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Posted
Filed under 컨텐츠/서평

나는 대체로 내 신앙의 색깔이나 정치 성향, 개인적 기호 등을 미리 이야기하는 것이, 상대방과의 소통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해서, 미리 고백하건대 나는 도널드 밀러 '빠'다. 복음주의권에서 대중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글쟁이들이 많겠지만 그중 개인적으로는 필립 얀시의 글을 가장 좋아하고 그 다음으로는 도널드 밀러를 꼽는다. 제목부터가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던 책, <재즈처럼 하나님은>으로 시작해서 쏟아지기 시작한 그의 책들은, 국내에 번역서가 나올 때마다 마치 유명 맛집을 찾아내서는 요리들을 '흡입'하듯 서점에서 사자마자 단숨에 읽어치우곤 했다.

본서도 예외없이 출간하자마자 집어들었다. 사실 이 책은 5년 전에 나온 <하나님의 빈자리: To Own a Dragon>의 개정판이라 상당 부분이 어디선가 읽은 듯한 내용이었지만, 5년만에 다시 읽은 이 책은 마치 '5년 전의 내'가 '지금의 내'가 아니듯 그 느낌도 과거와는 사뭇 다르게 다가왔다. 5년 전의 나는 아직 충분히 아빠의 위치에 있지 않았고 지금은 어느 정도의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6살난 아이의 아빠가 되었기 때문이었달까, 아니면 그 긴 시간 동안 시나브로 내가 세상을, 공동체를, 인간관계 자체를 바라보는 어떤 틀이 바뀌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이 책을 읽는 느낌은 많이 달랐다. 조금 무거웠다고 해야 할까.

대체로 나는 그의 책 특유의 색깔을 좋아한다. 수식어를 장황하게 나열하자면, 그의 '위트에 곁들여진' '톡쏘는 듯한' '신선한 관점들'이 좋다. 현대적인 감성에서도 그 기저에 깔려 있는 보수적인 틀이 다분히 안전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아마도 복음주의권에서 널리 읽히는 이유는 이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게다가 훈계하거나 어떤 입장을 관철시키기 위한 유의 대화 자체를 싫어하며 독자와 같은 눈높이에서 항상 이야기를 풀어 가는 그의 여유로운 스타일도 개인적으로는 참 매력 포인트다. 무엇보다 그의 글은 밝아서 좋다.

하지만 본서는 달랐다. 시종일관 빵빵 터지는 위트를 유지하기엔 조금은 아픈 자신의 이야기를, 그 내면의 이야기를 드러내야 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책장을 넘기면서 간간이 보이는 그의 농담이 오히려 안쓰러운 기분마저 들곤 했다. 본서에서 그가 관심을 가진 주제는 바로 '아버지의 부재'였다. 실제로 밀러의 아버지는 어릴 때 그와 어머니를 떠났고 그는 사춘기 시절 내내 남성성의 현현(삼촌, 친구의 아버지, 남자 선생님 등)을 찾아 헤맸다고 말한다. 저자는 자라면서 한동안은 전혀 인지하지 못하다가 삼십대가 되어서야 '아버지의 부재'가 크게 다가왔고, 그로 인해 어느 시점에서는 자신에게 남긴 상처들을 직면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는 자신이 주체할 수 없는 거친 감정에 휩싸였던 강렬한 기억을 떠올렸는데 그 기억이 나에게도 아프게 다가왔다.

"제작자는 부모 없는 코끼리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촬영했다.(중략) 발정기에 있는 두 코끼리가 만날 때면 나무뿌리가 뽑힐 정도로 큰 소동이 벌어졌다. 피범벅이 되어 가족도 동족도 없이 홀로 각자의 길을 가는 두 마리 코끼리에게서 문득 내 모습을 보았다. 코뿔소를 죽인다거나 그 비슷한 일도 한 적이 없지만, 나도 도무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몰랐던 때가 있었다. 때로는 분노, 때로는 우울, 때로는 들끓는 성욕 같은 것을 느끼면서도 그 감정이 무엇인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던 때가 있었다. 무작정 누군가를 죽이고 싶고, 어떤 여자와 자고 싶고, 술집에서 만난 남자를 때려눕히고 싶었다. 그리고 어떤 감정들을 주체하지 못해 정말이지 힘들었다. 인생은 사건들과 마찰하는 혼란스러운 감정들의 연속이었다. 나는 스스로를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여자에게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하는지, 경력은 어떻게 쌓아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어떻게 남자가 되는지 몰랐다."

우리는 자주 과거 기억, 특히 부모와의 관계를 돌아보면서 우리의 현재의 모습을 성찰할 수 있지만 많은 이들이 이런 행위에 반감을 갖기도 한다. 흔히 심리학이나 정신분석으로 대변되는 이런 접근에 사람들이 반감을 갖는 이유는, 마치 지금 나의 문제들이 부모와의 관계에 엮여 있고 과거의 (주로 나쁜) 기억, 사건 때문에 지금의 내가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성장하지 못한다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듯 하기 때문이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고 내가 지금 어떻게 행동하는가,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 따라 내 미래는 달라질텐데 과거의 상처를 추적하는 작업들은 나를 나약한 존재로, 절대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할 존재로 가둬 두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신분석, 심리학이 아니더라도 일상적으로 접하는 혈액형, 기질론, 성격 분류법에도 발끈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도널드 밀러는 자신의 과거를 정직하게 돌아보면서 아마도 아버지의 부재가 지금의 자신에게 준 영향에 대해 인지하게 되었고 그 문제를 가지고 오랫동안 씨름을 해 온 듯하다. 그리고 그의 글쓰는 재능을 이용해서 그 노력의 궤적들을 하나의 형태(책)으로 만들어 냈다. 그래서인지 서문에도 썼듯 이 책은 밀러가 어떤 책보다도 쓰는데 오래 걸렸고 쓰면서도 힘들어했다고 한다. 나는 그의 책이 증명하듯 과거를 들춰내는 것과 과거를 묻어 두는 것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주의 깊게 관찰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의 사적 역사를 돌아보고 그 아픈 기억들을 짚어 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아픈 기억들은 서른이 넘어서까지 우리의 삶을, 일상을, 무의식을 괴롭히곤 한다.

우리는 자주 타인이 아무렇지 않게 그냥 웃어 넘기는 주변 사람의 특정한 행동에 흥분하여 지나치게 화를 내거나 공격적인 반응을 취하기도 한다. 직장 상사에게 지나치게 높은 윤리의식을 요구하고 그 기대치에 미치지 못할 때 그를 맹비난한다. 아내나 여자 친구가 아무렇지 않게 하는 사소한 거절에도 마치 내 전존재가 거부된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백화점이나 식당에서 점원에게 홀대당하거나 서비스를 충분히 받지 못했을 때 나도 모르게 '뚜껑이 열리고' 선후배의 날카로운 비판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해서 몇 주동안 마음 앓이를 할 때도 있다. 이 모든 감정의 문제를 부모 이슈로 환원시킨다는 건 무리가 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부모의 부재'라는 이슈가 내 안에서 매순간 절실하게 싸워야 할 정서적 그 무엇이기도 하다.

조금 엉뚱한 얘기지만, 나는 살면서 거의 유일하게 애정을 넘어선 질투심마저 느낀 존재가 있었는데 그는 다름아닌 정혜신 선생이었다. 글로 처음 알게된 이후로 블로그, SNS나 강의를 통해 접한 그녀는 정말 완벽해 보였다. 지성과 감성의 조화, 따뜻하면서도 합리적인 어머니상 등등, 뭐든 좋은 미사여구가 있으면 다 갖다 붙이고 싶었다. 그러다가 작년에 우연히 그녀의 인터뷰 기사를 읽던 중, 그녀가 7살에 어머니가 암 진단을 받고 돌아가실 때까지 '어머니의 부재'를 경험했고 자신은 아들 출산을 기다리다가 나온 환영받지 못한 딸이었으며 새 엄마와는 마음을 나눈 적이 없었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 그녀의 넘치는 사랑과 마음의 여유는 부모로부터의 충분한 사랑에 기인했으리라는 막연한 짐작과 달리 그녀는 정신과 전공의 시절 월급의 절반을 정신분석에 썼을 만큼 내면의 힘든 시기를 보내야 했다.

하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그녀는 쌍용차 해고자 치유 센터인 '와락'을 설립하고 '마인드프리즘'을 통해 직장인들을 위한 집단 상담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등 사회적으로 결핍, 부재를 채우는 엄마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최근에는 세월호 참사로 인해 힘들어하는 희생자 가족들의 심리 치료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했다. 도널드 밀러도 이 책을 쓰고난 직후 '멘토링 프로젝트'를 설립하고 아버지 없는 소년들에게 사회적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thementoringproject.org) 이 둘은 모두 자신의 결핍을 통해 청소년, 청년들에게 부모의 부재가 채워지면 그들의 인생이 완전히 다르게 바뀔 수 있음을 깨달은 것 같다. 도널드 밀러는 자신의 삶에서 몇몇 어른들이 곁에 없었다면 음주나 마약에 빠지거나 도둑질을 해서 감옥에 갈 수도 있었으리라고 고백하곤 했다. 솔직히 나는 '상처입은 치유자'라는 말을 심정적으로 불편해하는 편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꼭 해 줘야 한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정혜신 선생과 더불어 본서의 저자 도널드 밀러를 꼽고 싶다. 이 책이 부디 그런 이들이 많아지는 역할을 해내길 바라 본다.


*뉴스앤조이 기고글: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196829

2014/06/03 21:33 2014/06/03 2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