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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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Short Notes)
2002. 12. 26. ~ 2003. 1. 6.


공포의 외인구단 1: 마동탁과 오혜성

"공포의 외인구단"은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 강하게 남아있는 만화다.

마동탁.
그는 천재적인 감각을 타고 났으며,
치밀한데다가 노력파이기도 하다.
엄지와의 결혼을 위해 100타석 연속 안타라는
'선물'을 내걸고 혼신의 힘을 다해 목표를 달성하고
결혼이라는 목표 또한 얻게 된다.
그러나 이내 얻은 것에 대한 가치를 잃고
또다시 다른 목표에 자신의 정신을 집중한다.

오혜성.
그는 관계 중심적이다.
물론 타고난 운동신경이 있지만,
계획하고 노력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엄지를 만난 순간 사랑하게 되고
그에겐 그녀가 신이며 그녀가 좋아하는 것들이
그의 신앙이 된다.
'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면 뭐든지 한다.'...
그에게 있어 목표는 그녀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한
도구일 뿐 자체로는 별 의미가 없다.

야구.
마동탁에게 야구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에 다다르기 위한 끊임없는
도전의 대상이지만,
오혜성에게 야구는 사랑하는 사람이 기뻐하는
일들 가운데 하나인 도구적 가치에 불과하다.

사랑.
마동탁에게 사랑은 소유의 대상이며
일단 달성하고 나면 그 소중함은 사라진다.
오혜성에게 사랑은 삶의 본질이며
그것을 제외하고 나면 다른 모든 것은 무가치하다.

엽서.
고등학교 때 즈음.
까맣게 이 만화를 잊고 지내다 팬시점에서
공포의 외인구단 엽서를 봤다.
오혜성이 입술에 장미를 물고 있는
눈은 초점이 흐려진 그림자 처리가 되어있는
전체적으로 어두운 톤의
스케치 밑에 그렇게 쓰여 있었다.

"오혜성, 사랑의 정신병자."

사람들은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면 정신병자 취급을 한다..

postscript) 마동탁의 기질을 가진 나는 이 엽서가 내 뼈 속 깊은 곳에 각인되어

MBTI의 저주로부터 나를 건져내었다.

 

 

 

who am i.

태어날 때부터 각인된 유전자의 조합?
나면서 겪은 경험들의 집합체?
혹은 그것들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판단자?
행동하는 대로 규정지을 수 있는 의지적 자아?
왜곡된 하나님의 형상?
몸부림치는 죄인?
일관된 사고의 체계를 가진 비일관적 행동양식의 피조물?
본능을 억압하는 동물?
엄한 윤리적 잣대를 세상에 들이대는 심판관?

postscript) 나라고 생각하는 그대, 대답해보라!

 

 

 

크리스마스 묵상 2

분주한 도시의 일상을 뒤로한 채
이튿날 아침에 그 분을 찾고 싶다.

처음 이 세상에 오시던
그 저녁을 기억하시는지.

건조하고 추웠던 그 밤과
말구유 속의 냄새도.

처음으로 아버지 곁을 떠나
낯선 죄의 땅에 두 발을 내딛던
그 구속사의 시작점을.

무엇보다 난..
알고 싶다.
아니 알고 있지만, 내 입으로 묻고 싶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냐고.
나 같은 사람에게
당신의 임재가 과연 가치있는 일이었냐고.

postscript) 찬양받기에 합당하는 말.. 정확한 표현이다.

 

 

 

내 속엔...

습한 기운이 느껴지면
내 속에 나를 지탱하던 10마리의 구렁이들이
몸을 비틀며 나를 뒤흔들어 놓는다.

10마리의 구렁이들은 제각기
자신의 독특한 생각과 몸짓과 행동으로
내 안에서 자기들을 표현하고
나는 혼란 속에 심한 현기증을 느끼며
통제력과 자제력을 잃곤 한다.

이젠..
그 10마리 중에 적어도 일곱은..
목을 비틀어 숨을 끊어놓고 싶다.

나에게도 생존본능이 있다.
다중인격을 가지고 습한 환경이 찾아올 때마다
몸부림치며 넋이 나간 사람처럼 사는 것보다는
살인이란 죄명을 쓰고 평생을 사는 것이 유익하다.

postscript) 내가 누군가의 목을 비틀 위인이 아니라는 것..

그것이 나의 비참이다.

 

 

 

한 해를 마감하며..

내 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린 한 해였다.
노력했지만 힘든 일도 많았고,

그 만큼 올 한 해를 두고는
감사할 수 없을거라 생각했다.

한 해가 시작되면서
난 눈과 귀를 막은 채
한 곳만을 바라보며 달려가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며
자신을 합리화시키며
그렇게 정해진 길로만 가기를 고집했다.

결국 내 삶의 중요한 순간들이 그랬듯이
내가 고집하던 길은 뒤집혔고
나에겐 불안정한 일상이 시작되었다.

지금 난 한 해를 마감하며
그 불안정하고 힘든 시간들을
감사한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제 멋대로 발길질을 하며
이리저리 발 닿는대로 맘 내키는대로
계획하며 달려갔던 내 삶에
날선 검이 내 심장 깊은 곳에 들어왔다.

난 그 검에 의해 고정되었고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다.

곧 안정이 찾아 올 것이다. 곧..

postscript) 곧 새 삶이 시작된다..

 

 

 

깊은 한 숨.

깊은 한 숨을 쉬고.
두 번째 깊은 한 숨을 쉬고.
세 번째 깊은 한 숨을 쉬고.
네 번째 깊은 한 숨을 쉬고.
다섯 번째 깊은 한 숨을 쉬고.
여섯 번째 깊은 한 숨을 쉬고.
일곱 번째 깊은 한 숨을 쉬고.
....
....
일천 번째 깊은 한 숨을 쉬고 나면.

구멍난 풍선처럼.
조용히 표면에 가라앉아.
작은 숨소리와 함께 사라져 버리고 싶다.

 

 

 

christmas eve

 

밤새 술을 마셨다.

그러지 않으면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All I need is..

<Love>
아이엠샘(I am Sam)이란 영화에서
가장 여운이 남는 장면.
그 중 하나가 딸이 흔들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말하는 비틀즈의 가사..
"All I need is love."

<Pain>
다른 하나는,
여자 변호사가 발로 문을 부수고 들어가자
방 사이에 접은 종이로 쳐놓은 벽.
그 안에서 눈을 마주치지 않고 말하는 샘..

<All I need is..>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상처받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들
혹은 상처를 딛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Desire>
결국 누구에게나 삶의 마지막이 찾아오며
나에게도 동일한 시간이 올 것이다.
그 이후에 우리는 서로 명확하게 보고 듣고
말하고 살아갈 것을 믿지만.
이미 내 안에 심겨진 소중한 것들을
난 힘들더라도 보존하고 키워가야 한다.

<Real Life>
결국 종이로 접은 벽을 허무는 것은
순전한 사랑을 하고 있는 상처받은 "샘"이 아니라
상처를 삭이고 지친 몸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처세에 익숙하지만 변화를 소망하는
"여변호사"다.

postscript) 세상을 바꿀 순 없다. 단지 내가 세상에 맞춰지기 늦은 것 뿐이다..

 

 

 

Love is...(3)

 

사랑은
삶은 달걀을 먹는 것과 같다.

삼키려고 애쓰면
가슴이 져미면서
목이 매여 눈물이 난다.

postscript) 나는 삶은 달걀이 싫다.

 

 

 

새해 아침

사람들은 반복적인 일출과 일몰을
'날'이라 말하고
그 반복들을 모아다가
적당히 가른 후에
모자라는 날들을
어떤 때는 더하고 어떤 때는 뺀 후에..

한 해를 만든 후.
집안의 정치를 위해 제사장같은 가부장에게
그 권력을 넘겨주어 친히 제사를 지내도록
권하여 한 해의 시작일에 찬란한 제사로 조직원의
단결을 도모한다.

어찌보면 마지막 날이나 새 해 첫 날이나
똑같은 하루인데, 역시 인간은 창조물 속에서
어거지 창조를 이루는데 탁월한 재능이 있다.


좀더 까탈스런 반응을 보이려다
시대의 요구에 영합하는 좋은 사람이 되기로
결정한 나는,
어거지 나눔으로 시작된 새해의 첫 날에
살아온 날들을 되돌아보고
살아갈 날들을 짚어보는
묵상의 시간을 가지기로 결정했다.

삶은 살수록 지겹고, 어렵고 힘들다.
하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루 노동의 힘든 시간 이후에 찾아오는 쉼이
더 행복하게 느껴지듯.
그 노동의 댓가가 눈 앞에 펼쳐질 때 얻게 되는
삶의 가치가 크듯.

영화 속 대사처럼 "삶은 아름답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행복한 순간보다는 자주 찾아오는
고통들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다.


postscript) 왜, 재수 없어요?

 

 

 

살면서 여러가지 공포가 있었지만
"늪"이란 녀석은 참 무서운 구석이 있다.

외부의 힘이 아니면
벗어날 수 없다는 공포에 더하여,
벗어나려고 노력하면
더 빨리 가라 앉는다는 것이다.

극단적인 두려움은 바로
노력과 빠져드는 속도의 반비례 관계에 있다.

그 아름다운 곡선에서 나는 섬뜩함은 느낀다.

 

postscript) 난 '이런 류'가 싫다.

 

 

 

죽음 2

죽음은 소멸이다.
소멸은 또 하나의 커다란 공포다.

소멸의 섬뜩함은
당사자와 상대방 모두에게 영향을 준다.

당사자에겐
더 이상 자신이라 여기는
부단히 사고하는 유일한 존재의 소멸에
대한 공포이며,

상대방에겐
더 이상 어떤 외적인 자극을 주어도
반응하지 않는 당사자의 소멸에
대한 공포이다.

비존재과 무반응.
이 두 가지는 인간의 비참함의 본질이다.


postscript) 죽음이 늪보다 덜 공포스런 이유는 죽음 자체가 비본질이기 때문이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죽음 자체가 비존재다.

 

 

 

투명한 방에 갇히다!

잘 몰랐었다.
처음엔 그냥 쳐다보고 있었다.
주변은 아주 가까웠고 손에 잡힐 듯 했다.

난 투명한 벽 너머로 많은 것들을
여과없이 볼 수 있었고,
결국 상황 파악이 끝나면 뛰어들겠다 다짐했다.

나갈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리 어렵지 않아 보였다.
주변은 아주 가까웠고 손에 잡힐 듯 했다.

벗어나려 몸을 움직인 나는
벽에 이마를 부딪혔다. 이 벽을 허물리라.
주변은 아주 가까웠고 손에 잡힐 듯 했다.

결국 난 알게 되었다.
내가 투명한 방에 갇혀 있었음을.
주변은 아주 가까웠고 손에 잡힐 듯 했다.


postscript) 갇힌 사람이 처음 해야 할 일은 마음의 평정을 찾고

계속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다.

2003/01/06 19:10 2003/01/06 1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