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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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요21:18)

관계가 깨어지고 나면 함께 했던 일들과 목표, 공동체의 의식마저 희미해진다.
그 좌절감과 죄책감 속에서 '나'의 인격과 사회성 모두 절름발이 신세에 처한다.
예수님은 친히 베드로에게 오셔서 깨어진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신다.
자신을 세 번 부인했던 그 시점부터 다시 베드로에게 세 번을 물어보심으로
그와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신다.
또한 이제까지의 온전했던 방향과 사역, 그리고 베드로의 인격마저 회복시키신다.
기독교는 도덕, 명제의 종교라기 보다는 오히려 관계와 공동체의 종교다.
특별히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세상 사이의 관계에 집중하는 종교이자 진리다.
그 관계성의 회복에 예수님 사역의 본질이 있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일과 목표에 대한 성취감과 타인의 인정인가,
아니면 예수님 만으로 기뻐하고 한 사람을 천하보다 낫게 여기는 공동체의 기쁨인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요일 1:9-10)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죄에 대한 경각심을 잃을 위험에 처해 있다.
모든 문제를 환경과 권력 구도에서 야기되는
불가항력적인 문제로 받아들이고
그에 대한 해결은 내적 치유나 자기긍정, 자아성취로 대체된다.

요한은 말씀되신 예수님의 이야기로 자신의 서신들을 시작한다.
그에게 있어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로고스요 하나님이다.
예수님을 믿고 그에게 자신의 죄를 자백하는 것,
구원이 자신에 대한 긍정과 확신, 그리고 치유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는 자신의 피조물됨을 인정하는 것임을
사도 요한은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나에게도 매일매일의 회개가 쉽지 않다.
내가 해결해 나가야 할 문제들이 많고 그 때 그 때마다
나를 의지하고 나를 강하게 하고 나에게 지혜로운 행동을 하도록
자극하곤 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모든 책임과 권리는 나에게 돌아온다.

하나님 없이, 죄에 대한 경각심없이 사는 것.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나의 일상은 불순종의 삶에 더욱 가깝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요일4:12)

살면서 내가 가장 강하게 느끼는 신적 요소는
바로 '사랑하는 것'이다.
모든 슬픔과 아픔, 그리고 어두움처럼
우리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죄된 성품에서 벗어나는 길은
그의 성품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 때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온전한 연합이 이뤄지며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충만해진다.
사랑 없이 구원, 회복, 그의 나라와 같은 기독교 진리를
이야기하는 것들은 실상 다분히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것이다.
2011/02/07 20:33 2011/02/07 20: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