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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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결혼하다
아내와 결혼한 지 6년째다. 흥미로운 건 내가 사랑한 한 여성과 결혼 후에 그녀가 '아내'라는 호칭을 얻게 되자, 두 사람이 싱글일 때는 전혀 고민해 보지 않았던 일들을 겪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결혼 후 아내에게 생긴 변화 중 하나는 예전엔 명절 때 자기 집에서 편히 드러누워 음식을 끼고 TV를 보며 지냈는데, 갑자기 남의 집에 옷을 차려 입고 제사 음식까지 만들어 가야 하게 된 것이다. 우리 집안 손자들 중에 내가 첫 결혼이었으므로 제사 때 일을 거들 여자라고는 내 어머니를 포함하여 큰어머니, 작은어머니들 외엔 유일한 며느리인 내 아내뿐이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큰집이나 우리 집이 가부장적인 정서가 비교적 적은 편이라 대부분의 일을 서로 나눠서 했고 설거지도 남편과 함께 할 수 있는 분위기라 육체적으로 힘든 일은 없었지만, 명절에 정작 지방에 있는 아내의 집에는 가지도 못한 채 얼굴도 익숙지 않은 큰아버지 댁에서 노동을 해야 하는 상황이 아내를 심정적으로 우울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결혼한 첫 해에, 자기 부모님에게조차 밥상 한번 변변히 차려 본 적 없는 아내는 얼굴도 모르는 남편 친척들의 명절 음식을 하다가 서러운 마음에 급기야 눈물을 주루룩 흘리고 말았다! 난 가부장적이지 않은 현대 남성이라 여겼지만, 오랫동안 명절 음식 차리기에 지친 우리 집안 어머니들의 일을 덜어 드리는 것을 당연히 여겼고, 그 노동의 일부가 아내에게 넘겨지는 것 또한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아내와의 긴 대화 끝에 나는 이 일이 아내가 나를 선택했다는 이유만으로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은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그래서 제사 음식을 만드는 일은 내가 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명절에 처가에 못 가는 문제는 다행히 우리 집이 신정에 제사를 지내는 터라 구정에는 일순위로 처가에 가기로 했다. 이렇게 이 의무가 남편에게 있음을 명확히 하자 감사하게도 아내는 점점 자발적으로 나를 '도와주게' 되었다.



'아내'라는 이름 아래 생겨난 차별들
명절 문제뿐만이 아니었다. '아내'라는 이름 아래 생겨난 불합리한 상황들은 이후에도 자주 발생했다. 솔직히 나는 내가 알던 것보다 나 자신이 더 꽉 막힌 마초라는 사실을 결혼하고 나서 절절하게 깨달았다. 불합리하게 여겼던 호주제는 다행히 2008년에 없어졌지만, 가사 노동의 분배부터 양가 부모님 용돈 문제까지, 화두가 될 때마다 우린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그때마다 나는 나의 잘못된 생각들을 돌아보게 되었고, 그것을 바로잡아야 함을 깨달았다. 집 청소를 미루던 나의 습관에서부터 아내가 우리 집 대소사를 챙기길 원하는 어머니의 잦은 전화까지. 한국 사회에서 남편으로서 아내가 결혼 후에도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부분이 많았다.

가장 큰 사건은 아내가 임신을 하고 생겼다. 우리 부부에게 새 생명이 생겼다는 기쁨에 하염없이 들떠 지내던 어느 날, 어머니로부터 아버지가 아이의 이름을 지어 놓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도 집안의 '돌림자'를 넣어서 말이다. 그 얘길 들은 아내는 겉으로 보기에도 속상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내는 남편 성을 따라 아이 이름이 정해지는 것도 모자라서 이름 석 자 중에 두 자가 남편 집안의 룰을 따르는 것이 불합리하다고 말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10개월 동안 정성스레 품었다가 해산의 고통 후에도 육아의 대부분을 책임져야 하는 아내 입장에서, 자기 자식의 이름에 자신의 어떤 '의도'도 반영할 수 없다는 사실이 얼마나 속상할지 공감이 되었다. 며칠 동안 잠을 설치며 고민한 끝에 그냥 아내와 둘이서 한글 이름을 지어 주기로 결정했다. 아버지가 부자의 연을 끊겠다고 버럭 화를 내실 일이 눈에 선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아내를 배려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서 이야기를 해야지 하며 마음을 가다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자신이 지은 아이의 이름을 알려 주었는데 다행히도 그 이름을 아내가 마음에 들어 했다. 물론 당시에 무뚝뚝하기만 한 아버지가 아내에게 평소 안 주던 용돈을 주신 것도 한 몫 했던 것 같다.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다행히 결과적으로는 아내가 부자 관계를 악화시키는 것을 막아 준 셈이 되었지만, 나는 이 일을 통해 우리나라의 가부장적인 사회 구조에서 아내의 존재감을 살려 주려면, 미시적인 현장에서 그 구조 속에 얽혀 있는 다른 가족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정도로 상당한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부장적 사회적 굴레를 넘어서

아내와 살면서 나는 우리나라에서 한 남자의 아내가 된다는 것이 매 순간 얼마나 잦은 차별을 경험해야 하는지를 실감했다. 물론 이런 생각의 흐름을 하염없이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결국 앞선 세대에 여성들이, 아내들이, 어머니들이 당한 불합리한 차별들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어머니 세대에는 이 모든 불평등과 불합리함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았던 세대가 아니던가. 내 어머니와 큰어머니, 작은어머니는 우리 집안에 시집왔다는 이유로 아직까지 명절에 처가엔 자주 가지도 못한 채로 음식을 만들었고, 자식들 이름을 남자 집안의 족보에 따라 지었다. 돌이켜 보면 명절에 어머닌 항시 나를 업고 보따리를 들곤 했고, 아버진 두 손을 호주머니에 넣거나 뒷짐을 지고 유유히 담배를 태우시고 먼저 걸음을 하셨던 기억이 난다. 자식과 가정에 대한 어머니 세대의 노동과 헌신은 지금의 내 상식 선에서는 노예 수준의 '그 무엇'이었고. 그것을 어떤 모성애 내지는 여자의 지고지순함 혹은 현모양처라는 표현으로 미화하는 것에 나는 불편함을 느낄 정도다. 이 시대의 할머니와 어머니들은 미시적인 시각으로 볼 때 가부장적인 한국 사회의 최대 피해자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내의 문제는 이전 세대 차별과 불합리함의 악순환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다수의 어머니들이 자신이 당한 고통을 자신의 딸이나 며느리에게 그대로 되갚아 주려는 의도를 가진 것은 아닐 게다. 오히려 자신이 경험한 가부장적 질서에 익숙해진 많은 어머니들은 그 질서는 지키되 그 강도를 약화시키려고 애쓰는 경우가 많다. 흔히들 하는 말로 자신이 며느리에게 시키는 것들은 시어머니에게 받은 것의 반의 반에도 안 된다고 하는 말이 그런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이미 세대가 다른 아내 세대는 부모 세대의 배려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가부장적 질서 자체가 불합리한 데다가 세대 차이가 나는 윗세대의 방식은 여전히 답답하기만 하다. 결국 가부장적 질서의 고착화가, 여성이 도리어 여성을 억압하는 악순환을 만드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우리 세대의 아내들을 보며, 아니 좀 더 구체적으로 나의 아내를 보며, 많은 고민과 대안을 찾고자 여전히 애쓰고 있다. 결혼 연차가 높아질수록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데 '아들'이자 '남편'인 내가 보다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작은 일부터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조금씩 하게 된다. 나의 고민과 대안들이 내 세대에서 세대 간의 악순환을 완전히 끊지는 못하더라도 느슨하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 말이다. 나와 많은 남편들이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거시적인 안목을 가짐에 앞서, 이 두 세대의 여성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서로의 관계성을 변화시키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존재가 되면 좋을 것 같다. 아내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그리고 세상의 모든 가정을 위해서도. 그리고 이런 변화들이 종국에는 가부장적 사회의 부조리를 푸는 아래로부터의 변혁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2010/04/12 00:17 2010/04/12 0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