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기독교
실존적 성경읽기라고 할 때 가장 큰 이슈는 내 삶의 목적성이다. 내 삶의 의미와 신앙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야 하는데 그 연결고리가 생각보다 견고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
예수가 구원을 선포하고 재림을 약속한 후 초대 교회 시대를 지나 중세, 근대, 현대의 이시점까지 흘러왔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행위, 예수를 영접함, 영혼 구원, 타 종교와의 영적, 육체적 대결 자체에 집착했던 교회는 시간이 지나면서 사회참여, 앙가주망, 인격적 사귐, 통전적 복음에 대한 이해를 발전시켜왔다.
.
이 모든 게 어떤 의미에서는 시간의 함수에 기인한 것 같기도 하다. 예수가 메시아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는 선언은 '운동', '전략'으로서의 기독교에서 이천년을 지내면서 '삶의 양태'로서의 기독교에 대한 고민으로 전환되었다. 타자(비기독인)로 하여금 믿음의 가부를 결정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믿음의 본을, 믿음의 삶을 정착시키는 과정이 포함되었다. 
.
나아가 타문화에 대한 긍정, 존중, 그리고 서구의 세속화에 따른 재복음화 필요성 대두 등 복음화라는 이슈는 개념이 넓어지고 그만큼 집중력은 약해졌다. '무식한 추동력'은 '사려깊은 주춤함'으로 돌변했다.
.
대다수의 신앙인들은 타문화권 복음전도를 위한 선교사로서의 사명이 본인에게 있다고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그게 정말 시급했다면 교회 자체가 자기 몸불리기 신학을 고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교회는 자기가 속한 '지금 여기'에서 '그리스도인다움'을 강조한다.
.
결국 우리는 세상의 방식과는 구별된 자로 (하지만 세상 안에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직장을 다니고 사회에서 성취를 하고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거나 발전시키면서 살아간다. 자동차를 만들고 태블릿을 사고 인터넷을 이용하고 영화를 만들고 그 안에서 가치를 발견하고 감동하려고 노력한다.
.
이것이 예수의 초림과 하나님 나라 사이에 위치한 우리 세대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불완전한 이 땅에서 우리는 무엇을 향유하고 있는 것일까. 혹은 이 상태를 지속시키는 신적 의미는 무엇일까. 분쟁, 전쟁, 정치적인 불의함, 차별, 사람들 사이의 소외, 마음이 닿지 않음... 이 부족함을 견디어야 하는 실존적인, 나아가 신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
우리가 '지금 여기'를 강조할수록 불완전한 세상에서 이천년을, 그 이상을 살아야하는 당위에 관한 신학은 흔들린다. 이것을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한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앙에 대치시킨다면 우리는 삶의 양태를 바꿔야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의 삶의 온전함으로 신적 의미를 찾으려 한다면. 우리는 이 중간기가 담고있는 신적 의미에 대해 더 깊은 질문과 이해를 필요로한다.
.
그리고, 나는 후자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2016/10/03 15:22 2016/10/03 15:22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기독교
나의 고통, 세상의 고통.
이것들이 인식될 때마다 신앙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들이 들 때가 있다. 예수가 구원을 이야기한지 이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아직 완성되지 않은 구속사. 그 어딘가에 태어난 나, 우리. 그리스도인.
.
90년대 후반,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선교사명, 선교명령은 새 밀레니엄이 오기 전에 땅끝, 즉 10/40창에 속한 미전도 종족에게 복음이 들어가야만 선교과업이 완성된다고 믿었고 그 연장선 상에서 많은 선교사들이 미전도 종족이 사는 곳으로 파송되었다. 그 와중에도 선교명령에 부합하지 않는 곳에 여전히 기독교인들은 선교라는 이름으로 타문화 속에 제국의 자본주의 문화를 심었다.
.
한때, 'already but not yet'이란 구속의 표준 교리를 알고 있었지만 '이미' 보다는 '아직'에 방점을 찍은 천국을 바라보며 지금은 충분치 못한 현실에 대한 헌신, 절제를 미덕으로 삼곤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카르페디엠'이 우리의 신앙 모토 '지금 여기'로 둔갑했고 '이미'의 신앙이 더 중요한 미덕이라는 사실을 무리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
엄밀히 말해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은 선교사명을 약화시킨다. 구조-방향 모델은 복음전도, 즉 선교의 당위성을 희석시킨다고 느꼈고 그것을 당대의 복음주의자들은 에큐메니컬 진영과의 논쟁, 화해 속에 양날개 이론, 그 중에 복음전도의 우월성을, 다시 복음전도와 사회참여의 동등성을, 나아가 총체적 복음, 통전적 복음이라는 개념으로 정립시켰다.
.
이는 복음전도와 사회참여가 구별되지 않는다, 이른바 '전략', '운동'과 '삶'은 같은 얼굴을 가진다는 통찰에 기인한 반성이자 어느 정도의 혜안이었다. 하지만 통전적 복음이 '이미'쪽으로 옮겨온 순간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는 것이 지상사명이었던 선교의 동력은 금새 약해진다. 
.
이미 밀레니엄을 넘긴 시점에서 사명은 늦춰졌고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지 못하는 건지, 아닌 건지 애매한 스탠스를 유지하고 있다. 혹은 아예 관심이 없는지도 모른다. 그 와중에 기술은 진보하여 오지에서조차 인터넷망과 몇 번의 검색만으로도 기독교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시대가 왔다. 선진국에서 파송하기 전에 선진국으로 다국적의 비기독교인들이 몰려든다.
.
이 생이 고달픈 사람들은 고달픈 대로, 나 같이 죽음 이후의 삶? 그 다음 단계에 대한 묵상, 생각이 많은 사람은 그런 사람대로 실존적 신앙의 고민이 늘어간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고 떠드는 근본주의적 교회 집단 외에는 이제 천국, 하나님 나라, 내세에 대한 통찰을 던져주는 기독교 특유의 목소리는 없다.
.
기독교 세계관이, 통전적 복음이 현대적 문화 풍조와 콜라보를 이뤄 '지금 여기'의 신학으로 자리잡고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의 연속선 상에서 악이 소멸되는 형태로의 큰 그림을 그리고 있지만 재림의 임박을 알린 정경의 메시지와 달리 왜 이천년 동안 우리는 악이 소멸되지 않은 채로 우리는 이 땅에서 얼마나 더 버티고 있어야 하는지, 
.
혹은, 
버틴다는 표현을 다수의 인간이 쓸 수는 있는지도 모르겠다. 괄목할만한 진보와 기술발전, 수명의 연장, 덕질의 향연과 극단적 쾌락과 엑스터시를 즐기면서, 언젠가는 도래할 죽음을 막연히 두려워하며 사는 건 아닌지. 갑자기 엄습한 죽음 앞에서 세상의 모든 종교가 내세의 희망을 손짓할 때, 그 모든 종교에 기대는 나약하고 평범한 사람들의 죽음.
.
요즘 나는 때때로 생각한다. 과연 우리는 이천년이라는 시간의 실존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지. 혹은 우리는 우리의 삶, 죽음에서 기독교 자체를 소외시킨 건 아닌지를 말이다. 말과 삶의 일치에 대한 고민이 이어지듯 내 삶과 죽음, 그리고 신앙과의 불일치를 경험한다.
.
신앙은 체험이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신앙은 보이는 것을 토대로 하지만 그 이상을 믿는 것이다. 살면서 믿음에 대해 교조적, 논리적, 확신적 태도를 보이기도 했지만 나는 살면서 교리에, 세상문화에, 기독 전문가 집단에 번번이 신앙의 권위를 내어주곤 했다. 그 권위 안에서 내 신앙의 논리와 체험을 통합하고 정립시키려고 애쓰곤 했다. 물론, 그 권위가 문제라기 보다는 그 모든 게 나 자신과 일정 부분은 소외된 채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절감했다.
.
시작을 거칠게 쓰자면, 내 생각은 이렇다.
2016/10/03 15:21 2016/10/03 15:21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기독교
모태신앙은 아니지만 나는 내가 나를 인식한 시기부터 기독교인이었다. 초기의 내 신앙, 즉 유년기, 청소년기에는 성경이 내겐 신비로운 책이었고 어려운 책이었고 무서운 책이기도 했다.

대학에 들어가서 내 신앙은 재편되었지만 어릴 때부터 익숙했던 종교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시작되었고 - 그 때에는 나름 진지했던 - 타종교와 기독교의 비교, 기독교의 정합성 등에 빠져 지냈다.

이후로는 보수적인 교리를 중심으로 '복음주의권'으로 대변되는 신학적 관점에서 다른 관점을 포용하는 방식으로 성경을 읽었다. 귀납적 성경연구 방법이 가장 성경을 연구하는데 흥미를 자극했지만 그 와중에도 이 바닥의 교리와 주석에 대부분 의존했다고 볼 수 있겠다.

한때 '렉시오 디비나'가 지적인 분석에 충실했던 복음주의권 내부에서도 크게 호응이 일어 나름대로는 성경을 보는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였고 나도 그 유행에 합류했었다.

대략 30년 이상을 성경을 읽어왔지만 최근에 나는 살면서 한번 정도는 이 모든 배경, 즉 내게 주어진 교리와 내 종교적 배경 안에서의 주석과 강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해석에서 벗어나 내 실존적 질문들과 씨름하는 성경 읽기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이런 성경 읽기가 어떤 방식이다 라고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그냥 통칭하자면 허세 없는 성경 읽기, 교리에 얽매이지 않는, 실용적인, 실존적인, 내재성으로만 신적 의미를 찾는 성경 읽기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설명이 충분치는 않지만, 일단 그렇게 시작하려고 마음 먹었다.
2016/10/03 15:21 2016/10/03 1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