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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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여성 저자들의 책과 글들을 더 선호하게 되었다. 여러차례 말했듯 나는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게된 후에도 한참동안을 여성 저자들의 글에 별로 호감을 갖질 못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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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에 가장 큰 변화는 남성들 특유의 '가오잡는' 문어체가 인터넷에서 사라지고 나아가 출판계에서도 구어체, 말글이 점차 대세를 이루면서가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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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논문에서나 볼 법한 문어체 글쓰기 스타일이 불과 10-20년 전까지 출판시장 전반을 차지했었다. 글 꽤나 쓰던 사람들은 누구나 입에 익숙하지 않은 문장을 한자까지 병행하여 쓰면서 자신의 가오를 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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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밀히 말해서 가오를 살렸다기 보다는 선택의 여지없이 그렇게 글쓰기를 배웠고 그 흐름대로 룰을 따랐을 뿐이다. 지금은 흔한 강준만식 글쓰기도 당시에는 쉽게 읽히는 잡글이라며 기성 논객들은 그를 폄하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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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흘러 게시판이 글로 범람하고 인터넷 소설이 등장하고 온라인 속 컨텐츠 포화 상태를 경험하면서, 어쩌다보니 오프라인에서조차 부지불식간에 구어체 문장들이 익숙하게 나타나기 시작했고 글쟁이의 판세는 변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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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까지 내가 여성 저자들에게 관심을 갖지 못했던 건, 그 시절 문어체 문장의 룰이 가부장제의 수컷냄새를 내지않는 여성의 입장에서는 종종 어설프게 사용되거나 혹은 그들이 원하는 담론의 형태로 쓰여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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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내에서도 훈계하는 식자층 교회 오빠들의 현란한 글쓰기와 그것을 소비하며 감탄하는 자매층이 있었고, 자매들의 글쓰기는 '가오의 룰'을 갖추지 못한 관계로 폄하되거나 담론과 논쟁의 영역에서 배제되기 일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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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게도 갑자기 2016년의 내 독서편력을 돌아보니 이전에 그렇게 좋아해서 '엄지척'하던 교회 오빠들의 글은 어느새 허세와 자화자찬, 고답적인 스탠스에서 오는 형식적인 측면의 불편함 같은 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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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갑자기 우후죽순처럼 솟아난 '언니들'의 글은 자신의 경험이나 소소한 일상에서부터 시작되어서는 어느덧 무협지스러운 과장없이도 전지구적 거대담론에 이르는, 그러면서도 독해의 불편함 없는 구어체 문장의 매력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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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최근 남성 저자들의 글에서는 이전에는 인지하지 못했던 '정형화된 형식'이 자주 나를 불편하게 만들곤 하는데 몇 가지를 예를 들자면,
- 대가들의 이름과 책을 나열하거나 다른 저자의 글을 인용하면서 자기의 급을 과시하려는 시도
- 본론을 말하기 전에 무협지의 한 장면처럼 서론을 과하게 부풀리는 허세  (일례로 삼국지에서 관우가 나타나기 전에 키는 몇 자에, 그가 쓰는 창이 일반인 키의 세 배인데 수염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식의...)
- 자신이 사용하는 용어가 일반적인 그 용어와는 다르다는 기나긴 설명.
- 이 얘기가 중요하다는 점을 각인시키기 위해 이 사람도 이 얘기를 하고 저 사람도 하더라는 설명으로 책의 절반을 소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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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요즘은 책 한권을 털어내면, '이 얘기를 하나 전달하려고 이렇게 많은 말을 했나'하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많다. 물론 아닌 경우도 있지만 요즘은 점점 TED 15분짜리 아이디어를 400쪽에 담으려는 분들이 눈에 많이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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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한 이야기인 거 같나. 서점에 가서 여성이 쓴 책과 남성이 쓴 책을 대충 읽어보시라. 예전엔 난해하게 써서 잘 드러나지 않았다면 지금은 구어체로 여전히 수컷의 가오를 잡는 이들이 많아서 그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을거다. 아마 몇몇 책들은 읽다보면 축지법이 필요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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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룰이 바뀌었다. 고로, 여성 저자들의 약진을 앞으로도 기대하는 바다.
2016/06/12 15:19 2016/06/12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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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TI, MMPI, 에니어그램을 공부하고 
최근에 강헌 선생 덕분에 명리학을 '독학'(?)하면서 느낀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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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마음을 마치 서양의학과 한의학처럼 겉마음과 속마음으로 나눈다면 
MBTI와 MMPI는 겉마음을 다루는 외과적인 접근을 취하고
에니어그램과 명리학은 속마음을 다루는 내과적 접근을 취하는 것 같다.
일례로,
MBTI나 MMPI가 자신이 외적으로 반응하는 마음을 정리, 분류하여 
개별 인간의 성향을 규정한다면,
에니어그램과 명리학은 좀더 근본적인 영역의 마음의 동기를 파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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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다루는 이 도구들은 모두 특정 이론을 근거하여
임상적인 과정을 거쳐서 통용되어 왔는데
MBTI는 융의 심리적 유형론(1921)에서 정리된 개념에 토대를 두었고,
에니어그램은 고대 중동에서부터 전해 내려온 '지혜'에 근거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상 20세기에 들어서부터 점차 활성화되었다.
에니어그램은 머리, 가슴, 장형으로부터 9가지의 유형을 분류한다.
개인적으로는 에니어그램을 인간의 원초적 죄성(욕망)에 의한 분류체계로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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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사주팔자로 알려진 '명리'는 중국의 당나라 이후에 체계화된
동양의 음양오행을 가지고 인간을 분류하고 이해하려는 학문이다.
오행은 세상의 질료인 나무, 불, 물, 쇠, 흙의 기운으로 분류되며
열개의 천간과 열두개의 지지를 조합하여 사람의 마음과 길흉화복을 진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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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 삽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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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리의 흥미로운 지점은 오랜 임상에 의해 정립된 통계적 구조이다.
사실상 동서양을 막론하고 심리를 다루는 도구는 어떤 가설과 이론에 근거한다.
프로이트는 자아, 초자아, 이드라는 개념의 토대위에서,
칼 융은 융 나름의 심리 유형을 가지고, 
에니어그램은 머리, 가슴, 내장을 형상화하여 
오랜 임상의 축적을 통해 이론을 체계화한 것처럼,
명리 또한 그 오랜 시간의 임상의 무게를 통해 음양오행이라는 동양적 전제로
인간의 내적인 영역을 풀어냈다는 점이다.
쉽게 말하자면 이 모든 각각의 개념들은 
보이지 않는 것(마음)을 형상화한 나름의 접근 방법인 셈이다. 

그런 연유로 입문자 입장에서 보기에도
명리는 내 기대보다 훨씬 정교했다.
(사주에 대한 안 좋은 경험이 많고 한자울렁증이 있어서 
사실 처음에는 명리 자체에 부정적이었지만.-_-)
널리 알려진 MBTI, MMPI 등은 20세기 이후에 나온 것들로 
사실 임상적으로는 상당히 더딘 축에 속한다고 평가한다면,
명리학은 이런 서양의 도구들보다 임상적으로도 훨씬 강건하며
아직 그다지 깊이 들어가지 않은 상황에서조차 
나를 이해하는데 더 강력하게 도움을 주는 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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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건 우리가 익히 아는 '신살'에 혹하거나 
혹은 결혼 시기를 짐작하거나 복권을 사거나 
부적이나 작명을 통해 오행의 부족함을 채운다거나 
흉한 기운을 내보낸다는 접근과는 별개의 이야기이다. 
그저 인간의 심리, 마음을 이해하는 여러 도구 중에 하나로
곰곰이 살펴보면 나에 대한 생각보다 많은 통찰들을 얻게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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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3-40일 가량 겉핥기를 해본 소감은 여기서 접고,
'만인의 위한 명리학'을 시도한, 강헌 선생님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2016/06/11 00:29 2016/06/11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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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북을 하고 몇 년이 지나서였던 것 같다. 댓글로 의견을 주고 받다가 논쟁이 벌어졌다. 좀 심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서로 이쯤에서 그만두자고 한발씩 물러서고 대화를 마쳤다. 앙금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그는 바로 직후에 자기 담벼락에 나를 공격했던 논조의 글을 올렸다. 그 이후 나는 그분과는 소원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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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나는 텍스트비판을 즐겼다. 진보 기독교권에서 처음 쓴 글도 반론글이고 게시판에서 논쟁도 자주했다. 타인의 글을 인용하여 재배치(해체)한 후, 그 글의 모순을 되돌려주는 작업은 흥미진진했다. 복학후부터 대학원 졸업시기까지. 나는 많은 책들, 타인의 필력 높은 글들을 읽고 지식과 논리를 쌓고, 타인과 논쟁하는 과정 자체를 즐겼다. 잃은 사람도 많았지만 관계가 깊어지는 경험도 했고 무엇보다 소소하게나마 내 글의 인지도가 높아지는 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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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면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논리적으로 빈틈이 없는 글, 타인의 엉성한 텍스트를 파고드는 날카로운 글을 쓰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 과정이 불필요했다거나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내 글과 내가 부유하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대기업에 취업을 하고는 내가 비판하는 칼날이 어디를 향한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결혼을 하고나서는 여성문제에 있어서 더 탄탄하게 말할 수 있는 논지를 내뱉는데 주저함이 생겼다. 발화자와 발화내용의 부조화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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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면서 글과 말, 논리, 논지, 객관성, 탁월함. 이런 것들에 대한 회의감도 생겼다. 논리가 엉성한 사람을 무안하게 만들 수 있었지만 그가 나보다 훨씬 나은 삶의 내용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자주 겪었다. 내 글의 높은 경지를 추구하기보다는 내 글과 내 삶의 적절한 조화가 더 중요해졌다. 거품빼기랄까. 나는 더 어리버리하게 말하고 글을 허술하게 쓰는 것을 의도하는 경우가 생겼다. 의도적으로 방어적으로 논지를 숨기기보다는 내 인간적인 편견을 드러내려고 애를 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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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모든 과정이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아내가 옆에서 자주 내 모습을 지적질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나는 내 글과 내 삶의 간격을 줄이려고 애쓰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누구나 자기를 변호하고 포장하고 보여주고 싶은 부분만을 보여준다. 나도 여전히 그렇다. 굳이 내 입으로 빈틈을 보여주려고 애쓰는 건, 솔직히 마음이 내키는 일이거나 즐거운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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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 페북을 활용하는 의도는 다르겠지만. 나는 페북을 일종의 놀이터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좋아요'를 대놓고 누르기를 유도하고, '싫어요'는 없는 플랫폼 자체가 긍정적인 피드백을 의도한 반면 부정의 피드백은 더 큰 반감을 유발한다고 느꼈다. 이런 구조에서는 자신의 글을 좋아해서 공유하기를 바라지, 누군가의 담벼락에 칼질의 대상으로 언급되기를 원하지는 않게 된다. 물론 그렇게 페북을 사용하는 이들도 많지만 '나는' 별로 좋아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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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북을 하면서 글을 잘 쓰는 이들을 자주 목격했고 나는 컨텐츠가 좋은 이들과 페친을 맺는 것을 즐겼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타인의 글을 비판하기 위해 공유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고 나는 결국 그런 사람들과는 온라인 관계를 지속할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왜냐하면 언젠가 내 글도 그들의 논리에 맞게 칼질이 되어 그들의 담벼락에 올라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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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쓸 때 나는 누군가 내 글을 공유하더라도 그와 나 사이에 공유된 페친에게만 그 글이 보이도록 설정해두었다. 페북은 내 페친이 내 글을 공유하면 그 친구의 친구들에게도 내 글을 읽는 것을 허용하기 때문에 몇몇 글들은 설정 자체를 그렇게 묶어뒀다. 그와 별개로, 의도한 건 아니지만 감사하게도 내 페친들도 내 글을 자신의 비판 논지를 펴기 위해 인용하지는 않았고 공유할 때에도 내게 의사를 물었다. 페북의 시스템은 그럴 필요없이 페북을 사용하도록 기능이 구성되어 있으므로 굳이 내게 그럴 필요는 없지만 난 그런 페친들에게 안정감 이상의 어떤 연대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건 마치 비행기나 버스에서 좌석을 뒤로 충분히 젖힐 수 있지만 뒷사람을 고려해서 자제하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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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페친들에게만 공유하는 글들의 다수는 페북이라는 '내 놀이터' 공간에서 친구들과 공유하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내가 글의 완벽함을 추구하기보다 내가 체화하고 행동할 수 있는 수준의 글만을 주변 사람들과 공유하려고 한다. 물론 여전히 논리적으로 완벽한 글을 쓰고 싶다. 하지만 그건 매체 기고글이나 논문, 보고서에서 보여주고 싶을 뿐.(기고글로 욕먹는 것에 불만은 없다.ㅜㅜ) 페북을 공적 언로로 생각하거나 때때로 선교의 도구로 활용하는 목사님들도 계시지만 이곳에서 나는, 그저 편견도 있고 빈틈도 많은 김용주라는 한 인간을 이해받고 싶은 정도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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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페친 중 한분이 나의 편견을 지적하며 내 글을 자기 담벼락에 공유했다. 사실 그분의 페북 스타일을 볼 때 언젠가 내 글도 저 담벼락에 비난의 대상으로 걸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오늘이 됐다. 결국 나는 불편하다고 말했다. 그 분은 미리 글을 쓸 때 제한하고 싶은 부분을 말을 하는 게 좋지 않냐고 말하고 불편하다면 글을 지우겠다고 했다. 반나절 정도 오늘 일을 생각했다. 언젠가부터 페북에 쓰는 내 글은 반복적인 것 같지만, 다시 남겨본다. 페북에서의 김용주 사용설명서 정도라고 받아들이시면 된다.


2016. 6. 5. 페이스북에서.
2016/06/06 20:11 2016/06/06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