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IVF ‘6개대 사태’에 대한 고찰(3)
/김용주
3. 한국기독학생 운동
이제는 본격적인 ‘6개대 사태’의 정황을 설명하기 위해, 관심을 87년 전후의 기독학생들에게로 집중하려고 한다. 앞서 설명한대로 6개대 사태 당시의 한국 사회와 IVF 내부 분위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민주화가 달성되었다는 인식이 팽배해진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의 기독학생운동의 보수-진보 양극화에 보다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1) 80년대 운동권 세력의 비신화화
“한국사회는 '87년 민주화 투쟁과 80년대말 밀어닥치기 시작한 사회주의권의 퇴조로 말미암아 새로운 지형을 양산하고 있었다. '87년 민주화대투쟁 이후 시민운동을 비롯한 다양한 대중운동의 발달과 6공화국의 등장이라는 형식적 민주화 과정은 그동안 운동권이 가졌던 무조건적 윤리적 정당성을 약화시키고 운동을 비신화화시켰다. 급격한 사회주의권의 몰락은 보수집단에게는 '자본주의의 승리론'을, 운동세력에게는 희망의 부재현상을 낳았고 국민들의 안정회귀 심리는 사회보수화 현상을 야기시켰다. 급기야 희망이 없는 시대, 이데올로기를 말하면 우스운 시대가 되었다. 이 간극을 비집고 시민운동이 등장하였지만, 아직 책임 있는 운동세력으로 성장하기에는 미약한 실정이다.”(이종철 기자, <복음과상황> ‘80년대 기독학생운동사’)
87년 이후 민주화에 대한 가시적인 성과와 사회주의 국가들의 퇴조가 학생운동의 위축을 가져왔다. 복상 이종철 기자는 이런 시대적 분위기를 따라 교회도 원래의 보수성을 넘어 더 강력한 보수집단으로의 역현상이 있었다고 진단한다.
“기독학생운동의 조류도 일반 사회운동의 조류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새롭게 변화된 환경을 맞이하여 시민운동, 윤리운동노선이 교회 전반적으로 인정되어 가는 추세를 보이기도 하지만, 그전의 80년대 상황에서 한국교회가 한국사회의 도전에 방어적, 수세적이었다는 점에서 - 즉, 한국사회의 자본주의적 모순보다는 유물론 사상에 대한 경계심리가 더 컸다 - 80년대 말부터 시작된 사회주의 이념의 급격한 퇴조는 한국교회를 원래의 보수성으로, 또는 더 강력한 보수집단으로 회귀시키는 역현상을 빚기도 했다.” (이종철 기자, 같은 기사)
따라서 80년대를 살았던 기독학생들은 점점더 양극화 현상을 띄게 되는데, 한쪽은 민주화 물결로 말미암아 더욱 열광적인 근본주의 신앙으로 회귀하게 된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광주항쟁과 운동권 학생들이 고문당할 때 어떤 행동으로 동참하지 못했던 죄책감으로 인해 이제라도 보다 급진적인 연합 운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두 극단적인 방향으로 달려가게 되었다.
(2) 보수적인 기독청년운동
물론 80년대 초부터 한국사회 보수성향의 주류 기독교는 탈정치적인 성향으로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다. 특히 과거 광주항쟁이 있던 같은 해, 한국교회는 ‘세계복음화 대성회’라는 엄청난 규모의 집회를 치른 전력이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한국교회의 80년대는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났던 그 해 8월에 여의도 광장에서 '세계 복음화 대성회'라는 초유의 대집회로부터 시작되었다. 국민학교 동창회까지도 허가를 맡아야 했던 당시에 정권은 무슨 이유로 이런 대형 집회를 허락했는지 모르지만 그 집회의 주된 논조는 "민족의 난국타개를 위하여 우리가 먼저 회개하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자"였다. 원수마저도 품어야 한다는, 그래서 가진 자, 가해자는 용서받아야 할 불쌍한 영혼이고, 그에 대해 잘못을 질타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무지한 자가 되는 거룩한 이타심. 오직 하나님만이 하신다는, 그래서 우리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초월적 수동주의, 선교이데올로기 속에 한국사회의 모순은 정당화되었고 교회의 모순은 회칠한 무덤처럼 덮여 갔다.” (이종철 기자, ‘80년대 기독학생운동사’)
특히, 6.29선언 바로 전 해인 86년 캠퍼스에서는 한쪽에서는 운동권 학생이 분신하는 일이 일어났고 반대쪽에서는 ‘예수대행진’이라는 보수 기독학생들의 집회가 열리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특히 김회권 목사는 ‘예수대행진’을 기획한 한사랑선교회 중심의 학생들은 운동권 학생들을 향해 ‘자살을 선동하는 마귀의 영’이라고 정면으로 비판하며 일대일 대결구도를 만들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예수대행진운동은 공개적이고 반운동권적인 대항 퍼포먼스 성격의 집회였다. 1986년 오월제 행사 기간 중 문익환 목사님이 서울대 아크로폴리스에서 대중 집회 연설을 했다. 문 목사님이 “전태일 열사의 영이여~”를 외치던 상황이었는데, 학생회관 4층 옥상에서 서울대 원예대를 다니던 이동수가 투신자살을 한다. 한사랑선교회 소속이었던 김한식은 대학생을 선동해서 자살시키는 것은 마귀의 영이라며, 마귀의 영이 점령한 아크로폴리스를 우리가 지배해야 한다면서 꽹과리 치고 나팔 불며 행진하는 예수대행진을 기획했다. 나는 그게 옳지 않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기독 동아리 일부가 김한식이란 인물을 따라갔고, 채플연합운동을 했던 친구들도 사상적으로는 크게 동조하지 않았지만, 운동권과 1대 1로 맞대응하려는 그 큰 흐름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이 대결의 일환으로 캠퍼스 내에서는 운동권과 기독 학생들 사이에 대자보 싸움도 있었는데 예수전도단과 한사랑선교회가 주도했다.” (김회권, <복음과상황> ‘김회권 목사가 말하는 87년형 복음주의 태동기’)
류대영 교수는 8-90년대 격변기에 보수 교회 안에서 기독청년들의 고민과 뒤늦은 각성, 참여의 움직임을 아래와 같이 평가했다. 그의 설명을 요약해볼 때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우면서 속으로는 군사독재에 협조한 보수 교회의 지도자들의 이중적 행태, 로잔 언약을 통해 사회참여의 틀은 마련했지만 그 실천에서는 너무 온건했던 보수 기독인들의 한계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신이라는 극단적 방식의 투쟁에 동참하지 못했던 당시 기독학생들의 고민을 엿볼 수 있다.
“참여적인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넓은 의미의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보수적인 신학적 전통에 속하는 한국의 교회는 1980년대의 파괴적인 혼란과 아픔 속에서 줄곧 침묵을 지켰다. “교회와 정치는 분리되어야 한다”, “인본주의적 사회참여는 위험하다”, “민주화 세력 속에는 ‘불순 이데올로기’가 섞여 있다”는 등의 논리는 보수교회가 1980년대의 상황 속에 침묵하는 데 충분한 신학적 명분을 여전히 제공하고 있었다. 정교분리의 원칙을 내세우는 또 다른 한편에서는 교회의 대표성을 가진 지도자들 가운데 일부가 능동적, 혹은 수동적으로 군사독재에 협조했다. 로잔 언약을 비롯하여 사회참여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밝힌 복음주의적 선언서와 신학들이 국내로 유입되어 활발하게 전파되었다. 그러나 사회참여의 당위성에 관한 공감대가 넓게 형성되어가는 와중에도 그것을 실천하는 보수적 기독교인은 극히 드물었다. 1980년대의 한국 상황에서 사회참여는 “신학”보다는 일차적으로 “용기”의 문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참여는 곧 핍박과 고통을 의미하는 상황에서 당위성은 즉각 실천으로 옮겨가지 않았다. 그리고 “구조변혁”보다는 “개인의 변화”를 우선하는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이 실천할 수 있는 개인윤리 차원의 사회참여는 자기 몸에 불을 지르는 극단적 방법으로 대표되는 극한의 투쟁상황에서 당당하게 실천되기 어려웠다. 이 점은 청년, 대학생들이 누구보다 더 절실하게 체감하고 있었다. 따라서 기윤실은 보수교회 기성세대가 처음으로 조직한 사회참여 운동이었지만 청년들에게 “너무 온건”하게 보여 적극적 지지를 받지 못했다. 이 시기의 화두는 민주화 쟁취, 민족통일, 민중해방 등 무거운 주제들이었다. 이 점에서 참여적 복음주의 청년, 학생들은 기성세대보다 몇 발 앞서가고 있었다. (중략) 1980년대의 한국적 상황을 더 깊게 이해하고 행동하려던 복음주의권 젊은이들은 해방신학, 민중신학 등 진보적 상황신학과 마르크스주의적 사회분석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보수교회 교인들 일부가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집단행동을 시작한 것은 전두환 정권의 종말이 눈앞에 보이고 민주화운동이 시민운동으로 확대된 시점에 이르러서였다. (류대영, 같은 책)
(3) 대학기독신문과 기문연의 조직
이러한 기독학생들이 시대적 상황 가운데 고민하던 중 보수 교회 출신의 청년들 몇몇이 해방신학 모델을 본떠서 공동체를 만들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기독교문화연합운동(이하 기문연)의 시작이다.
“보수교회 출신 청년들이 시작한 기문연이 해방신학에 기초한 남미 천주교의 사회참여 모델을 수용하여 봉천동의 빈민촌에 “기초 공동체"를 만들어 활동하다가 “기문노련”이라는 조작된 공안사건으로 고통을 겪었던 시행착오는 이런 점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였다.” (류대영, 같은 책)
당시 멤버였던 김회권 목사는 자신의 글을 통해 당시의 정황을 좀더 자세히 설명한다.
“이종철, 이승재, 최은석, 박정수, 유욱 등 5명이 어느 날 신림2동에 있던 나의 자취방을 찾아왔다. 예수대행진운동으로 지치고 좌절한 마음을 안고 밤새 치열한 고민을 하다가 새벽에 우리 집에 온 것이다. 그들은 기독교 문필가가 필요하다며 기독언론운동에 참여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종철 등의 리더십으로 1986년 10월 <대학기독신문>을 시작했다. 그 신문의 주 필자는 나를 비롯해 박영범, 이종철, 박문재, 이문식, 최은석, 이승재, 이덕준 등이었다. < 대학기독신문>과 최은석, 이승재, 유욱, 이종철 등이 주도적인 리더십을 발휘해서 만든 기문연은 거의 같이 움직였다고 보면 된다. 기문연에서 공부하던 이들이 <대학기독신문>에서도 활동했다. 이 청년들이 초기에는 이문식 목사, 박문재 전도사, 박영범 목사, 그리고 나의 공동 지도 하에 있었다. 그러다가 박문재 전도사가 장신대 신대원 2학년 때부터 독점적으로 이끌기 시작했고, 청년들과 봉천5동으로 집단 이주해 공동체 실험을 시작했다. 이문식 목사는 당시 구로희년교회를 목회하고 있었고, 박영범 목사는 대학촌교회 청년부 사역에 몰두하고 있었으며, 나는 ESF에서 사역을 계속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기문연에 대한 우리의 영향력은 제한된 범위 내에서만 미치게 되었다.” (김회권, <복음과상황> ‘김회권 목사가 말하는 87년형 복음주의 태동기’)
(4) 기문노련 사건과 복음주의청년연합, 그리고 복음과상황 창간
“이들의 활동은 기독교문화노동운동연합(기문노련)으로도 이어졌다. 위장 취업을 장려하지 않았으나 이 운동에 참여한 대학생들 중에는 노동자로 사는 청년이 많았다. 이 그룹의 핵심 멤버였던 최은석 등을 중심으로 구로공단 지역에서 야학을 하거나 모여서 스터디를 하는 등 노동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다 최은석이 작성한 서류가 발각되어, 공안 사건으로 비화된다. 그 결과 모임이 해체되고 <대학기독신문>도 압수 대상이 된다. 그것이 ‘기문노련 사건’이다. 당시 9시 뉴스에도 2분 정도 보도됐다. 11명이 경찰에 잡혀가 4개월 이상 감옥살이를 했다.” (김회권, 같은 기사)
‘기문노련 사건’ 이후 공동체는 자연스레 해체되었다가 이들은 다시 복음주의청년연합을 결성하게 된다. 이때 IVF로서는 6개대 사태의 핵심인 고직한, 한철호 선교사가 합류하게 되는데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당시 IVF의 진보적인 사회참여 성향은 국제 IFES 조직이나 한국 IVF 내부로부터 기인했다기 보다는, 복청 회원들 간의 스터디와 활동을 통해서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특히 당시 멤버였던 고직한 간사는 이후 서울지방 IVF 타간사 및 이사회와의 불협화음을 내다가 결국은 직위해제 과정에 이르게 되는데 이를 통해 보더라도 IVF는 복청의 영향 속에서 기독교 사회참여의 논리를 흡수한 것으로 보인다.)
“1986년 10월인가, 내가 <대학기독신문>에 사회변혁론적인 장문의 글을 기고했는데, 당시 합동신학교에 다니던 강경민 목사가 나를 찾아와 복음주의청년연합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강경민 목사는 당시 홍정길 목사가 시무하던 남서울교회에서 박철수, 이문식 등 청년 그룹과 겨자씨선교회를 만들고 아모스 스쿨이라는, 마치 요즘 기독청년아카데미 같은 강좌를 매년 열고 있었다. 강경민 목사의 동역자들인 박철수, 이문식과 김호열과 김회권, IVF의 고직한과 한철호 등이 합작하여 복청을 만들었다. 성인경, 민종기 등이 조금 늦게 복청 멤버로 합류했다. 1987년 4월에 내가 ‘복청 선언문’ 초안을 만들었다. 그때부터 남서울교회에서 복청을 만들기 위한 기도회를 시작했다. 복청의 대표는 박철수 목사가 맡았다. 나는 통일분과 위원장을 했다. 외국에서 돌아온 서경석 목사, 조성기 현 예장통합 사무총장 등도 이 모임에 들어오고 싶어했으나 함께하진 않았다. 복청을 모체로 복음주의청년학생연합회(복청학련)를 만들었고, 최초로 한 일이 1987년 대선 당시 공명선거운동이다. 직선제 도입 후 첫 민주 선거에 엄청난 인원을 동원한 운동이었다.” (‘김회권 목사가 말하는 87년형 복음주의 태동기’)
(5) 한국 IVF 개혁운동과 6개대 분열
기독학생들이 속한 선교단체 중 진보적 복음주의 학생운동을 계승하려는 시도는 IVF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평가한다. 이종철 기자는 IVF가 선교단체로서는 전향적인 노력을 시도했지만 선교단체 특유의 보수성을 깨지 못하고 내부적 갈등 국면에 처했다가, 결국은 급진적이었던 6개 대학지부가 분리되어 나오게 되는 진통을 겪었다고 지적했다. 이것이 이른바 IVF의 ‘6개대 사태’라고 부르는 사건이다. 우선은 이종철 기자의 연재 기사를 인용하고 6개대 사태를 보다 깊게 다룰까 한다.
“선교단체 내부에서 진보적 복음주의운동을 계승하려는 노력은 IVF내에서 시작되었다. '87년 대선운동을 하면서 고양된 의식은 IVF 자체가 역사문제에 있어서 주체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인식으로 발전하여 마침내 '88년 가을에 서울지역을 중심으로 연합학생회를 구성한다. 연합학생회는 대학간 펠로십(fellowship) 차원을 뛰어넘어 밑으로부터 학생연합체를 만들어 냄으로써, 캠퍼스 내에서의 상황적 요구를 수렴할 수 있게 하였고, 목적의식적으로 하나님나라운동의 역사성을 기독학생들에게 주입하기 시작한다. 이 연합학생회는 방학 중에는 대규모적인 농촌봉사활동을 실시함으로써 현장과의 만남과 그를 통한 의식화를 꾀하였다. 일부 선진적인 기독학생들은 겨울방학 중 공활을 수행하기도 했다. 서울의 활동에 영향을 받아 부산에도 연합학생회가 결성되는데, 이 모임은 농활, 통일심포지움을 개최하기도 하였다. 이제는 더 이상 위로부터의 지도나 간섭에만 무조건 순응하는 형태가 아닌 밑으로부터의 의사를 결집 수행하는 참다운 학생자발운동, 주체적 기독학생운동의 모형이 창출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내부로부터의 개혁운동은 선교단체의 강고한 틀을 깨지 못하고 견제를 당함으로써 결국 3기 집행부 때에는 학생협의회 차원으로 축소되고 '92년 내부 진통을 겪으면서 6개 대학지부가 IVF로부터 멀어져 나와, '한국기독청년학생연합회'(한기연)를 창립하기에 이른다. 이것은 진보적 복음주의 운동의 열악한 실상을 그대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종철, 같은 기사)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