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
/ 다니엘 튜더
나는 자주 내가 꽤나 자기성찰적이고 객관적이라고 믿는 부류 중 하나다.
그런데 한국에 매료되어 한국을 깊이 경험한 젊은 영국 기자의 이 책을 읽으며 참 많은 생각을 했다. 처음엔 그 깊이에 놀라기만 했지만 천천히 저자의 책을 읽으면서 나를 자극하는 어떤 한국인 특유의 정서를 깨달았다. 인지하지 못하던 한국인 특유의 행동양식,사고방식. 이건 마치 심리검사지를 통해 나에 대해 객관적으로 돌아보게 되는 경험과 유사했다. 밑줄을 그은 본문이 하도 많아 고민하다가 정리를 해두기로 마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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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조정의 파벌 중 일각에서는 중국에 도움을 청했다. 동학농민군을 막을 만한 힘이 조선 조정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청나라에서 보낸 3천 명의 군인을 동원해 동학농민군의 북상을 막고 휴전을 위한 협상을 벌이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중국의 개입은 추후 조선을 병합하고자 영향력을 넓혀가던 일본을 자극하고 말았다. 일본은 그 앙갚음으로 8천명 규모의 군대를 조선에 보내 궁궐을 포위하고 정부 고위 관료들을 친청파에서 친일파로 전부 교체했다. 중국과 일본이 조선을 놓고 벌이던 힘겨루기는 1984년에서 1985년까지 진행된 1차 청일전쟁의 주요 이유 중 하나였다.
4월 19일 학생들은 고려대학교에서 경무대까지 행진했다. 군인들의 발포로 2백 명 가량이 죽었다. 그로 인해 시위대의 행렬은 더욱 불어나 마침내 4월 25일에는 경찰과 군이 시위대를 향한 발포를 거부하기에 이른다. 이승만은 하와이로 도망쳐 5년 후 그 곳에서 사망했다.
한국에서 극좌로 간주되곤 하는 정치집단은 일반적으로 다른 나라에서는 극우의 요소로 평가되는 민족주의적인 색채를 강하게 띠기 때문에 외국에서 온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기 일쑤다. 친미적이고 반복적인 성향 외에도 이승만, 박정희 정권은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에 협력했던 이들에게 관용적인 입장을 취하곤 했기에 많은 사람들을 분노케 했다. 이승만은 일제강점기에 치안을 담당했던 친일 협력자들을 대거 받아들여 같은 일을 시키고 예전과 비슷한 직급을 유지하게 해주었다. 1965년, 박정희가 일본으로부터 소프트론 및 차관 형식으로 미화 8백만 달러를 받는 대가로 추진한 한일국교정상화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있다. 심지어 훗날 대통령이 된 당시 20대 초반의 이명박 또한 한일국교정상화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도했다가 3개월간 투옥되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친미적 성향과 친일 잔재에 맞서고자, 한국의 좌파 세력은 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정치사상을 발전시키게 되었다. 좌파는 '민족'과 같은 단어를 적극적으로 차용했고 심지어 한 좌파 성향의 신문은 그 이름이 '민족일보'였다. 오늘날의 주요 좌파 언론인 한겨레는 '하나의 민족', 혹은 '하나의 인민들'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반대로 우파는 '국가'라는 단어를 지지했는데 그것은 한반도의 나머지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같은 민족을 배제한 한국만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유교는 교육을 통한 성공과 안정된 가정을 꾸리는 것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한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남들에게 밀리지 않을 만한 최소한의 기준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최소한의 기준이라는 것이 한국인에게는 언제나 달성할 수 없는 목표처럼 보인다.
한국에서는 직업을 구할 때, 이력서에 여권 사진을 붙이는 것이 관례화되어 있다. 이런 관행 때문에 특히 여성 지원자를 뽑는 경우, 입사 서류 심사는 일종의 미인 대회로 둔갑해버리기도 한다. 성형수술이 하도 성행하다보니, 마치 출전한 선수 절반이 스테로이드를 복용하고 단거리 달리기를 하는 것처럼, 본인이 내키지 않아도 수술을 해야 할 것만 같은 부담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이 모든 것이 한국에서의 삶을 스트레스로 가득 채운다. 한국의 자살률이 높은 원인이 바로 이 과잉 경쟁 때문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자녀가 더 행복하고 균형잡힌 삶을 살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은 다 똑같은 것이다.
한국어에는 '촌스럽다'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뭔가가 구식이고 조잡해보일 때 쓰는 말이다. 머리 모양, 옷, 가수, 심지어 사람의 이름마저 촌스럽다는 지적을 받아 조롱거리나 놀림감이 될 수 있다. 급속한 경제 발전을 거치는 과정에서 시골에 속한 것들은 서울의 새것과 반대돠는 것, 뒤처지고 낡은 것, 갈아치워야 할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교외 지역과 '오래된 것'이 완벽히 동일한 것처럼 취급된다는 것은, 도시의 화려한 생활방식과 도시화가 사람들에게 끼친 전면적인 영향력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2010년대 들어 홍익대학교 근처의 '곱창전골'처럼 1960, 70년대의 낡은 음악을 틀어주고는 술집들도 유행하기 시작했다. 역설적인 것은 이러한 복고풍마저 결국은 문화적 엘리트들이 즐기는 첨단 유행이라는 것이다.
정치영역에서도 한국인들은 비슷한 변덕을 부리는데 이 경우에는 앞에서 언급한 경우보다 우려의 목소리가 한층 높아지곤 한다. 추문에 휩싸인 정치인은 잠시 경멸을 당하지만, 운이 좋으면 대중이 곧 그 사건과 그의 비행을 잊어버리게 되고, 훗날 그는 복귀할 가능성이 열린다. 이런 현상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는 표현으로 '냄비근성'이란 말이 있다. 이는 냄비처럼 빨리 끓어올랐다 금새 식어버리는 그래서 모든 일에 금방 분노하고 또 금방 잊어버리는 사람들을 묘사하는 말이다.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은 막판 인터넷 여론몰이로 승리를 거뒀지만 그의 지지자들 중 상당수가 임기 초반에 썰물처럼 빠져나가 버렸다. 그러자 노무현의 반대 세력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헌법에 규정된 대통령의 정치적 중립 의무를 근거로 삼아, 노무현이 총선에 개입했다고 주장하며 그를 탄핵하고자 했다. 이에 밪발해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왔고, 대통령의 지지도는 극적으로 다시올라갔다. 하지만 이후 노무현의 지지율은 다시 떨어졌다. 여기서 핵심은 노무현이 좋은 대통령이었는지 여부가 아니라, 대중이 그만큼 유동적이라는 것이다. 수많은 이들이 노무현을 좋게 봤다가, 나쁘게 봤다가, 좋게 봤다가, 다시 나쁘게 봤다. 그리고 2012년 노무현은 박정희 다음으로 한국에서 두번째로 인기 있는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기업은 노동자들에게 회사를 가족처럼 여기라고 했지만, 한국에서는 일본에서와 같은 진정한 평생직장의 개념이 성립된 바 없다. 이 직장 저 직장 오가는 서구권 노동자와 달리 한국 노동자에게는 고용주에 대한 충성이 요구됐지만, 노동자들은 50대가 되면 은퇴할 것을 강요받는 처지가 되었고, 따라서 그들의 충성심은 제대로 된 보상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정부는 항상 포장마차와 길거리 음식점들을 억누르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특히 올림픽, 월드컵, G20 정상회담 등 국제적인 행사가 열릴 때는 그 노력을 두 배로 늘려 숫제 이들을 없애버리겠다는 식으로 달려든다. 관료들은 이런 대중 음식점들이 한국을 찾아온 외국인들에게 후진적인 것처럼 보여서 나쁜 인상을 줄 거라는 잘못된 생각을 품고 있다. 그들은 대신 정제된, 따라서 지루할 수 밖에 없는 한국의 모습, 즉 경복궁과 김치와 전통 춤 같은 걸로 꽉 채운 모습을 보여주면 외국인 관광객들이 한국에 매력을 느낄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하지만 이런 식의 접근 방식은 실패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 예컨대 가까운 중국을 놓고 봤을 때, 솔직히 규모로만 따지면 한국의 어떤 유물도 자금성 하나를 압도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포장마차 같은 것을 억누르는 대신 다른 곳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한국만의 무언가를 홍보한다면 한국을 좀더 잘 알릴 수 있을 것이다.
1997년 들어 재벌들은 영화판에서 흥미를 잃어버렸다. 삼성과 대우는 영화 제작에서 손을 뗐는데...재벌이 빠져나간 자리를 채운 것은 벤처 투자자들로 그들은 소극적 투자를 하면서 가급적 간섭하지 않고 재능있는 감독들이 활약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경제위기에서 벗어나던 찰나, 투자자들은 완벽한 시기를 잡아 혜택을 누린 것이다. 경제위기가 해소되면서 인터넷 중심의 벤처 열풍이 불었고 정부가 좀더 작은 규모의 기업들을 육성하고자 지원에 나서면서 한국 경제에는 이지머니가 홍수를 이루게 되었다.
오늘날 발라드 가수들은 대부분 기술적으로 완전무결하게 훈련받은 이들인데, 사람들의 눈물샘을 제대로 자극할 수 있도록 과도한 감정이 실린 소몰이 창법을 구사한다는 비판도 받는다.
앞서 언급한 두 정신과 의사에 따르면 '정'은 개인의 가슴이나 머리가 아닌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감정이기 때문에 정은 '우리'에 대한 강한 의식을 필요로 하지만 다른 문화에서는 그런 것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두 의사는 또 "한국인들에게 '우리'는 단순한 복수형 대명사가 아니다. 그보다 '우리'는 집단화된 '나'에 가깝다"고 말했다. 한국인들은 자신과 가까운 사람에 대해 말할 때, 그들을 '나의' 누군가가 아니라 '우리'의 누군가 라고 표현한다. '내 엄마'는 '우리 엄마'가 된다.
어떤 사람들은 정이 사랑이나 우정과 다를 게 뭐냐고 할 것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맞는 지적이지만, 사랑이나 우정과 달리 정은 지역 단위나 조직, 혹은 사회적 차원과 같이 큰 집단의 구성원 사이에서도 느낄 수 있다. 같은 고향 사람, 같은 부대 병사, 같은 학교 동문들은 정에 기반한 실질적 상호 부조 및 책임을 느낄 수 있다. 대학 동문회나 교회처럼 사람들을 결집시키는 집단은 가시적인 영향력을 확장해나갈 수도 있다.
한국에서 사업은 곧 개인적인 일이다. 장차 함께 일할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상대방이 "종교가 어떻게 되세요?"나 "왜 결혼 안 하셨어요"같은 질문을 던져도 놀라지 말아야 한다. 한국에서는 단기적인 주고받기가 아니라 장기간에 걸친 관계 형성에 능해야 사업에 성공한다. 그러므로 인간적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서구인들에게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수준보다 훨씬 더 많은 개인 정보를 교환해야 한다. 이제 막 같이 일하게 된 사이에서 상대방이 지나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다소 껄끄러운 일이지만, 열린 마음으로 호응하는 사람에게는 장기적인 사업상의 이익뿐 아니라 진솔한 우정이라는 보상이 돌아오게 되어 있다. 오랫동안 비즈니스 컨설턴트로 일해온 미국 이민 4세대 피터 언더우드의 말에 따르면 한국에서 사업을 한다는 건 "일단 믿고 봐야" 하는 일이다.
명예란 이토록 중요한 것이므로 거래 상대방인 한국 기업이나 그곳 직원을 동료들 앞에서 비판할 일이 있으면 대단히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일단 개인적으로 만나서 이야기해보고,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 마지막 극약처방으로 공개적인 비판을 개진해야 하는 것이다. 공개적인 장소에서 내뱉는 거친 말은 어떠한 종류의 관계에든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SKY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한국의 사회적 사다리 중 가장 꼭대기에 올라앉아 있다. 한국 엘리트 대학에서 교수를 하는 사람들은 수월하게 정치계, 재계에 진출하기도 하고, 자신이 비판하는 분야에 대한 전문적 지식 보유 여부와 무관하게 언론 지면에 오르내리는 공공 지식인의 역할도 맡을 수 있다. 그 결과 교수라는 직함은 액면가보다 휠씬 값어치가 높아지며, 정교수 자리를 얻기 위해 수천만 원 이상의 뇌물이 오간다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들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