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IVF ‘6개대 사태’에 대한 고찰(2)
/김용주
2. 한국의 정치적 상황
6개대 사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기독학생들이 로잔 언약에서 기독교 사회참여의 근거를 마련하고자 했던 우리나라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다. 80년대에는 광주민주화 항쟁이 있었고 운동권 학생들에게는 잦은 고문이 가해졌다. 6개대 사태 당시 ‘의식화된’ 학생들에 대한 불편한 입장들을 접하는 경우가 종종 있으나 80년대 학생운동사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된 학생들의 다수가 광주항쟁에 대한 죄책감과 동년배 학생들의 고문에 의한 죽음에 깊은 분노를 느꼈음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이 부분은 주로 강준만 교수의 <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를 인용하였다.
(1) 광주 민주화 항쟁
5·18 광주항쟁은 영화 <화려한 휴가>로 인해 이제는 대중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1980년 광주에서 있었던 민주화 운동이다. 간략하게 사건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죽고 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요구가 거세지자 전두환 보안 사령관을 우두머리로 하는 ‘하나회’가 12·12 사태를 통해 정권을 탈취하고 개헌을 막기 위해 전국적인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 1980년 5월 17일에는 광주에 2개의 대대가 진주했고, 18일 오전 10시에 전남대, 조선대 등에서 시작된 비상계엄 반대 시위를 강경 진압하면서 시위는 점차 시내 중심가로 퍼졌고, 시위가 거세지면서 공수 부대원들이 시위대와 시민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진압하기 시작했다. 당시 상황을 강준만 교수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학생들은 '계엄군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곧 대치 중이던 공수부대 책임자가 '돌격 앞으로' 하고 명령을 내렸고 공수대원들은 학생들에게 파고들면서 곤봉을 휘둘렀다. 그 곤봉은 쇠심이 박힌 살상용 곤봉으로, 이를 맞은 몇몇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차 위에서는 무전병이 기다리고 있다가 체포되어 올라온 즉시 발가벗기고 굴비 엮듯 엎드리게 하고는 계속 난타했다. 공수부대 병사들은 첫날부터 대검을 사용하고 지나친 폭력에 항의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해대며 구타하고, 여성들에게 폭행하고 옷을 찢고 심지어 젖가슴을 대검으로 난자하였다. (중략)
당시 시민군에게 붙잡힌 공수부대원은 광주에 배치 받기 전 3일 동안이나 식량 배급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투입되기 직전에는 소주를 공급받았다고 증언했다. 사람을 죽인 건 순간 미쳤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잡혀 온 시민들을 대상으로 워커발로 얼굴 문질러 버리기, 눈동자를 움직이면 담뱃불로 얼굴이나 눈알을 지지는 재떨이 만들기, 발가락을 대검 날로 찍는 닭발 요리, 사람이 가득 찬 트럭에 최루탄 분말 뿌리기, 두 사람을 마주보게 하고 몽둥이로 가슴 때리게 하기, 며칠째 물 한 모금 못 먹어 탈진한 사람에게 오줌 먹이기, 송곳으로 맨살 후벼 파기, 대검으로 맨살 포 트기, 손톱 밑에 송곳 밀어넣기 등과 같은 악행을 저질렀다는 건 무얼 의미하는 걸까? (중략)
도청에서 철수한 공수부대는 철수하던 중 진월동에 이르러서 인근 지역에 장난 삼아 총질을 가했다. 이 학살에 대해 송기숙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농부에게 총을 쏘아 중상을 입히고 저수지에서 목욕하는 중학교 1학년짜리를 오리 사냥하듯 쏘아 죽였으며, 배수관 밑으로 숨어 들어가는 여인에게 6발이나 총을 쏘아 죽이고, 도망치다 벗겨진 고무신을 줍는 국민학교 4학년짜리한테 10여 발이나 총을 갈겨 몸뚱이를 걸레로 만들었다."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
당시 광주에서 있었던 참상에 대해 전해들은 이십 대의 젊은 학생들이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떤 감정을 느끼며 학교를 다녔을지 짐작하는 것만으로도 아찔하다. 광주항쟁 이후로 80년대는 운동권의 데모가 그치지 않던 시기였고 자연히 당시의 대학생들은 정치 이슈를 중심으로 하는 거대담론적 고민이 주를 이루었으며 기독학생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의 분위기를 이시종 간사(당시 학생)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당시 캠퍼스 상황은 지금 학생들이 전혀 느낄 수 없는 분위기였습니다. 정치적 문제에 캠퍼스가 집중하고 있었고 아픔도 많았습니다. 학교 다닐 때 분신하거나 투신한 사람을 수십 명이나 봐왔습니다. 심지어 DPM(아침기도모임) 갈 때 여기저기에 피가 흥건히 고여있는 것을 보기도 하였습니다. 사회 문제에 대해 크리스천도 동일하게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회정의부분에 대한 교회의 적극적인 대답이 없었습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대학에 들어와서 신앙을 잃었습니다. 교회에서 고등부회장을 했던 사람이 총학생회 회장이 되는 경우가 많았고 이들은 대부분 학생운동권에 투신했습니다.” (이시종, ‘6개대 사태 세미나)
(2) 독재정권의 고문 탄압
80년대 중반은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가 극에 달하는 시점에서 많은 운동권 학생들이 잡혔고 고문을 당했다. 그 중 최근에 고인이 된 김근태 전의원의 고문 사건과 고문 도중 죽어간 박종철 사건을 통해 당시 학생들이 느꼈을 캠퍼스에서의 심정을 돌아보고자 한다.
김근태 고문 사건
"1985년 10월 29일 5공 정권은 학내 외의 각종 시위와 위장취업 등 노사분규의 배후에 좌경용공학생들의 지하단체인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 (민추위)라는 조직이 있음을 밝혀냈으며 이 단체의 위원장 문용식(26, 서울대)과 문용식의 배후 조종자로 김근태 (38, 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 등 관련자 26명을 국가보안법 등 위반혐의로 구속하고 17명을 수배했다고 발표했다. 각 신문은 이 사건을 1면 머리기사로 보도했다. 이 사건은 흔히 ‘깃발사건' (혹은 민추위 사건)으로 불려져 왔는데, 이는 민추위가 내세운 ‘노학연대'로 인해 학생운동이 노동운동으로 비화될 것을 우려한 5공 정권이 급조해낸 것이었다. 체포된 학생들은 고문을 당했으며, 이후에도 민청련이 배후 조종세력으로 몰려 김근태 등이 혹독한 고문을 당했고 서울대생 박종철은 이 사건의 마지막 수배자인 박종운을 하숙집에 재워줬다는 이유로 연행돼 물고문을 받다가 숨지는 비극을 겪게 된다." (강준만, 같은 책)
강준만 교수는 자신의 책에서 김근태 전 의원이 고백한 장문의 고문내용을 그대로 인용하였다.
"본인은 9월 한 달 동안, 9월 4일부터 9월 20일까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각 5시간 정도 당했습니다. 전기고문을 주로 하고 물고문은 전기고문으로 발생하는 쇼크를 완화하기 위해 가했습니다. 고문을 하는 동안 비명이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 라디오를 크게 틀었습니다. 그리고 비명 때문에 목이 부어서 말을 못하게 되면 즉각 약을 투여하여 목을 트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25일 집단적인 폭행을 당했으며 그 후 여러 차례 구타를 당했습니다. 물론 잠을 못 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밥을 굶긴 것도 대략 절반쯤 됩니다. 고문 때문에 13일 이후에는 밥을 먹지 못했고 그 후유증으로 지금까지 밥을 먹지 못합니다.(중략) 고문을 할 때는 온몸을 발가벗기고 눈을 가렸습니다. 그 다음에 고문대에 눕히면서 몸을 다섯 군데를 묶었습니다. 발목과 무릎과 허벅지와 배와 가슴을 완전히 동여매고 그 밑에 담요를 깝니다. 머리와 가슴, 사타구니에는 전기고문이 잘되게 하기 위해서 물을 뿌리고 발에는 전원을 연결시켰습니다.(중략)
그들은 고문을 하면서 “시집간 딸이 잘 사는지 모르겠다”, “아들놈이 체력장을 잘 치렀는지 모르겠다”는 등 자신의 가족들에 대한 애정 어린 말들을 주고 받았으며 본인에게도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떻게 이처럼 고문과 폭력적 행위를 자행하는 자들이 개인의 가족들에게는 인간적인 사랑을 줄 수 있단 말입니까? (중략) 결국 9월 20일이 되어서는 도저히 버텨내지 못하게 만신창이가 되었고, 9월 25일에는 마침내 항복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날 그들은 집단폭행을 가한 후 본인에게 알몸으로 바닥을 기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빌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이 쓰라는 조서내용을 보고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강준만, 같은 책)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1987년 1월 14일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생 박종철은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연행되었다. 수사관들은 1985년 10월의 ‘민추위' 사건으로 수배 중이던 학교 선배 박종운의 소재를 대라며 추궁하였고, 박종철은 모른다고 답했다. 그러자 수사관들은 박종철의 옷을 모두 벗긴 다음, 조사실 안의 물이 가득 채워진 욕조 앞으로 데려가 물고문을 시작했다. 수사관들은 조사실 안의 수건을 가지고 박종철의 양손과 양발을 결박한 다음 겨드랑이를 잡고 등을 누른 상태에서 박종철의 머리를 물 속으로 집어넣었다가 빼는 물고문을 반복했다. 그러나 이런 물고문에도 박종철이 박종운의 소재를 모른다고 하자 결박 당한 박종철의 다리를 들어올린 채 물 속에 머리를 집어넣었다. 이 과정에서 욕조의 턱에 목부분이 눌려 박종철은 숨을 쉬지 못했고, 결국 경부압박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박종철의 죽음이 알려지자, 방학 중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추모제를 가졌는데, “누가 우리 친구 종철이를 죽였는가", "선진조국에 고문 살인 웬말이냐"는 플래카드 등이 학내에 내걸렸다. 1월 16일 오전에 화장한 박종철의 유골은 임진강에 뿌려졌다. (중략) 1월 17일 치안본부 특수대는 수사에 들어갔고, 치안본부장 강민창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박종철의 사망 사실을 시인하였다. 경찰이 배포한 “책상을 탁 치니 박군이 억하고 죽었다”는 식의 해명성 보도자료는 세간의 비웃음과 더불어 분노를 유발케 했다." (강준만, 같은 책)
박종철의 고문 치사 사건은 야권과 종교, 시민단체의 행동으로 이어졌고 이로 인해 같은 해에 6.10 민주화 항쟁으로 나아가는 직접적인 계기를 만들었다.
“이로부터 1주일 뒤인 87년 5월 27일 서울 종로구 연지동 기독교회관에서 민통련, 종교운동단체 등의 재야단체들과 신민당, 민추협 등을 총망라한 발기인 2천1백 96명 중 150명이 참석한 가운데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국본) 발기인 대회가 열렸다. 이들은 민정당의 후계자 지명일인 6월 10일에 박종철군 고문살인조작 범국민규탄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박종철 고문 사건의 여파는 전두환 정권의 ‘4.13 호헌 조치’를 무력화시킬 만큼 대단한 것으로서 6.10 항쟁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데에 큰 기여를 하였다.” (강준만, 같은 책)
(3) 6.29 선언
"범국민적인 항쟁의 결과 전두환 정권이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는 이른바 '6.29'선언이 나오게 되었다. 민정당 대표위원 노태우는 6월 29일 기자회견에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폭탄 선언'을 하였던 것이다. 전두환에게 건의 형식으로 제안된 이 선언에서 노태우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외에 김대중 사면, 복권 및 극소수를 제외한 시국관련 사범의 석방, 대통령 선거법 개정, 국민기본권 신장, 언론자유 창달, 지방자치제 실시 등의 8개항을 제시했다. 당시 노태우는 광주학살에 대한 공식 사과도 포함시키려고 했지만 군부의 반발을 우려해 마지막에 철회했다. 노태우는 6.29 선언을 발표하면서 이를 청와대에 건의해 만약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대통령 후보는 물론이고 당 대표직을 포함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자, 민정당은 긴급 의원총회를 열고 노태우의 구상을 당의 공식입장으로 추인했다. 이에 전두환은 7월 1일 특별담화를 통해 노태우의 6.29 선언을 대폭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강준만, 같은 책)
결국 같은 해에 국민들의 민주화 염원이 극에 달했고 당시 노태우 대표위원은 6.29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와 김대중 사면, 복권 등을 제시하였고 이에 전두환 전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인다. 강준만은 이를 두고 차기 정권 획득을 위한 군사정권 나름의 전략이자 ‘전두환 전대통령의 자신감’의 발현이었다고 평가한다. 어쨌든 당시 분위기는 민주화가 성취되었다는 인식이 전반적으로 공유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또한 6개대 사태 당시의 분위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민주화가 달성되었다는 인식이 팽배해진 이후 기독학생운동의 보수-진보 양극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6.29 선언 이후 민주화 열기는 급속히 가라앉았다. 아니 민주화가 다 이루어진 것처럼 들떠 있었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보인 반응이 그걸 잘 말해주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느꼈다. 다음과 같은 시각도 있었다. “엄청난 대중투쟁 양상에 당황한 미국은 6.29 선언을 촉발시켰다. 6.29 선언은 대중투쟁이 쟁취한 성과이지만 전술적 후퇴를 통해 재반격을 노린 미국과 군부독재의 위장된 교두보라는 양면성을 띤 것이었다.” 그렇게까지 보진 않는다 하더라도 학생운동 진영이 손을 놓고 구경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학생운동 진영은 7월 3일 연세대에서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시국 대토론회'를 개최했다. 학생들은 민주정부의 10대 강령을 제안하면서 6월 항쟁의 투쟁 방식에 대한 반성에 임하였다." (강준만, 같은 책)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