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lieve that a great sense of humor save the world."
(탁월한 유머 감각이 세상을 구원할거야.)
오늘 페북에 올린 글이다. 다소 설명이 필요한 글이 될 것 같다. 최근에 나는 영화 한 편과 책 한 권을 봤다. 먼저는 책을 소개할까 싶다. <언제나 새로웠어요>라는 제목의 책인데, 이 책은 케이 재미슨이라는 정신과 교수가 죽은 그의 남편을 기억하며 쓴 것으로, 사실 저자의 이전 책인 <조울병 나는 이렇게 극복했다. An Unquiet Mind>을 인상적으로 읽었기에 이 책은 그로 인해 집어들게 된 케이 재미슨의 두번째 책이라고 볼 수 있다. 두 책의 저자인 그녀는 정신과 교수이기 이전에 중증 조울증 환자이기도 했으며 이 정신병으로 인해 오랜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대중의 사랑을 받는 저자가 '되었다'. 사실 그 길고도 고통스러웠던 분투의 과정에는 친오빠나 전 남자친구, 그녀의 정신과 의사 등 숨겨진 조력자들이 많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녀는 자신의 병을 이겨내는 데 남편의 도움이 컸다고 말한다. 그녀가 회상하는 남편은 섬세한 의사이며 뛰어난 '유머감각'의 소유자였다.
"리차드는 사랑뿐만 아니라 사랑과 함께 찾아온 나의 조울증이라는 병을 날마다 조금씩 더 겪는 것도 낯설어했다. 그는 그런 상황에서 대단한 강인함을 보여주었다. 정말 끔찍한 상황 속에서도 나를 웃게 할 수 있었다. 그는 극진히도 나를 사랑해주었다. 한번은 심한 말다툼 끝에 숙모에게서 선물로 받은 도자기 토끼인형을 침실 벽에다 집어던진 적이 있었다. 사실 지금은 왜 그랬는지 조차도 기억이 안 난다. 귀여운 토끼 '눈 뭉치'는 산산조각이 났다. 핑크빛 귀 한쪽과 조그마한 발을 제외하고는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깜짝 놀란 리처드의 얼굴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웃음을 보였다. 나를 더 자극하지 않으려고 등을 돌리고 웃음을 참고 있었다. "리튬(조울증 약)을 너무 많이 복용했어" 한참 후에 말을 이었다. "표적이 빗나갔잖아." 결국 우리는 웃음보가 터져서 바닥에 쓰러졌다. 나의 분노는 리처드의 유머를 당할 수 없었다." (케이 재미슨, <언제나 새로웠어요>)
다음으로 언급하고 싶은 건 영화. 이미 여러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당신을 오랫동안 사랑했어요 Il y a longtemps que je t’aime>란 영화다. 주인공인 줄리엣 역을 맡은 크리스틴 스콧 토마스(최근엔 '사라의 열쇠'로 많이 알려진)의 신들린 연기가 영화의 몰입도를 더욱 높여주기도 했다. 영화에서 줄리엣은 15년만에 감옥에서 출소하여 동생 레아의 집에 머문다. 그녀는 15년 전 자신의 6살난 아들을 죽인 살인혐의로 구속되었고 남편의 불리한 증언에 의해 징역이 확정되었다. 재판 과정에서 그녀는 단 한 마디의 변호도 하지 않았다고 영화는 설명한다. 레아는 그녀를 증오하게 된 부모님의 반대로 언니와 연락조차 못하고 지내다가 출소 후에야 만나게 되고 그녀를 집으로 데려온다. 다소 충격적인 이 사건에 있어, 영화의 말미에 드러난 진실은 이렇다. 사실 줄리엣의 아들은 고통스러운 병을 가지고 태어났고 그 증상을 의사인 그녀가 가장 먼저 발견하게 된다. 아들이 고통 가운데 죽어갈 것을 염려한 그녀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그 아들과 행복한 하루를 보낸 후 아들에게 약물을 투여해 죽게 만든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죽음이 예정된 아들'이라는 그녀의 현실이, 그녀에게는 감옥이나 다름 없었다고 스스로 고백한다. 그래서 그녀는 아들에게서 고통을 제거하고 자신은 물리적인 감옥으로 걸어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런 이유로, 그 오랜 시간동안 줄리엣은 침묵했고 경직되어 있었고 퇴소 후에도 여전해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레아의 집에 머물면서 마주치는 레아의 어린 딸들을 속으로는 애뜻해 하면서도 실제로는 일부러 거리를 두었고 카페에서 우연히 만났던 남자와의 섹스 후에도 그 표정은 아무 감정을 느끼지 못한 것처럼 건조해 보인다.
그런 줄리엣을 레아의 학교 동료 교수인 미셸이 지켜본다. 미셸은 '위트'가 넘치는 중년 남자다. 그 또한 아내와 이혼한 지 10년이 되었고 영화는 그 이혼이 순탄하지 못했음을 암시한다. 친구들과 함께 별장으로 놀러가서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술취한 한 친구가 줄리엣의 과거를 집요하게 물어보고 참다못한 줄리엣은 자신이 아들을 죽여서 감옥에 갔노라고 덤덤히 말한다. 친구들은 집요한 물음에서 벗어나려는 농담으로 치부하여 다함께 크게 웃어넘기지만, 미셸은 그녀의 말이 진실임을 직감한다. 그 후로 자주 미셸은 줄리엣 주변에서 그녀에게 바보같은 농담을 던진다. 미셸은 조금씩 그 위트에 반응한다. 감정이 없던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어느 순간, 두 사람은 친구가 되었다. 그는 시도때도 없이 농담을 날리는 느낌이다. 그 농담들은 줄리엣을 웃게 만든다. 그와 시간을 보내던 줄리엣은 어느 순간 레아의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고(영화에서는 피아노를 함께 치는 장면으로 상징된다) 결국 영화의 말미에 레아에게 자신의 아들을 어떻게 죽이게 되었는지를 15년 만에 처음으로 고백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그리고 나는 이 모든 과정의 중심에 '미셸의 유머'가 자리잡고 있었다고 믿는다.
그런 얘기다. 내가 하고픈 말, "탁월한 유머가 세상을 구할 것이란 믿음"은 그런 얘기였다. 여기에서 '세상'은 '세상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말한다. 지금도 세상은 신음한다. 구조적인 악에 의해 고난을 당하거나, 타인에 의해 깊은 상처를 입었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심감에 빠졌거나, 어릴 적 트라우마로 인해 평생 분노에 휩싸여 살거나 간에... 그 깊은 고통의 수렁에서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다. 우리가 추상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 막연히 나무나 숲을 관망하는 것과는 별개로 사물을 아주 가까이에서 직시할 때. 그런 가까운 거리에서 세상을 바라볼 때 나는 자주 뒤틀려진 관계의 실타래를 발견하곤 한다. 굳어진 관계, 굳어진 사람, 굳어진 대화, 굳어진 삶의 터전들. 결국 그 사이사이를 '사람'이 지나 다닌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굳어진 얼굴에 던져진 탁월한 유머 몇 개가 그들에게 실소를 자아낸다. 틈이 생기고 그 틈을 통해 굳어진 무언가가 갈라진다. 그게 세상을 바꾸는 본질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쩌면 그게 본질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 요즘 나는 그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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