 회자되던 용어로, '하나님나라'로 대변되는 기독교적 이상(理想)은 세상에서의 어떤 구체적 행동 너머에 있음을 강조하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물론 살면서 관조적인 자세로 한 걸음 물러서서 현상이나 상황들을 면밀히 살펴보고 객관화시킬 필요가 있다. 하지만 관조적 자세가 일상적으로 겪는 많은 일들을 방관하자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당시에 청년들의 입에서조차 이러한 말이 나왔다는 사실에 나는 씁쓸함을 느꼈다. 유감스럽게도 한국교회 대다수의 교인들이 일상적인 삶의 영역에서 득도한 사람처럼 매사에 수수방관하는 경우가 과하게 잦다. 마치 너무 천국의 삶을 동경한 나머지 현세의 희로애락을 무의미하게 느끼는 사람들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이들이 많다는 말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런 부류일수록 일상 영역에서 기성세대의 보수성이나 가부장적 정서와 같은 인습에 얽매인 현실을 부지불식간에 고민 없이 받아들이고 그 상황에 젖어서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이쯤 되면 입에서 내뱉는 말은 하늘 끝에 올라가 있는데 일상적으로 하는 행동을 보면 저질인 언행 사이의 불균형이 생기게 된다. 신앙적으로 보면 이런 언행 불일치는 세속주의적이기도 하고 달리 보면 이원론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4. 거시 영역과 일상 영역의 통합을 위한 글쓰기

어릴 때부터 매사에 약간은 방관적인 기질을 가진 나는 회심을 경험한 이후로 '거시적 영역'에서의 정치와 사회 참여, 사회봉사에 대한 관심을 가짐과 동시에 '일상 영역'에서 익숙하게 여겼던 내 안의 차별 의식이나 가부장적인 정서, 말만 앞세우고 실천을 게을리하는 등의 잘못된 행동을 의식하지 못하는 건 아닌지 자주 스스로를 돌아보곤 한다. 내 오랜 경험상 이 두 영역이 따로 놀아도 큰 고민이나 불편함 없이 살 수 있다는 생각이 자주 드는 이유에서다. 특히 일상 영역은 직장이나 사회생활을 하는 공인의 위치에서는 좀처럼 사람들에게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타인은 고사하고 스스로도 자신의 수준을 인지하지 못하고 살거나 때론 치밀하게 숨기거나 속이면서 살아갈 확률이 높다. 나 또한 살면서 자주 그래 왔던 것 같다. 하지만 그와 정반대로 정치, 사회 문제에 무심해지고 일상에 파묻힌 채 삶의 큰 방향성을 잃어버리는 것 또한 문제이다. 그렇다. 이러한 통합 혹은 균형이라는 것이 말처럼 쉽지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이 두 영역의 통합은 나의 지속적인 고민거리이자 관심거리며 지금은 우리 기독인들이 이 두 영역의 통합에 대해 좀 더 고민해야 할 시기인 것 같다. 또한 이는 앞으로도 내 글쓰기의 주된 화두가 될 것이다. (계속)

2010/04/12 00:13 2010/04/12 0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