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IVF ‘6개대 사태’에 대한 고찰(1)
/김용주
0. 들어가면서
“한국기독학생회(IVF·대표 김중안)가 창립 50주년 기념행사가 11월 4일 분당 할렐루야 교회에서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IVF의 전·현직 총무와 간사는 물론 학생, 학사, 이사들까지 5000여 명이 대거 참석했다. 그동안 ‘캠퍼스 복음화’와 ‘지성사회 복음화’를 기치로 내걸고 달려왔던 IVF는 지난 50년을 되돌아보며 감사와 회개의 시간을 함께 가졌다...(중략) 이어 한기수 이사는 "지난 '6개대 사태'로 IVF가 나뉘어지고 서로 상처받게 된 것에 대해, 이사들의 영적지도력이 부족하여 공동체가 하나 되는데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말해 행사장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박지호 기자, <복음과상황> 194호)
<복음과상황> 박지호 기자는 한국IVF 50주년 기념행사에서 한기수 이사가 ‘6개대 사태’를 언급하자 행사장이 숙연해졌다고 전했다. 그간 IVF의 아픈 상처인 ‘6개대 사태’를 언급하는 사례들이 종종 있어왔지만 IVF의 공동체 훈련 과정에서 사건의 전말에 대해 언급을 하거나 세세하게 설명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과연 ‘6개대 사태’는 무엇이며 어떤 사건이었길래 이렇게 5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까지 언급되어야 했고 IVF 내부적으로도 커다란 상처와 회개의 이유가 되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지난 몇 개월간 관련된 자료를 조사하고 이를 정리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 글을 통하여 ‘6개대 사태’의 시시비비를 가리고 그 사건 자체의 상처들을 파헤치기 보다는, 6개대 사태가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국내 정치적 상황과 한국 기독청년운동의 내부적인 문제들을 돌아봄으로써 진일보한 논의를 하기 위한 교두보로 삼고자 한다. 관련된 모든 분들이 만족할만한 자료가 될 수는 없겠지만 이러한 기록들을 정리함으로써 좁게는 IVF의 ‘사회참여’라는 이슈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하는 계기가 되고 나아가 프란시스 쉐퍼의 책 제목처럼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초석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1. 복음주의권의 사회참여 흐름
한국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볼 때 미국에서 수입된 신학을 토대로 삼았기에 태생적으로 다분히 친미적이며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해왔다. 허나 북미 복음주의권에서도 새로운 변화들이 일기 시작했고 80년대 군부독재 상황과 맞물려 사회적 이슈들에 대한 올바른 관점에 갈급했던 기독청년들에게 시나브로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이것이 앞으로 언급하게 될 '하나님나라' 신학과 ‘기독교 세계관’으로 대변되는 총체적 복음의 회복이며 로잔 세계복음화 대회에서 채택한 ‘로잔 선언’ 또한 그 열매라 할 수 있겠다. 이 부분을 정리함에 있어서는 주로 한동대 류대영 교수의 책 <한국 근현대사와 기독교>를 인용하려고 한다.
(1) ‘하나님나라’와 ‘기독교 세계관’
류대영 교수는 자신의 책에서 80년대에 보수기독교인들조차 불의한 정권에 대항해야 한다는 고민을 시작했고 그 신학적 근거를 '하나님나라' 개념에서 찾게 되었음을 지적한다.
“한국의 보수교회는 1980년대를 지나면서 전두환의 군사독재 횡포가 점점 더 심해지는 가운데 정교분리, 전도, 반공 동의 논리에 기대어 사회참여를 하지 않는데 대한 신학적 “명분”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구조적 악 앞에서 침묵한다는 것이 결과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누가 보아도 명백했다. 시대의 요청에 부응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느끼면서도 마르크스주의나 진보적 신학에 기초한 참여이론과 방법에 동조할 수 없었던 일부 보수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충성과 현실에 대한 참여를 동시에 보장하는 이론을 새로운 하나님나라 개념에서 얻을 수 있었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한국 보수교회의 새로운 이해는 1970년대 이후 조지 래드, 헤르만 리델보스, 게하더스 보스, 안토니 후크마 등 복음주의 신학자들의 견해가 국내에 소개되면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류대영, ‘한국 근현대사와 기독교’)
당시에 한국교회는 개인의 영적 영역에 국한시켜 죄사함과 영혼 구원을 설파했고 정치와는 무관한 전도와 해외선교에 집중했던 상황에서, ‘하나님나라’ 신학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충성과 현실에 대한 참여를 동시에 보장하는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고 이를 통해 복음전도와 사회참여의 두 영역을 통합시키려는 방향으로 진일보할 수 있었다. 또한 이러한 관심은 맑시즘에 기반을 둔 운동권 좌파와는 거리를 두되 현실 정치 문제에 대한 나름의 해답에 고심하던 한국 보수 기독교인들의 딜레마를 어느 정도 해소시켜주었다. 특히 북미의 보수적 복음주의자였던 반틸과 쉐퍼의 ‘기독교 세계관’ 저서들을 통해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인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이며 ‘삶의 전 영역’이 구원의 영향력 안에 있음을 확증함으로써 현실 사회참여의 근거들을 보다 견고하게 마련할 수 있었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1980년대에 성행했던 “기독교 세계관 운동”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관심은 1970년대부터 번역되어 소개된 쉐퍼, 반틸 등의 저술과 손봉호의 강연집이 읽히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1980년대에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IVP)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출간된 세계관 관련 각종 책들은 신앙과 학문의 조화, 성경적 세계관 등의 주제를 복음주의권 대학, 청년들에게 부각시켰다.” (류대영, 같은 책)
이러한 전향적 관점은 한국 기독청년 운동 깊숙이 전파되었고 이른바 총체적 복음의 정신은 - 복음전도에 힘쓸 뿐 아니라 사회악에 대항하고 소외계층의 현장에 그리스도인들이 성육신하는 것이 진정한 선교라는 - 1986년 <대학기독신문> 창간사를 통해서도 드러나 있다.
“1986년 10월에 창간되어 1980년대 후반 보수 교회 젊은이들의 사회참여를 이론적으로 주도했던〈대학기독신문>의 창간사는 하나님나라와 관련된 신학적인 재발견이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잘 알려준다.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제목의 창간사는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자로서 자신의 전인격과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받고 “그리스도인 됨”을 드러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복음전도에 힘쓸 뿐 아니라 사회악에 대항하고, “다양한 소외계층의 현장에 그리스도인들이 성육신하여 선교”함으로써 구체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대학기독신문>은 이것을 “복음의 육화", “하나님나라의 균형 있는 실현”이라고 정의했다. 하나님나라의 역사성, 복음의 총체성을 말하고 있었다. <대학기독신문>에 참여했던 복음주의적 젊은이들은 그들의 사회참여를 “참 인간해방운동”으로서의 “하나님나라운동”으로 정의하기까지 했다.” (류대영, 같은 책)
(2) 에큐메니칼 운동과 복음주의
로잔 언약을 설명하기에 앞서서 에큐메니칼 운동을 짚을 필요가 있겠다. 제1차 세계대전 후 기독교는 범세계적으로 교회 일치 운동이 일어났고 이 운동이 한 축에서는 세계 모든 교회가 협동하여 사회문제를 공동 해결하는 생활과 사업을 일으키자는 목소리가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에큐메니칼 운동에 소속된 교회들의 신학적 입장에 우려감을 표하던 복음주의자들은 그들과 분리되어 독자적인 대회들을 추진하게 된다.
“1942년 NAE가 창설된 이후 1949년 복음주의신학회(ETS)가 결성되었고 1952년 세계복음주의협의회(WEF)가 창설됨으로써 복음주의는 보다 더 조직적인 운동의 성격을 띄게 되었다. 그런데 1960년대에 들어와 교회의 사회참여가 첨예화되었던 1961년 WCC 뉴델리 대회, 특히 1968년 웁살라 대회와 1973년 방콕 CWME의 신학적 입장에 반대하여 복음주의자들은 독자적으로 세계대회를 개최하며 여러 복음주의 선언을 채택하였다. 예를 들면, 1966년 베를린에서 열린 복음전도 세계대회는 같은 해 WCC 제네바 '교회와 사회'(church and society) 세계 대회에 대응하여 개최되었고, 1974년 로잔 대회는 1973년 방콕 CWME에 대항하여 열렸으며, 1980년 파타야 대회는 같은 해 멜버른 CWME에, 1989년 마닐라 대회는 같은 해 산 안토니오의 CWME에 대응하여 개최된 것이다.” (‘에큐메니즘 A에서 Z까지’ 중 제13장: 신옥수, ‘에큐메니칼 운동과 복음주의’, 193쪽)
신학적인 차이 - 특히 칼 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인’ 개념을 수용하고 신앙적 회심을 부차적으로 치부한 것 - 에 의해 WCC에서 분리되기는 했지만 복음주의 진영 안에서 건전한 교리 위에서 교회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측면에서 전도 사역과 균형점을 찾으려는 노력은 에큐메니칼 운동의 긍정적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한다.
“중요한 점은 이들(복음주의자들)이 복음주의 운동의 정체성을 규명하고 그 한계를 지적할 뿐 아니라 에큐메니칼 운동의 흐름을 경계하고, 다른 한편으로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였다는 데 있다. 이들 가운데 빌리 그레이엄이 주도한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LCWE(로잔세계복음화위원회)에는 교회의 사화참여를 강조하는 에큐메니칼 신학의 관점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으며, 이는 1989년 마닐라에서 개최된 제2차 로잔 대회에서도 계승되었다. 이들은 복음주의 대회 가운데 복음주의의 방향을 제시해주는 가장 영향력 있는 복음주의운동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같은 책, 193)
(3) 로잔 언약
이렇듯 복음주의권의 독자적인 선교대회는 74년 로잔 대회에서 채택한 로잔 언약의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항목을 통해 사회참여의 중요성을 보다 가시화하였다. 당시 복음주의권의 젊은 지도자로 부상한 존 스토트가 초안을 작성했던 로잔 언약은 다분히 온건한 복음주의 진영 전반에서 복음 전도와 사회적 책임을 교회의 동등한 의무로 상정한 이른바 총체적 복음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하려 했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하나님나라의 역사성, 복음전파의 총체성에 관한 복음주의 세계의 새로운 이해가 온건한 형태로 잘 반영된 것이 1974년의 로잔 언약이었다. 스위스 로잔에서 개최된 세계복음화 국제대회의 선언적 협약으로 영국의 성공회 신부인 존 스토트가 초안한 로잔 언약은 전통적인 기독교의 신학과 가치관을 유지하면서도 변화하는 세계의 요구에 부응하려는 노력이 담겨 있었다. (중략) 전체 15개 항목으로 된 로잔 언약의 제15항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은 사회참여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잘 설파했다. 하나님이 온 인류의 창조주요 심판자이기 때문에 인류를 모든 종류의 압박에서 해방시키고 정의와 화해를 실현하려는 그의 뜻이 온 인류사회에 실현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따라서 언약은 그동안 이런 노력에 소홀했던 점, 그리고 때로는 복음전파와 사회적 관심이 상호 배타적이라고 여겨온 데 대하여 참회해야 했다. 또한 언약은 “사람과의 화해가 하나님과의 화해는 아니고 사회적 관심이 복음전파는 아니며, 정치적 해방이 구원은 아니다”는 단서는 달았지만 “복음전파와 사회, 정치적 개입 모두 우리 기독교인의 의무”라고 선언했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나라의 의를 불의한 세상 속에 전파해야 하며, 구원이 “개인적, 사회적 책임의 총체성 속에서” 기독교인들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제5항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말로 맺었다.” (남태일, 같은 책)
(4) 복음주의 진보세력의 성장
“로잔 언약은 국내에 즉시 알려졌으며 전통적 의미의 복음전파와 사회참여 사이에서 고민하던 보수적 기독교인들의 “숨통을 트게” 해주었다. 하나님나라를 사회참여와 관련하여 잘 정리했던 로잔 언약은 이전에 성서신학적 차원에서 하나님나라를 소개했던 개별 신학자들보다 더 큰 반향을 일으킬 수 있었을 것이다. 이와 아울러 로잔 언약을 주도한 스토트, 빠딜라의 책이 많이 소개되기 시작했다. 특히 사회참여적 청년들 가운데는 로잔언약을 비롯한 복음주의적 사회참여 선언들과 참여적 복음주의 신학자들을 공부하며 그 정신을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류대영, 같은 책)
로잔 언약은 80년대 민주화 투쟁이라는 한국의 상황에서 보수기독인들에게도 사회참여, 나아가 정치적 행동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논리를 제공해주었다. 이를 접한 기독인들은 복음주의 내부의 진보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를 낳았다. 특히 이후에 설명하게 될 ‘기독교문화연합운동’과 '복음주의청년연합', 월간지 <복음과상황> 창간 멤버들에게 있어 로잔 언약의 정신이 그 이론적 토대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복상의 발행인이었던 김회권 목사는 1985년 이승장 목사를 통해 로잔 언약이 전해졌음을 지적한다.
"이승장은 영국의 정통 복음주의 신학과 신앙, 그리고 로잔 언약 등을 한국에 소개하였으며 <복음과상황>이 창간되기 6년 전(1985년)에 ESF 서대문 지구를 중심으로 <소리>라는 무크지를 발간하여 그 창간호에 1974년 스위스 로잔 연약의 '사회참여 조항'을 번역해 실었습니다. 로잔 언약은 6년 후 복상 창간의 신학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김회권, <복음과상황> "우리가 주창하는 '복음'과 '상황'")
이렇게 전파된 로잔 언약을 시작으로 복음주의권 사회 참여의 세 흐름, 즉 보수, 중도, 진보파의 입장들이 한국 기독인들에게 전해졌고, 그것은 한국 복음주의권의 진보세력을 구축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후에 IVF 6개대에 속한 학생들은 지금은 널리 알려지고 공감대가 형성되었지만 당시에는 급진적 입장이었던 로날드 사이더와 르네 빠딜라의 사회참여 방향을 수용한다.)
“세계복음주의권은 사회참여 문제와 관련하여 빌리 그래함을 중심으로 한 보수진영, 바이어하우스, 세계복음주의연맹 등의 중도파, 그리고 미국의 로날드 사이더, 아더 글래서, 인도의 비네이 사무엘, 남미의 르네 빠딜라 등의 진보파로 나뉘어져 갔다. 한국의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주로 보수파와 중도파의 영향을 받는 가운데, 진보적 입장도 소개되기 시작했다. 특히 빈부격차, 경제정의와 관련된 로날드 사이더의 기독교 윤리관은 손봉호에게 영향을 주었고, 상황화와 해방신학에 대한 하비 콘의 전향적인 해석은 이만열이 민중신학을 높게 평가하고 민주화 민중운동에 참여하는데 큰 격려가 되었다. 이들 진보적 해외 복음주의자들의 신학은 행동적 사회참여를 고민하며 모색하던 이문식, 박철수, 강경민 등 젊은 복음주의자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1986년에 조직된 최은석, 이승재, 박문재 등의 기문연, 이종철을 주축으로 그해 10월에 창간된 <대학기독신문>,1987년 11월 대통령 선거를 맞아서 결성된 “공정선거감시와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복음주의청년,학생협의회”,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1988년 3월에 결성된 복음주의청년연합회 등은 모두 그런 영향의 구체적인 결실이었다.” (남태일, 같은 책)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