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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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억력이 좋은 편에 속했다. 무언가를 보면 사진을 찍은 듯한 시각적 기억력까진 아니지만 누군가가 했던 이야기의 거의 대부분을 재현할 수 있었다. 서사적 기억이라고 해야 하나. 대화나 스토리는 세세한 내용이라도 특별한 노력 없이 기억해냈다. 나는 그 기억력에 의존한 내기하는 걸 종종 즐기게됐고 거의 매번, 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20대부터 30대 초반 정도가 지나자 마치 신내림이 왔다가 사리지듯 어느 시점에 내 기억력도 사라졌다. 그런데도 한동안 나는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고 그 이후로 한동안은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런 능력이 한순간 사라지는 게 아니기도 하고 옛 기억은 마치 하드디스크 저장소에 잘 보관되어 있다고 생각해서, 지금 당장 호출할 필요가 없을 뿐이지 그 이야기를 꺼낸다면 나는 정확히 그 서사와 대화들을 읊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기억력이 희미해진 후로도, 그 한동안 나는 가까운 이들에게 내 기억이 맞다고 지나치게 우기고 때론 화를 내기도 했다. 내 오른손을 건다고 호언장담했다가 오른손이 열번은 잘려나갈 위기에 처했고.. 그렇게 몇번을 더 내기에 진 뒤, 내 기억이 흐려질 수 있고 더 정확하게는 조작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됐다.
마치 사진 같은 이미지와 토시하나 틀리지 않은 말이라고 믿었던 것들조차 내 뒷통수를 쳤다. 그리고 솔직히 이 사실이 너무 충격적이라 한동안 패닉상태였던 적이 있을 정도로, 내겐 놀라웠다.

이젠 옛날에 본 대부분의 영화 중간 장면이나 결말조차 기억나지 않는 일이 잦아서 놀랍지는 않게 됐고, 30대 중반부터 기억에 의존했던 업무처리 방식에 너무 많은 구멍이 생기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노트에 내 모든 뇌활동을 의존하게 됐다.

오늘 극장에서 재개봉한 <메멘토>를 봤다. (당시에 ‘기억’에 관한 꽤나 철학적인 화두를 던져준 이 영화에 매료되었고 놀란 감독은 이후에도 기억과 언어를 소재로 한 영화를 본격적으로 만들게 된다.) 메멘토에 열광했지만 영화를 극장에서 보지 못한 관계로 설레는 마음으로 오늘 드디어 관람을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영화의 일부는 기억나질 않았다.
더 놀라운 몇가지 사실은, 물론 이제는 패닉상태까지는 아니지만,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첫장면의 일부가 나오는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렇지 않았고, 영화 속 몇몇 장면들은 사진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내가 가진 그 사진들과는 다른 장면들이 상당히 많았다. 놀란 감독이 나몰래 다시 찍었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이제는 그 정도로 싸이코는 아닌 연유로, 아직 직장도 다니고 부모노릇도 하는 것 같다.

조금 지나면 이 감정 상태도 기억에서 휘발될 가능성이 높아서 급히 장황하게 끄적여봤다.. 그리고 참고로, 내기에 오른손을 건건 내가 왼손잡이이기 때문이다. 난 꽤 영리한 사람이다.
2020/03/16 21:36 2020/03/16 2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