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파이퍼는 완전히 확신하고 있다...그는 자신의 관점으로 보는 '하나님의 의'가 '언약적 신실함'보다 더 깊은 의미이며 '법정적' 함의보다 더 깊은 의미라고 주장한다. 그는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관심이라고 주장한다. (83)
'하나님의 의'가 실제로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관심'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학자는 내가 알기로는 옛관점, 새관점, 가톨릭, 개혁주의, 복음주의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폭넓게 지지받는 관점은 체다카/디카이오쉬네가 일반적으로는 '규범에의 순응'을 의미하며, 이 의미가 하나님의 '의'라는 맥락에서 사용될 때 가장 개연성이 높은 것은 그것이 하나님 자신이 세운 규범, 다른 말로 하면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충실함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패커는 이렇게 말했다. "이 본문들(이사야와 시편)이 압제받는 자신의 백성들을 하나님이 변호하시는 것에 대해 그의 '의'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것이 그들과 맺은 하나님 자신의 언약적 약속에 신실하심을 보여주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84)
파이퍼의 해석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는 전가(imputation) 교리 체계 안에서, '하나님의 의'에 대한 그의 특이한 정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가 전혀 분명하지 않다. 만약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관심'이라면 이 의를 믿는 사람에게 전가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86)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내내 창세기 15장을 반복해서 인용하며, 이 사실은 바울이 말하려는 내용을 강력하게 암시해준다...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상을 알게 된다.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을 통하여, 전 세계를 축복하시려는, 하나님의 단일한 계획'. 이것이 내가 바울에 관한 글을 쓰면서 줄임말로서 '언약'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이다... 이 위대한 내러티브가 바울 자신에 따르면 창세기 15장, 신명기 27-30장, 다니엘 9장 같은 '언약적인' 본문들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87)
로마서 3장 1절~8절의 주제는 하나님의 속성과 사람의 실패에 대한 일반적인 논의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불충성'은 그들의 믿음의 '결핍'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요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하여 세계를 축복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지만 이스라엘이 그 위임에 충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파이퍼에 반대하여 로마서 3장 5절의 "디카이오쉬네 떼우'를 '언약적 신실함'으로 번역하여 이해할 수 있는 이유이다.(88-89)
파이퍼는 그의 전체적인 논의 안에서 법정적인 비유의 중요성을 격하하려고 시도하는데, 이는 극히 설득력이 없는 시도이다...첫 번째에서 다말, 두 번째 예에서의 다윗이 소유하게 되는 '의'의 상태는 히브리 소송에서 법정이 그들이 옳다고 판결을 내렸을 때 무죄를 선고받은 피고나 유리한 판결을 받은 원고가 소유하게 되는 상태로서, 절대 그 재판을 판결한 판사의 '의'와 동일한 것이 아니다. (89-90)
파이퍼는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 자신의 영광에 대한 그의 관심으로 본다. 이는 이를테면 하나님의 일차적인 관심이 결국 자신에게로 귀착된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당연히 그러한 면이 존재한다. 하지만 창조로부터 언약을 거쳐 새 예루살렘까지 흘러가는 위대한 성경 이야기는, 자신이 아닌 그 외의 모든 것의 번영과 안녕에 대한 하나님의 흘러넘치는, 인자한, 창조적인 사랑에 대해서, 그렇게 불러도 괜찮다면 하나님의 관심에 대해서 끊임없이 이야기한다...물론 하나님 자신의 영과엥 대한 관심과도 연결되어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그와 반대되는 하나님의 외부를 향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치유하시고 회복하시는 사랑과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이라는 개념이 신적 나르시시즘의 형테로부터 구출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특별히 삼위일체 하나님이 언제나 자격이 없는 사람들, 자격이 없는 이스라엘, 그리고 자격이 없는 피조 세계를 향해 풍성하고 인자한 사랑을 끊임없이 쏟아붓고 계시기 때문이다. (92-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