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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상황]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소고②: 변화와 반론(1)

 

 

기독교 세계관‘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기독교 세계관 논의에 중요한 변화가 생겼다. 기독교 세계관의 저자들과 담론 생산자들 중 다수가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수정·반성·비판적인 시각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2003년에 있었던 ‘기독교 세계관 포럼’을 통해 교계에 퍼지기 시작했고 이후 복음주의권의 젊은 필진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기고 글과 논쟁 글들, 그리고 주요 기독교 세계관 저자들의 저서를 통해 더욱 일반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기독교 세계관의 비판적 논의에는 크게 두 가지 전제가 깔려 있는데 하나는 기독교 세계관이 모더니즘적인 토대에서 생성, 발전된 담론이기 때문에 포스트모던 시대로 접어든 현대에 와서는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적 요소를 고스란히 가진다는 점이며, 또 다른 전제는 그간 알려진 기독교 세계관이 기독교적으로 세상을 인식하는 유일한 잣대가 아니라 여러 잣대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관점이다. 후자의 경우에는 그간에 통용되어온 기독교 세계관이 개혁주의적인 입장에서 쓰인 하나의 견해에 불과하므로 구체적으로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이라 불러야 한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번 글에서는 전자의 문제, 포스트모던적 상황화(context)를 중심으로 다루려고 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이성과 합리성의 한계

기독교 세계관은 모더니즘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기독교 세계관이 모더니즘의 공격에 방어 내지는 대항하기 위한 신학적 결과물이라는 소극적인 면뿐 아니라 모더니즘적인 전제와 방법들을 상당 부분 받아들였다는 비판적 시각도 포함된다. 이른바 포스트모던 사회가 도래한 것이다. 이제 모더니즘적인 전제들은 허물어졌고 모더니즘적인 요소들은 모두가 수정 내지 극복의 대상이 되었다. 여기에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기는 어렵겠지만 이후 논의를 위해 간략하게나마 언급이 필요할 듯하다. 모더니즘의 세 축은 과학과 경험, 그리고 합리성으로 대변되는데 이러한 계몽주의적인 전제들은 학문에 있어 객관적인 잣대, 절대 진리의 추구, 역사 진보에 대한 확신을 가져다주었으며 이들의 근저에는 서구인들의 서구중심주의적인 자신감이 그 사상적 배경으로 깔려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양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진보, 계몽, 이성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를 잃게 되었고, 학문적 영역에서 사이비(pseudo) 학문처럼 보이는 형이상학, 신학과 같은 것들을 학문의 구획(demarcation)에서 제거하려는 노력들이 오히려 수포로 돌아감에 따라 과학과 같이 객관적 진리 영역으로 치부되던 학문과 사상들도 더 이상 절대적 기준이 없다는 생각이 만연하게 되었다. 그 결과 진리는 상대적인 것으로 치부되었고 ‘주체’는 죽음을 맞이했으며 모든 것은 사실, 진리의 영역이 아닌 ‘해석’의 영역으로 변화했다. 또한 서구중심적이었던 서양인들은 자문화 우월주의적인 생각으로 제3세계에 제국주의적인 침략과 교화를 일삼았음을 반성하고 다원주의적인 관점에서 동양의 사상과 문화를 흡수하게 된다.

교계에서 때때로 사단의 사상으로 치부되기도 했던 포스트모더니즘은 사실상 이러한 모더니즘적 한계에 대한 비판과 성찰, 완성 혹은 극복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하며 포스트모더니즘의 반기독교적 요소는 기독교가 제국주의적인 ‘서구 종교’라는 관점으로 이해할 여지가 있다. 또한 절대 진리를 부정하는 풍토 역시 단순히 초월적인 기독교의 신 존재를 반대한다는 관점을 넘어 그간에 이루어진 이성중심주의의 타파, 거대담론의 해체, 자율적이며 절대적 판단자로서의 이성의 한계 인식, '주체'의 죽음과 같은 모더니즘적 배경 속에서 접근해야 한다. 물론 기독교 자체에 대한 비판적 시각, 진리에 대한 극단적인 상대주의, 다원주의적 관점은 우리가 경계해야 할 요소임이 분명하지만 이러한 접근은 모더니즘과 계몽주의의 극복이라는 측면에서 충분히 타당한 면이 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도 충분히 이해하고 섭렵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연유로 모더니즘적인-이성적, 합리적인 방식으로―변증을 시도하는 기독교 세계관이 지나치게 '모더니즘의 옷'을 걸치고 있다는 비판은 포스트모던 시대의 도래와 함께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그렇다면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잣대로 바라보는 기독교 세계관은 어떨까. 간단히 말해, 포스트모던적 상황(context)은 비판적으로 수용할 부분이 분명히 존재하므로 포스트모던적 전제로 기독교 세계관을 면밀히 따져보는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러한 틀로 기존의 기독교 세계관 자체를 폐기 처분하려는 시도에는 동의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기독교 세계관의 명제성과 메타내러티브, 구조-방향 모델에 대한 비판들이 있어왔으므로 세 가지 비판을 좀더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명제 vs. 내러티브
첫째는, 명제적(propositional)으로 제시된 ‘창조―타락―구속’의 구도이다. 기독교 세계관은 성경의 많은 내용을 창조―타락―구속이라는 명제를 통해 핵심 교리를 함축적으로 제시했다. (창조―타락―구속의 명제적 구도에 대해서는 지난 연재에서 소개한 바 있기 때문에 추가적인 설명은 생략한다.) 성경의 긴 흐름을 보편적이며 불변하는 명제들로 함축하여 제시하려는 노력은 모더니즘의 특징적 요소로, 그간 기독교 세계관을 비판하는 이들의 대부분은 창조-타락-구속이 가지는 명제성이 성경의 내러티브(narrative, 즉 이야기)를 손상시킨다는 지적을 해왔다. 알버트 월터스도 <창조 타락 구속>의 개정판에서 이러한 비판을 수용하면서 “그것은 세계관을 명료하게 정립하기 위해 그 이야기에 깔린 기본 가정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일 뿐”임을 인정했다. 또한 세계관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그 효용성에 대해 선을 그었다.

 

“세계관은 복음이 아니다. 복음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인 데 비해, 세계관은 교회가 선교사역을 잘 감당하도록 도우려고 복음의 구조적 특징을 설명하는 인간적 시도일 뿐이다. 이것은 인간의 손으로 하는 작업인 만큼 잘못될 수도 있고 역사적 제약성도 갖고 있다. 사실 복음을 명료하게 설명하려는 시도가 모두 그러하다.” (알버트 월터스, <창조 타락 구속>)

 

왈쉬와 미들톤도 자신들의 책에서 “내러티브는 세계관의 본질, 특별히 성서와 성서적 세계관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매우 유익하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는 N. T. 라이트를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라이트는 많은 기독인들이 성서를 데일리 라이트 신문(Daily Light edition)처럼 정돈해서 본다고 했다… 그러나 정작 성서는 뒤죽박죽이다… 우리는 어떤 시간을 초월한 진리나 모델 또는 도전을 푹 삶아 우려내서 천상의 영역으로 옮기려고 한다. 시간을 초월한 이 진리들을 성서라는 그릇에서 우리 국그릇으로 옮겨 담고 현대적 정황의 구미에 맞게 그것들을 다시 용해시키기 위해서다.” (왈쉬, 미들톤,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세계관>)

 

결국 기독교 세계관이 가진 명제성은 포스트모던적인 틀로 보면 시간과 공간 속에 갇힌 여러 가지 이야기들 속에서 어떤 초월적 진리와 개념의 명제를 추출해내려는 시도로 읽히며 그렇게 추출된 명제들은 성경 속 각각의 내러티브 즉, 아담과 아브라함, 야곱, 여호수아와 베드로 등의 개별 이야기를 배제시킨다는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김기현에 대한 반론 글에서 개인적인 생각을 표명한 바 있다.

 

“내러티브는 성경이 어떤 지침이나 규율, 혹은 신조와 같은 명제로 추출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을 가진 긴 서사(敍事)라는 말이다. 야곱이 경험한 하나님과 요셉이 경험한 하나님으로부터 공통분모를 뽑아서 우리가 취해야 할 지침으로 삼는 것이 진정한 혹은 온전한 기독교인가? 거칠게 표현하자면 대충 이런 류의 고민이다. 물론 이러한 문제의식이 신학과 세계관에 녹아나는 일은 고무적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명제적 성격의 기세를 평가 절하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나. 이는 마치 예수님의 행적이 중요한가, 그가 가르친 주기도문이 중요한가 하는 문제와 같다. 물론, 둘 다 중요하고 가치가 있다. 둘은 상호 보완이 필요하다. 관계를 따지자면 주기도문은 명제적 성격이 강하고 예수의 가르침이 압축적으로 드러나 있기 때문에 서사적인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내러티브의 살이 붙어야 그 명제가 온전히 드러나고 또한 강화된다. 이러한 문제는 성경에 기록된 십계명이나 사도신경에서도 잘 드러난다. 반대의 입장에서 본다면 기세의 일관성과 명제성을 배제하고 내러티브를 살린다면 기독교를 효과적으로 관통할 수 있겠는가?” (<복음과상황> 200호 김용주, “‘다시 쓰는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소견”)

 

왈쉬와 미들톤은 이러한 내러티브의 긍정적 영향을 간파하여, 기존에 도예베르트가 제안한 창조―타락―구속의 구도는 유지하되 그 속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개별적 내러티브들을 살려내는 방식의 새로운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세계관’을 제안했다.

 

“그럼에도 이 모든 내용들은 세상과 인간을 위해 이스라엘, 예수, 그리고 교회를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의 서사적 드라마 안에 있다. 창조, 타락, 구속이라는 포괄적인 내러티브의 정황 안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성서는 그 안에서 해석된다.”(왈쉬, 같은 책)

 

물론, 신국원의 <니고데모의 안경>이나 송인규의 <새로 쓴 기독교, 세계, 관>에서는 기존에 제시된 명제적 성격을 유지하면서 그 원리들에 대한 성경적 근거와 예화들을 제시하는 데 그치기도 했다. (나는 신국원의 책이 세계관 입문서로 탁월하다고 생각하며, 최근 비판적인 논의에도 불구하고 송인규의 책 역시 의의가 크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는 단지 내러티브를 살렸냐 아니냐에 국한된 지적일 뿐이다.) 정리하자면, 창조-타락-구속의 명제성 자체에 대한 지나친 부정보다는, 왈쉬의 책에서와 같이 이후에도 명제와 내러티브가 조화를 이룬 상태에서 유효적절하게 기독교 세계관을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리라고 본다.

 


내러티브 vs. 메타 내러티브

또한 포스트모더니즘에 따르면 기독교 세계관의 주된 비판은 메타내러티브, 즉 ‘거대담론’의 문제로도 환원된다. 메타내러티브(meta-narrative)란 단순히 어떤 특정 종족의 이야기, 어떤 지역에서 있었던 한시적인 이야기가 아닌 태초에서 종말로 진행하는 세계에 대한 보편적인 이야기라는 의미이다. 이는 이데올로기가 될 수도 있겠고 역사관 내지는 세계관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기독교 세계관도 메타내러티브다.) 어찌 됐건, 포스트모던 사회의 도래 이후에 우리가 가장 흔하게 듣는 말은 바로 이 ‘거대담론의 죽음’이다. J. F. 리오타르는 “포스트모던을 극단적으로 단순화한다면 메타내러티브에 대한 불신”이라고 말했다. 왈쉬는 메타내러티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자율적 진보에 대한 근대적 신화와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기독교 이야기가 무엇이든지 간에 근거와 정당성을 제공하는 이야기를 의심하는 경향이 있다. … 이러한 메타내러티브는 보편성이라는 허황된 주장 아래 자신의 구성적 특성에는 눈을 감는다. 그리고 불가피하게 통일성, 동질성 등에 특권을 주면서 차이, 이질성, 타자성, 개방성 등을 은폐한다. … 메타내러티브는 지배 내러티브다. 도덕적 보편성에 대한 주장이 체계에 근거하든 메타내러티브에 근거하든 간에 결국 도덕적 보편성은 권력과 권위가 있는 기득권층의 이익을 정당화해준다. … 특권적인 이야기는 존재할 수 없다. 그 대신 지역적이고 다원적이며 소수자들의 이야기가 고무되어야 한다.” (왈쉬, 같은 책)

 

포스트모던적 잣대에 따른다면 창조―타락―구속의 내러티브는 명제성을 넘어선다 하더라도 그 자체가 지배 내러티브이자 거대담론으로 현대에는 폐기되어야 마땅하며, 최소한 이스라엘 민족의 개별 내러티브로 축소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왈쉬는 포스트모던적 전제에도 비판의 여지가 있음을 논증했다.

 

“이러한 부족 전쟁은 최근에 자행된 르완다에서의 대학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PLO와 하마스로 알려진 팔레스타인 테러 기구에서도 재현되고 있다. 이러한 끔찍한 유혈사태는 모두 국지적 내러티브에 의해 촉발되었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에 보편성에 대한 명백한 주장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역적 내러티브는 적으로 규정한 공동체나 집단에 대한 전면전을 정당화하고 있다. …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메타내러티브가 필요하지 않다는 논증을 하기 위해 메타내러티브에 은밀히 호소하는 자가당착에 빠져 있다. 일관성 있는 메타내러티브가 없는 인간은 도덕적으로 표류할 수밖에 없다. 최근 30년 동안 북미, 유럽, 기타 제3세계 국가의 도시에서는 폭력범죄가 증가했다. 폭력범죄의 증가 추세는 그 동안 인간의 삶에 의미와 일관성을 부여해주었던 근대적 메타내러티브와 정체성을 제공하는 대안적 전통이 효력이 있었음을 반증한다.” (왈쉬, 같은 책)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사고와는 다르게 세상이 메타내러티브에 의해서만 폭력과 억압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국지적 내러티브에 의해서도 더 끔찍한 유혈사태가 벌어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결국 폭력과 억압은 메타내러티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말이다. 또한 메타내러티브가 불필요함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또 다른 메타내러티브에 호소하게 되는 자가당착에 빠질 수 있으며 메타내러티브가 사라지고 있는 현대에 오히려 혼란과 도덕적 표류가 발생하고 있음을 흥미롭게 지적하고 있다. 결국 왈쉬의 지적대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상정한, 문제의 근원이 메타내러티브이며 그 해결이 메타내러티브의 죽음이란 논지는 바로 그 자신에 의해 흔들리고 있는 셈이다.

 


구조―방향 모델

포스트모던적 사고에 따르면 ‘구조―방향 모델’도 현실에는 불가능해 보이는 명제일 따름이다. (물론 구조―방향 모델은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잣대로만 비판 받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도 전반적인 비판을 언급하였다.) 구조―방향 모델은 첫 연재 글에 소개된 바 있으므로 지면상 여기에서는 생략하겠다. 이원석 편집위원은 본지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순수한 구조에 대한 개혁주의 세계관 진영의 믿음이 개혁주의 세계관의 현실 감각 부재를 보여주는 징후라고 생각한다. 개혁주의 세계관에서 해법은 간단하다. 구조가 선하므로(어떠한 악도 개입될 수 없으니까) 방향만 바꾸면 된다. 이 해법 속에는 구조와 방향이 현실 속에서 명확하게 구별될 수 있냐는 논의가 배제되어 있다. 어디까지가 구조이고, 어디부터 방향인지가 그렇게 명확하게 보여줄 수 있는지 의문이다. 그간 개혁주의 세계관 논의가 현실과 분리된, 이론적 고성에서만 이루어졌다는 것이 여기에서 드러난다.” (<복음과상황> 204호 이원석, “‘순수한 구조’는 현실 속에 없다”)

 

또한 김기현은 구조―방향 모델이 불이나 성(性)처럼 유용과 오용을 동시에 설명해 주고 세상을 변혁하는 데에 유익한 방법론적 틀을 제공하는 긍정적 역할을 수행해왔음을 인정하면서도, 구조가 악하거나 이중적일 수 있음을 비판했다. 또한 그는 구조가 선하다고 못 박는 것은 결국 구조결정론에 다름 아니며, 따라서 ‘구조와 방향’보다는 오히려 ‘정사와 권세’ 모델(?)로 설명하는 것이 더 성경적이라고 말한다.

 

“성서에서 제도 혹은 구조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용어는 ‘정사와 권세’이다. … 그러기에 톰 라이트는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라는 세계관적 질문에 대해 예수의 진정한 원수는 이스라엘 내부도, 이스라엘 밖의 로마도 아닌 사탄이라고 대답한다. … 라이트의 질문, “지금은 어느 때인가?”에 대한 대답을 정사와 권세와의 투쟁으로 규정할 수 있다. 한발 더 나아간다면, 구조와 방향의 구도보다는 ‘정사와 권세’가 훨씬 더 성경적이면서도 실제적인 틀이 된다.” (김기현, 같은 글)

 

재미있는 사실은 월터스도 <창조 타락 구속> 개정판 후기에 N.T. 라이트의 질문, ‘지금이 어느 때인가’에 대한 논의를 비교적 길게 기술하였다는 사실이다.

 

“라이트는 또 하나의 중요한 질문이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지금이 어느 때인가’이다. … 지금이 어느 때인가? 바로 증언과 선교의 시대다. 우리가 살고 있는 ‘두 시대가 중첩된’ 시기, 곧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속한 시기의 의미는 그것이 사도적 교회가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도록 주어진 기간이라는 데 있다. … 이 구속의 시대는 많은 사상자를 속출하는 치열한 전투의 시기다.” (월터스, 같은 책)

 

월터스는 이러한 질문에 답함에 있어 다른 모델을 제안하는 것이 아니라 흥미롭게도 다시 구조―방향 모델로 돌아가고자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실한 교회라면 우리 문화와 적대적 관계밖에 유지할 수 없다는 말인가? 선교사들은 이 딜레마를 붙들고 오랫동안 씨름해왔다. 이런 감당할 수 없는 긴장감은 두 가지 요인에서 나온다. 첫째, 교회는 문화적 이야기를 구현하고 있는 사회의 일부다. 둘째, 기독교 공동체는 그와 다른 이야기에 정체성을 두고 있는데 이 이야기도 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 범위가 포괄적이고 사회적으로 구체화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이 이 두 개의 공동체에 몸담고 있기 때문에 그런 감당할 수 없는 긴장감이 생기는 것이다. 이런 긴장을 해소하려면 우선 구조와 방향의 구별을 상기해야 한다. 하나님 백성의 사명은 선한 창조를 반영하는 통찰과 구조를 분별하여 포용하는 동시에, 우상 숭배로 인해 왜곡된 모습을 배격하고 뒤엎는 것이다.” (월터스, 같은 책)

 

같은 책에서 월터스는 구조 자체를 ‘선하다’라고 규정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창조를 계승하는 요소’를 구조로 상정하고 있다. 또한 ‘타락의 영향 아래 있는 요소’를 방향으로 규정함으로써 모든 피조물에 대해 구조와 방향을 구별 짓고 나아가 악한 방향으로부터 원래대로 되돌리는 것, 즉 세상의 변혁을 그리스도인의 소명으로 제시하였다. 이러한 설명이 (김기현의 지적대로) 구조가 본질적으로 선하지 않을 수 있다는 비판과 (이원석의 지적대로) 현실적으로 구조―방향의 구별이 어려우며 상대적일 수 있다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지금이 어느 때인가’라는 라이트의 핵심 질문에 대해서는 월터스의 주장대로 구조―방향 모델이 굳이 못 빠져나갈 이유도 없다. 또한, 월터스는 구조와 방향의 구분 자체가 어렵다는 문제 제기에 답변이라도 하듯, 지면의 상당 부분을 영적 은사, 성(性), 춤, 오이코스(oikos, 로마제국의 기초 사회단위)에 이르기까지 예로 설명하고 있다(같은 책 5장과 후기를 보라). 또한 김기현이 제시한 권세―정사 모델은 주로 국가나 정치 분야에는 적용하면서도 (기독교 세계관이 주로 적용하고 있는)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특유의 대립구조를 잘 적용시키지 않고 있다. 만일 문화와 예술 분야에 권세―정사 모델을 적용시킨다면 ‘사탄이 마침내 대중문화를 선택했다’는 이른바 신상언 류의 극단과도 만나지 않겠는가. 전에도 밝혔듯 나는 구조―방향 모델의 효용성을 받아들이는 편이다. 물론 단순한 도식과 모호한 ‘구조’ 개념은 비판의 여지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모델이든 현실을 완전히 담아낼 수 없다는 전제에서 본다면, 이것은 그 어떤 명제보다도 단순하게 표현되었지만 90년대를 기독대학생으로 보낸 내게 영혼구원에 국한된 ‘사영리 모델’―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을 넘어서 방향성, 즉 선악의 구분이 세상과 교회, 예배와 일상, 성경공부와 학문연구, 복음전도와 사회참여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영역에서도 가능함을 일깨워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여전히 회자되고 있는 이 구조―방향 모델은 십여 년간 교계에 큰 역할을 감당했다고 평가하고 싶다. (계속)

2009/06/01 23:36 2009/06/01 23: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