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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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슨, 메갈리아, 정의당, 레진코믹스.
연이어 이슈들이 진행되고 있는 듯.
이 시점에서 논리를 말로 잘 풀어내지 못하면
누군가에겐 혐오의 대상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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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자에게 왕자가 필요없다는 문구에 동의한다. 
또한, "만약 80년대에 어떤 정당이 '전대협을 지지한다'거나, 
90년대 야당이 '한총련을 지지한다'고 했다면 
"대학교를 불태우고 경찰을 때린 게 잘했다는 거냐", 
"집회 쓰레기는 너희가 치워라" 등등의 온갖 비난에 시달렸을 것이다."
라는 기사의 논조에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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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모든 불평등에 대한 저항들은 항상 기득권자들의 
엄중한 룰에 의해 가차없이 비판의 대상으로 전락하곤 했다. 
메갈리아를 향한 엄중한 잣대는 어떤 면에서는
그 잣대를 들이대는 세력이 '진보적'이었던 게 아니라 그저
현재의 '비'기득권일 뿐임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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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말을 아껴야 한다.
왜냐하면 정작 말 몇 마디 때문에 혐오를 일삼는 사람들을
싫어하고 미워하게 될 것 같아서다.
솔직히 나는 생각의 다름이 나아가 입장의 다름을 만들고
나와 너의 구획을 긋는 것으로 귀결되는 모든 방향, 지향에서 멀어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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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중 상당수는 설령 생각이 다르더라도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고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고
머리를 쓰다듬고 어깨동무를 하고 비싸지 않은 골목 맛집에서라도
얼굴을 맞대고 숟가락을 들고 싶어 한다.
우리 중 상당수는 나와 다른 누군가에게 헌신하고, 아이를 낳고, 
그 아이들과 손을 잡고 깔깔거리며 동네의 구석구석을 걷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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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우리 중 몇몇은 생각을 넘어 다수와 취향과 삶의 방식이 다르더라도
그들과 공존하고 사랑을 받으며 함께 어울려서 각자의 고유한 색깔대로
지지를 받으며 그 방식이 다수의, 기득권의, 익숙한 무엇이 아니더라도
주변과 함께 일상을 나누고 싶어한다. 
나또한 그렇게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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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이 모든 것들이 매순간의 이슈마다 각자의 생각으로 구획을 나누고 
그 생각의 '진영'에 서서 상대에게 혐오의 '말들'을 쏟아내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단일 민족이라 굳게 믿는 우리는 비슷한 겉모습으로는 알아볼 수 없는
사상 검증을 점점더 타인의 '말'을 통해 확인하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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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써 어떤 사람의 됨됨이를 규정짓는 것에 점점 회의적이 되어가는 나는.
말을 아껴야한다. 앞으로는...
2016/07/28 23:18 2016/07/28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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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컨텐츠/영화평
아마도 다수의 남성들은 이 영화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좀더 깊이있게 말한다면 다수의 남성들은 이 영화가 함의하는 변화의 조짐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영화를 보는동안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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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레알 여성이 아니므로 페미니즘을 관찰자의 눈으로 읽는다. 지적인 영역에서 분석하고 그 패러다임에 놀라움을 표하고 그저 변화의 코드들을 주워다 읽을 뿐이다. 그렇기에 어떤 면에서 나는 사이비로서는 꽤 성실한 관찰자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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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은 없다>를 봤다. (이제부턴 스포일러 모드)
일단 놀란 것은 그간 어떤 의미에서건 '아름다움을 연기'하던 손예진이란 배우의 정형화된 연기 패턴이 깨졌다는 사실이었다. 손예진의 연기를 보면서 이 영화의 감독은 절대 남성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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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선거와 딸의 행방불명. 
이 두 사건을 풀어가는 영화의 내러티브의 시작은 다분히 남성적이다. 아내의 내조 속에 권력의 치밀한 조작과 거래들이 남발하고 딸의 행방불명은 객관적 단서를 찾는 경찰과 선거라는 큰 그림 속에서 상대진영의 행동을 의심하는 거대한 비밀, 음모가 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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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주검이 되어 돌아온다. 
아내는 갑자기 실성한 듯 이상한 이름과 이상한 전화번호로 경찰을 헷갈리게 만들고 선거 중인 남편의 캠프 사람들을 힘들게 만든다. 가는 곳마다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무례하게 군다. 
역시 냉정함을 잃지 않는 남성 중심적인 사고와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남자들의 사회가 이 문제를 정리할 것이다. (해결은 못하더라도 적어도 사건 '정리'는 할 것이다) 그러니 딸이 걱정은 되겠지만 아줌마는 그저 기다리며 안정을 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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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녀의 이상한 행동들은 이내 실타래에 구슬을 꿰듯, 어려운 퍼즐이 그 윤곽을 드러내듯, 사건을 재해석해내고 연관성을 찾아간다. 다음단계와 그 다음단계로 넘어가는 추리과정은 남자들의 세계, 그 투박한 상황 판단과 정리로는 담을 수 없는 미세한 끈을 따라 집요하게 파고든다. 아이의 노트, 노랫말, 인터넷 메일, 친한 친구,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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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미치지 않았다. 
그녀의 행동들은 세상에 무례한 모습이 되었지만 내면은 그 어느 때보다 집중을 하고 관계의 복잡한 실타래를 풀고 자신의 위선과 싸운다.
엄마는 그간 자신이 생각하던 아이의 모습이 진짜가 아닐 수 있다는 인식과 더불어 아이에 대한 신뢰 사이에서의 자신의 편견과 감정을 끊임없이 걷어낸다. 다른 (남자) 사람들은 그 아이의 행실, 의도, 그간의 일탈 횟수를 통해 객관적, 통계적인 추론에 이르고 섣불리 윤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과 대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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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은 흘러흘러 비밀에 다다른다. 
이 영화의 클라이막스는 남편의 불륜이라는 '비밀'의 허망함에 있었다. 거대한 정치판에서의 암투와 그 사이에 발생한 아이의 죽음, 그것을 둘러싼 상대진영에 대한 의심, 그 와중에도 아이의 실종과 죽음을 놓고 펼쳐지는 언론플레이. 판세의 역전...그런 거대한 이야기, 남자들의 거친 암투 때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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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남자들의 가벼움, 남자 세계의 시시함이랄까. 
아이가 죽어도 영영 찾아내지 못하는 '냉철하고', '논리적인' 남자들, 그나마 착하고 멀쩡해보이는 이 남자가 결국 자기 불륜 따위를 막겠다가 사람을 사서 자기 딸을 죽인 결말이 드러난다.
그 과정을 광기어린 침착함으로, 혹은 과열된 집요함으로 엄마이자 아내는 묵묵히 사건을 해석하고 풀어내고, 마지막으로 심판한다. 그것도 남자들의 세계에서 보여지는 피끓는 복수가 아닌 합리적인 댓가를 선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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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페미니즘 '관찰자'로서 본 이 영화의 뛰어남이다. 나는 그렇게 봤다.
2016/07/16 11:42 2016/07/16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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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컨텐츠/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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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회 오빠 비와이에 대한 교회 진보 아재들의 우려가 많다.
가사에 비춰진 기독교적인 요소들이 걱정스러운 듯
도리어 교회오빠 비와이가 추구하는 힙합의 세속화를 권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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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면 공감하는 부분이 없지 않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런 생각 자체가 좀 낡았다는 느낌...
그가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만들어감에 있어서 기독교적 요소를
차용했을 때 그 메시지를 형식에서 구별하려는 욕망이 
여전히 교회 아재들에게는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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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CCM은 세속 음악에 기독교적 메시지를 얹어서 전달하는 
방식으로 음악을 구현해왔다. 
그런 경험으로 음악을 이해하는 교회 아재들은 
이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음을 받아들여야 할 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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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와이의 랩 퍼포먼스에서 메시지를 세속화시키면
퍼포먼스 자체의 아우라가 사라진다. 
이른바, 미디어가 메시지인 셈이다.
낡은 틀로 새 포도주를 담으려 하지 말라. 
우리가 가진 생각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 시대는 가고 있다.


#2.
비와이. 기독교세계관 랩을 개척한건가.^^
그냥 몇가지 생각이 들어서 끄적이자면.
비와이 나이에 나는 어떤 생각을 했나 돌아보면
그의 가사에서 오는 기독교적 오글거림은 받아들일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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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나는 비와이를 지저스웨거로 부르면서
문화선교의 첨병으로서의 기대감을 비추는 교계 분위기에는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
단순히 '기독교적인 컨텐츠'가 대중문화의 한 영역으로 
무리없이 자리잡는 부분에 있어서는 CCM을 넘어선 또다른
분위기가 감지되어 긍정적인 평가를 할 수는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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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들이 힙합씬에서 기독교적 메시지를 통해
힙합씬 자체에 자기들이 말하는 선한 영향력을 끼치겠다,
끼칠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방식은 단적으로 말해 
기독교 담론을 문화영역의 메타담론으로 치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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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적으로 본다면 메타담론으로서의 기독교 컨텐츠는
결국 비기독교 컨텐츠를 대립, 정복, 변혁의 대상으로 본다.
그럴 경우, 
각각의 로컬담론으로서의 컨텐츠는 신의 반대영역으로 설정되고
결국 신의 창조물 자체에 대한 반대, 정죄가 이뤄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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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끝은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은 비와이 만을 지지하는 자로
제한되고 그 하나님은 힙합씬과 대적하는 신으로 전락한다.
아마도 이 논리적 흐름이 지저스웨거 지지자들의 결말이 될 것이다.
2016/07/16 11:38 2016/07/16 11: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