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스님이 추천하는 이 시대에 꼭 읽어야 할 50권
법정 스님의 내가 사랑한 책들

법정 스님의 진리와 구도의 길에 함께해 온 책들을 소개한다. 법정 스님의 구도와 진리의 길에 함께해 온 책들은 무엇일까? 모두가 잠든 밤 홀로 깨어 산중 오두막을 불 밝혀 온 책은? 스님이 스스로를 거울처럼 비춰 보던 책은 무엇이며, 늘 곁에 두고 스승으로 삼은 구도의 책과 경전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 책은 이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을 담고 있다.

'법정 스님이 추천하는, 이 시대에 꼭 읽어야 할 50권의 책'을 선정하기 위해 편집부는 그동안 2년여에 걸쳐 여러 차례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다. 또한 지금까지 스님이 쓴 모든 산문과 법문들을 하나하나 찾아 넘기며 거기 소개되어 있는 책들을 죽 추려 내고, 편지 등에서 언급한 책들도 모두 정리하였다.

스님이 경전이나 주석서 못지않게 자주 펼쳐 보았다는 <어린 왕자>와 <꽃씨와 태양> 같은 동화에서부터 창간호부터 줄곧 구독해 오고 있다는 <녹색평론>과 인도철학의 꽃이라 불리는 <바가바드기타>에 이르기까지, 모두 잠든 깊은 밤 강원도 산중 오두막을 불 밝혔던 법정 스님의 독서 기록을 담았다. (출판사 소개글)


새로운 형식의 삶에 대한 실험 _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월든>
인간과 땅의 아름다움에 바침 _ 장 피에르와 라셀 카르티에 <농부 철학자 피에르 라비>
모든 사람이 우리처럼 행복하지 않다는 건가요 _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오래된 미래>
그곳에선 나 혼자만 이상한 사람이었다 _ 말로 모건 <무탄트 메시지>
포기하는 즐거움을 누리라 _ 이반 일리히 <성장을 멈춰라>
모든 여행의 궁극적인 목적지는 행복 _ 프랑수아 를로르 <꾸뻬 씨의 행복 여행>
자신과 나무와 신을 만나게 해 준 고독 _ 장 지오노 <나무를 심은 사람>
한 걸음씩 천천히 소박하게 꿀을 모으듯 _ 사티쉬 쿠마르 <끝없는 여정>
행복이 당신 곁을 떠난 이유 _ 버트런드 러셀 <행복의 정복>
나무늘보에게서 배워야 할 몇 가지 것들 _ 쓰지 신이치 <슬로 라이프>
기억하라, 이 세상에 있는 신성한 것들을 _ 류시화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신은 인간을 가꾸고, 인간은 농장을 가꾼다 _ 핀드혼 공동체 <핀드혼 농장 이야기>
모든 사람은 베풀 것을 가지고 있다 _ 칼린디 <비노바 바베>
이대로 더 바랄 것이 없는 삶 _ 야마오 산세이 <여기에 사는 즐거움>
나는 걷고 싶다 _ 다비드 르 브르통 <걷기 예찬>
아프더라도 한데 어울려서 _ 윤구병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신에게로 가는 길 춤추며 가라 _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한쪽의 여유는 다른 한쪽의 궁핍을 채울 수 없는가 _ 장 지글러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마른 강에 그물을 던지지 마라 _ 장 프랑수아 르벨·마티유 리카르 <승려와 철학자>
당신은 내일로부터 몇 킬로미터인가? _ 이레이그루크 <내일로부터 80킬로미터>
가장 자연스러운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_ 후쿠오카 마사노부 <짚 한 오라기의 혁명>
큰의사 노먼 베쑨 _ 테드 알렌·시드니 고든 <닥터 노먼 베쑨>
풀 한 포기, 나락 한 알, 돌멩이 한 개의 우주 _ 장일순 <나락 한 알 속의 우주>
삶은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 _ 아베 피에르 <단순한 기쁨>
두 발에 자연을 담아, 침묵 속에 인간을 담아 _ 존 프란시스 <아름다운 지구인 플래닛 워커>
가을매의 눈으로 살아가라 _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생명의 문을 여는 열쇠, 식물의 비밀 _ 피터 톰킨스·크리스토퍼 버드 <식물의 정신세계>
우리 두 사람이 함께 _ 헬렌 니어링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축복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_ 레이첼 나오미 레멘 <할아버지의 기도>
인간의 얼굴을 가진 경제 _ E.F. 슈마허 <작은 것이 아름답다>
바람과 모래와 별 그리고 인간 _ 생텍쥐페리 <인간의 대지>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_ 레이첼 카슨 <침묵의 봄>
빼앗기지 않는 영혼의 자유 _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나무는 자연이 쓰는 시 _ 조안 말루프 <나무를 안아 보았나요>
용서는 가장 큰 수행 _ 달라이 라마·빅터 챈 <용서>
테제베와 단봉낙타 _ 무사 앗사리드 <사막별 여행자>
꽃에게서 들으라 _ 김태정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꽃 백 가지>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_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우리에게 주어진 이 행성은 유한하다 _ 개릿 하딘 <공유지의 비극>
세상을 등져 세상을 사랑하다 _ 허균 <숨어 사는 즐거움>
지구에서 가장 뜨거운 심장 _ 디완 챤드 아히르 <암베드카르>
바깥의 가난보다 안의 빈곤을 경계하라 _ 엠마뉘엘 수녀 <풍요로운 가난>
내 안에 잠든 부처를 깨우라 _ 와타나베 쇼코 <불타 석가모니>
자연으로 일구어 낸 상상력의 토피아 _ 앨런 와이즈먼 <가비오따쓰>
작은 행성을 위한 식사법 _ 제레미 리프킨 <육식의 종말>
결론을 내렸다, 나를 지배하는 열정에 따라 살기로 _ 빈센트 반 고흐 <반 고흐, 영혼의 편지>
성장이 멈췄다, 우리 모두 춤을 추자 _ 격월간지 <녹색평론>
내일의 세계를 구하는 것은 바로 당신과 나 _ 제인 구달 <희망의 이유>
내 안의 ‘인류’로부터의 자유 _ 에크하르트 톨레
어디를 펼쳐도 열정이 넘치는 책 _ 다치바나 다카시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


*도서 정보: 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3838100
*법정스님 추천에세이: http://blog.aladdin.co.kr/editors/3495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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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11 17:08 2010/03/11 17:08
2010년 3월 19일로 방송 20주년을 맞는 MBC 라디오 [배철수의 음악캠프]. DJ 배철수가 방송 20년을 기념하여 100대 명 음반을 선정하고 이를 해설하는 책을 직접 펴냈다. 배철수가 직접 선정한 100대 음반을 소개하는 동시에 비틀스, 핑크 플로이드, 마이클 잭슨 등 음악을 사랑하는 전 세계 젊은이들에게는 교과서와 같았던 팝의 세계로 차근차근 안내한다.

책에 소개된 100장의 음반은 DJ 배철수가 음악캠프 20주년을 맞아 지난해 10월부터 음반 선정 작업에 착수하여 무려 3개월 동안 고심한 끝에 내놓은 산물이다. 과거 '레전드'라 불리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명반 100장을 되짚어보면서 팝 음악사의 흐름을 꿰뚫어볼 수 있도록 안내한다.

또한 시카고, 딥 퍼플 출신의 존 로드, 포플레이, 익스트림, 케니 G, 블랙 아이드 피스, 첼로 연주자 장한나와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 등 아티스트 10여 팀과의 인터뷰 전문을 수록하였다. 음악캠프에 초대된 그들이 DJ 배철수와 나눈 진솔한 대화를 통해 스타들의 꾸밈없는 음악적 열정과 인간적 면모를 엿볼 수 있다.


1. 1950년에서 1960년대까지
로큰롤이 세계를 정복한 1950년대
그리고 음악으로 세상의 전복을 꿈꿨던, 이상과 신념의 1960년대

001 Elvis Presley | 엘비스 프레슬리
002 Kind of Blue | 마일스 데이비스
003 Getz & Gilberto | 스탄 게츠 & 조앙 질베르토
004 Highway 61 Revisited | 밥 딜런
005 Fresh Cream | 크림
006 If You Can Believe Your Eyes And Ears | 마마스 앤 파파스
007 Pet Sounds | 비치 보이스
008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 비틀스
009 The Doors | 도어스
010 The Velvet Underground & Nico | 벨벳 언더그라운드
011 Blood Sweat & Tears | 블러드 스웻 앤 티어스
012 In-A-Gadda-Da-Vida | 아이언 버터플라이
013 The Beatles [White Album] | 비틀스
014 Astral Weeks | 밴 모리슨
015 Stand! |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

Interview_존 로드
Interview_장한나
Dear. Music Camp_젊음의 음악캠프에서 배철수까지-손석희(방송인)


2. 1970년대

현실에 좌절한 청춘들, 개인의 시대에 록 예술을 탐구하다

016 After The Gold Rush | 닐 영
017 Bridge Over Troubled Water | 사이먼 앤 가펑클
018 Close To You | 카펜터스
019 Cosmo's Factory | 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CCR)
020 D?j? Vu | 크로스비 스틸스 내시 앤 영
021 Layla & Other Assorted Love Songs | 데릭 앤 더 도미노스
022 Paranoid | 블랙 사바스
023 Plastic Ono Band | 존 레넌
024 Aqualung | 제쓰로 툴
025 Blue | 조니 미첼
026 Electric Warrior | 티렉스
027 Led Zeppelin IV | 레드 제플린
028 Live At Fillmore East | 올맨 브라더스 밴드
029 Pearl | 재니스 조플린
030 Sticky Fingers | 롤링 스톤스
031 Tapestry | 캐롤 킹
032 What's Going On | 마빈 게이
033 Who's Next | 후
034 Fragile | 예스
035 Machine Head | 딥 퍼플
036 Magician's Birthday | 유라이어 힙
037 Superfly OST | 커티스 메이필드
038 The Rise And Fall Of Ziggy Stardust And The Spiders From Mars | 데이비드 보위
039 Goodbye Yellow Brick Road | 엘튼 존
040 Pronounced Leh-Nerd Skin-Nerd | 레너드 스키너드
041 The Dark Side Of The Moon | 핑크 플로이드
042 Bad Company | 배드 컴퍼니
043 A Night At The Opera | 퀸
044 Born To Run | 브루스 스프링스틴
045 Blow By Blow | 제프 벡
046 That’s The Way Of The World | 어스 윈드 앤 파이어
047 Toys In The Attic | 에어로스미스
048 Arrival | 아바
049 Boston | 보스턴
050 Hotel California | 이글스
051 Songs In The Key Of Life | 스티비 원더
052 Aja | 스틸리 댄
053 Never Mind The Bollocks | 섹스 피스톨즈
054 Rumours | 플리트우드 맥
055 Saturday Night Fever OST | 비지스
056 The Stranger | 빌리 조엘
057 London Calling | 클래쉬
058 The Wall | 핑크 플로이드

Interview_에릭 울프슨
Interview_케니 G
Dear. Music Camp_네버랜드의 음악캠프-김지운(영화감독)


3. 1980년대

MTV와 팝음악이 건설한 찬란한 감각의 제국

059 Back In Black | AC/DC
060 Winelight | 그로버 워싱턴 주니어
061 Rio | 듀란 듀란
062 Thriller | 마이클 잭슨
063 Toto IV | 토토
064 Synchronicity | 폴리스
065 1984 | 반 헤일런
066 Legend | 밥 말리
067 Like A Virgin | 마돈나
068 Purple Rain | 프린스
069 Brothers In Arms | 다이어 스트레이트
070 No Jacket Required | 필 콜린스
071 Whitney Houston | 휘트니 휴스턴
072 Slippery When Wet | 본 조비
073 Appetite For Destruction | 건스 앤 로지스
074 Faith | 조지 마이클
075 Hysteria | 데프 레퍼드
076 Joshua Tree | U2

Interview_포플레이
Interview_시카고
Dear. Music Camp_20년 동행의 기쁨 그리고 느림의 미악-김혜수(배우)


4. 1990년대

그런지와 펑크의 기운, 세상을 집어삼키다

077 Mariah Carey | 머라이어 캐리
078 Metallica [Black Album] | 메탈리카
079 Nevermind | 니르바나
080 Ten | 펄 잼
081 Unplugged | 에릭 클랩튼
082 Crazysexycool | TLC
083 Dookie | 그린데이
084 Parklife | 블러
085 Superunknown | 사운드가든
086 Mellon Collie And The Infinite Sadness | 스매싱 펌킨스
087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 | 오아시스
088 Tragic Kingdom | 노 다웃
089 Come On Over | 셔나이어 트웨인
090 OK Computer | 라디오헤드
091 Urban Hymns | 버브
092 The Miseducation of Lauryn Hill | 로린 힐
093 Supernatural | 산타나

Interview_익스트림
Interview_브랜포드 마살리스
Dear. Music Camp_팝은 우리 음악의 기본이다-박진영(가수, 음악PD)


5. 2000년대

그 어떤 장르든, 입 닥치고 춤이나 춰!

094 Chocolate Starfish And Hot Dog Flavored Water | 림프 비즈킷
095 Hybrid Theory | 린킨 파크
096 The Marshall Mathers LP | 에미넴
097 A Rush Of Blood To The Head | 콜드플레이
098 Come Away With Me | 노라 존스
099 Speakerboxxx / The Love Below | 아웃캐스트
100 Franz Ferdinand | 프란츠 퍼디난드


(출처: 출판사 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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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02 00:51 2010/03/02 00:51

Special thanks to...

인용들 2010/02/08 08:22
**IVP 북뉴스에 정현주 간사님이 이번에 원고쓴 이들에게 감사의 글을 쓴 내용이 있어 옮긴다.
   그리고 정 간사님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감사 메일은 책 나올 때 이미 보냈었다.)



편집자 노트/Special thanks to

정현주/ 편집부      

공부하는 그리스도인
Outrageous Idea of Academic Faithfulness | 도널드 오피츠, 데릭 멜러비 지음 | 이지혜 옮김

(...중략)

2. Special thanks to 부록 글 저자들

대학 새내기의 눈높이에 맞는, 여러모로 후배들에게 강추하고 싶은 탁월한 책이었지만 번역서라는 한계 때문에 한국 학생들에게 얼마나 공감이 될지 기획 단계부터 고민이었다. 한국에서 그리스도인 대학생으로 공부를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우리의 대학 문화와 상황 안에서 좀더 와 닿게 글을 써줄 만한 저자군이 필요했다. 조건은 간단했다. 너무 유명하지 않을 것, 너무 나이가 많지 않을 것, 지금도 고민하는 삶을 살고 있을 것. 공부의 주되심에 대해 글로 풀어낼 만한 고민의 흔적이 있는 평범한 선배들을 찾아야 했다. 안팎의 인맥을 총동원하여 접촉을 시도, 총 4명의 저자를 섭외했다. 사실 이들 중 몇몇에게는 편집자라는 이름으로 사심(?) 섞인 접근을 했음을 고백한다. 평소 눈여겨보던 분들이었기에 무한 신뢰를 가지고 거침없이 접근할 수 있었다. 김용주, 이주일, 김현기, 강호민 님께 이 자리를 빌어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책상에 앉아 원고만 보다가, 저자들을 섭외하여 이메일과 전화로 수차례 의견을 주고받는 일은 생각보다 재미있고 유익했다. 단행본에 글이 실린다는 압박감에도 불구하고 좋은 글을 통해 책의 완성도를 높여 준 네 분의 귀한 선배들에게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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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08 08:22 2010/02/08 08:22
입력 : 2010년 02월 03일 (수) 15:51:51 [조회수 : 962] 김종희 ( 기자에게 메일보내기

   
 
 

▲ "이 책은 제가 쓰고 싶어서 쓴 책이 아닙니다.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었습니다. 몇 년 전부터 이 책을 완성해야 한다는 혼자만의 부담은 안고 있었지만, 온갖 핑계를 대며 차일피일 미뤄 왔습니다. …… 책을 내놓는 저의 마음은 평안합니다. 꼭 필요한 몇 사람만 읽고 조용히 사람들 기억에서 사라지는 책이 되어도 다행이고, 많은 사람들이 읽고 좋은 동지들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글쓴이의 머리말에서)

 
 
Q
김두식 교수는 그동안 <칼을 쳐서 보습을>(뉴스앤조이), <헌법의 풍경>(교양인), <평화의 얼굴>(교양인), <불멸의 신성 가족>(창비) 등 주로 법, 국가를 이야기하는 책을 내 왔습니다. <헌법의 풍경>은 3만 권이 넘게 팔릴 만큼 독자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계속 전공을 살려서 글을 써 나가면 더 사랑 받는 저자가 될 텐데, 굳이 교회라고 하는 좁은 동네로 들어온 이유는 무엇입니까. '인자는 원래 타향에서 존경받더라도 고향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법인데' 말입니다. 게다가 한국교회가 워낙 희귀한 문제를 많이 일으키는 터라 '교회 개혁'을 이야기하는 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어서 좁은 시장에서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A 작년 1년을 미국에서 보내며 공부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어느 국가 기관과의 협의에 따라서 영화와 인권을 접목시킨 시민 교육 교재를 집필하고자 출국했던 것인데, 그 기관의 내부 사정 때문에 중간에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왜 이렇게 일이 안 풀리나 스스로를 한번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갑자기 '한국교회에 나처럼 복 받은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저는, 지금 시점에서 돌아보아도, 대한민국 어떤 가정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없는 자유를 누리면서 자랐습니다. 제가 사춘기 때 부모님들께 막말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그중 몇 번은 다른 집 같았으면 진짜로 맞아 죽었을 수도 있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부모님은 제게 한 번도 폭력적으로 뭘 강요하거나 억압하지 않으셨습니다. 요즘 형이 가끔 "너만 그런 대접을 받았다"고 불평하는 걸 보면, 부모님께서 워낙 늘그막에 얻은 막내라서 그러셨던 것 같습니다. 제가 뭘 잘못해도 늘 형만 혼났거든요.

젊은 나이에 진짜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고시에 합격했고, 그 이후에 어디를 가나 좋은 대접을 받았습니다. 여러 직장을 거치는 동안 누구하고도 목소리 한 번 높인 일이 없을 정도로 늘 좋은 사람들을 만났고요.

책에서 한동대를 약간 비판하는 것 같은 부분도 나옵니다만, 사실 5년 반의 한동대 교수 생활을 통해서 가장 큰 혜택을 누린 사람이 접니다. 김영길 총장님 내외분께서는 처음부터 저를 아들처럼 아껴 주셨고, 종종 제가 급진적이고 비판적인 생각들을 비추어도 단 한 번도 "너 그런 생각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총장님하고 생각이 다를 때면 문자 그대로 '아무 때나' 총장실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총장님께서 가끔 제 이야기 들으시면서 화를 내실 때도 있었지만, 그다음에 만나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따뜻하게 대해 주셨습니다. 나중에 학교를 옮기고 나서 보니 총장실이라는 곳이 그렇게 아무 때나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더군요. 한동대에서 교수 생활을 함께한 분들도 제게는 다 형님, 누나 같은 분들입니다. 자주 뵙지는 못하지만 늘 그리운 분들이지요.

교회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책 보면서 '이 사람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어떻게 한국교회에서 살아남았나?' 생각하는 분도 있는데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높은뜻숭의교회를 다니면서 김동호 목사님 가르침에 동의하지 못한 때도 많았고, 그걸 공개적으로 이야기한 때도 많았습니다. 언젠가는 코스타 집회에서 전체 청중을 상대로 간단한 말씀을 전하면서 거의 노골적으로 김동호 목사님을 비판한 적도 있습니다. 청중석에서 김 목사님이 듣고 계셨는데 말이지요. 김 목사님께서 뭐라고 하실 거라고 예상했는데, 막상 강사실에 가서 보니 다른 강사 분들에게 "우리 교회 집사야"라며 저를 자랑하고 계시더군요.

교회가 분립된 후에 출석하고 있는 높은뜻푸른교회를 담당하시는 문희곤 목사님은 선교 단체에서 제가 존경하던 형입니다. 높은뜻숭의교회 시절에 제가 청년대학부장을 하고 문 목사님이 청년대학부 전임목사를 하셨는데요, 그때 저는 문 목사님을 한 번도 '형'이라고 부른 적이 없습니다. 청년대학부장은 청년 대학생들의 입장을 대변해야 하는데 담당 목사님과 형, 동생 하다 보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20년 동안 멀쩡하게 "형, 형" 하며 따라다니던 애가 갑자기 정색을 하고 "문 목사님" 하고 부르니 목사님도 당황하셨겠지만, 역시 한 번도 뭐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사실 제 책에서 언급한 호칭 문제와는 모순되는 태도를 제가 취한 거죠. 문 목사님은 원래부터 일관되게 목사, 전도사, 간사들끼리도 형, 동생으로 부르자고 하고 그걸 실천하던 분이셨고요. 제가 잘못하고 목사님이 옳은 건데도 굳이 저를 가르치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부모님, 목사님, 선생님, 동료, 아내, 딸 등 제 주변에는 제가 뭘 잘못해도 용납하고 이해해 주는 따뜻한 사람들로 넘쳐났습니다. 이게 아무나 누리는 복이 아니더군요. 제가 어떻게 이런 훌륭한 분들과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을까 생각해 보니,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런 복을 주신 데는 이유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복을 누린 데 따르는 일종의 책임을 생각하게 된 건데요, 무엇보다 마음에 걸린 것이 반쯤 써 놓고 나서도 '내가 굳이 이런 싸움에 나설 필요가 있나?' 싶어서 오랫동안 미뤄 두었던 바로 이 원고였습니다. 이 책부터 쓰지 않으면 다른 책에는 손도 못 대겠다 싶었고요. 실제로 원고를 작년 9월에 홍성사에 넘겨주고 나자, 바로 국가 기관과의 일도 수월하게 해결되었고, 12월에는 영화와 인권 원고까지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말씀 묵상과 일기 쓰기가 글쓰기의 힘

Q '교회 개혁'을 이야기하는 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고 했지만, 이 책을 자세히 읽어 보면 다른 책들과 차이가 있습니다. 앞부분은 오늘의 한국교회, 중간 부분은 중세 유럽 교회, 마지막은 미래라기보다는 교회에 대한 소망 내지 대안적 교회 모습, 이렇게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른 책들은 대개 교회의 현재 모습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이 책도 비슷합니다. 그래서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읽었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과거 모습에서 김두식 교수의 주특기가 발휘됩니다. 교회 권력이 정치권력과 결탁해서 부패해 가는 모습, 그 결과 마구잡이식 마녀사냥과 엄청난 학살극이 벌어진 참상, 진리를 좇아 살다가 이단으로 낙인찍히는 소수 종파 사람들의 모습이 그림처럼, 영화처럼 생생하게 재현되는 느낌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유명하지 않고 줄거리도 복잡한 영화 <여왕 마고> 이야기를 가지고 16세기 유럽에서 국가와 종교, 정치와 신학이 어떻게 상호 작용하면서 서로를 망쳐 갔는지를 30쪽 가까운 분량을 들여서 박진감 넘치게 풀어냈습니다. 이 책을 쓰기 위해서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공부한 것입니까, 평소 생각하던 것을 이번에 풀어쓴 것입니까.


A 일부러 어떤 부분을 집중적으로 공부한 적은 없습니다. 대학 1학년 때 선교 단체에서 강렬한 신앙 체험을 하고 나서 매일 성경 말씀을 묵상하고 일기를 적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아침에는 말씀을 읽고 저녁이면 그 말씀에 비추어서 하루를 돌아보는 식이었지요. 말씀에 비추어 자신을 돌아보면 내가 얼마나 한심한 사람인지 통렬하게 자각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걸 깨달을 때마다 주변 사람들이 더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읽은 책이나 영화의 내용도 꼼꼼하게 기록하고요. 책을 쓸 때 그 일기를 다시 읽어 보면서 관련된 책이나 영화를 찾다 보면 금방 큰 틀이 잡힙니다. <뉴스앤조이>를 보니 김기현 목사님도 이런 글쓰기를 강조하셨더군요. 사실 말씀 묵상하고 일기를 적는 것만큼 좋은 글쓰기 훈련이 어디 있겠습니까.

원래 영화 보기를 좋아하고 책 읽는 것을 좋아한 것도 사실입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님이 주무시고 나서도 혼자 텔레비전으로 주말의 영화를 볼 때가 많았고, 초등학교․중학교 시절에는 방학을 하면 교사이던 부모님이 일하시는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수십 권씩 빌려서 읽곤 했습니다.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허겁지겁 읽었습니다. 대학 때는 신학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고민 때문에 80년대 후반 한창 쏟아져 나오던 신학 서적들을 많이 읽었고요.

워낙 닥치는 대로 읽다 보니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체계가 전혀 없습니다. 진짜 신학 전공자들이 보면 이번 책에도 엉뚱하고 웃기는 이야기가 많을 겁니다. 무엇보다 히브리어, 헬라어를 읽을 수 없는 게 문제지요. 영어로 나와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스터디 바이블을 쌓아 놓고 대조해 보면서 그 한계를 극복하려고 했는데, 그런다고 원문을 읽는 걸 따라갈 수야 있겠습니까.

그냥 '오죽하면 너 같은 문외한까지 나서서 이런 책을 쓰냐' 하고 너그럽게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저보다 성경 이해나 지식이 뛰어난 평신도들이 훨씬 많을 거라는 걸 아시고, 목사님들께서 '중하 수준의 평신도 김두식도 이 정도 생각을 하는 걸 보면, 한국 교인들 수준이 대충 이렇겠구나' 가늠해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내 삶이 부끄러워도 예수님의 가르침 제대로 이야기해야

Q 6장 '먼저 실험한 사람들 이야기'를 읽노라면, 근본주의와 평화주의가 한데 어우러져 있어 보입니다. 책 뒷부분에서 소망이 되는 교회 모습을 이야기할 때 '중세 유럽에서 먼저 실험했던 사람들처럼 우리도 그렇게 해 보자'는 이야기를 합니다. 현실적으로 그걸 동의하고 실천할 사람들은 소수일 것 같습니다. 성서에 충실하려다 보니까 자연스레 평화주의를 선택하게 되고, 결국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소수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저자의 개인적인 신앙 경향은 어떻습니까.

A 장로교파에서 성장했지만 제 신앙 색깔은 메노나이트 등 재세례파 쪽에 가깝습니다. 노트르담대학에서 가르치다 돌아가신 존 하워드 요더 교수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요. 스탠리 하우어워스 교수가 오랫동안 감리교 목사이면서도 요더 교수와 신학적 입장을 같이했던 것처럼 장로교 신자이면서 평화주의 입장을 갖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공부를 하다 보니 기독교의 정당한 전쟁 전통과 평화주의 전통이 반드시 대립하는 입장만은 아니더군요. 정당한 전쟁 요건을 검토하다 보면 현재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전쟁 중에 '기독교적'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평화주의나 정당한 전쟁이나 같은 결론에 이르는 경우가 99%인 거죠.

   
 
 

▲ "이 책은 평생을 기독교인으로 살아온 제가 그동안 교회 때문에 느낀 슬픔, 절망, 그리고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 혹시라도 이미 절망하여 교회를 떠난 분들께 이 책이 재도전의 용기를 줄 수만 있으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지요." (글쓴이의 머리말에서)

 
 
중세 유럽뿐만 아니라 따지고 보면 우리 개신교의 뿌리 자체가 실험이고 모험입니다. 잘못된 역사와 전통을 깨고 나온 경험을 가진 교회잖아요. 제가 제일 자주 받는 비판이 '너무 이상주의 아니냐'는 건데요. 저는 역으로 우리 교회가 언제부터 그렇게 현실적이 되었는지 묻고 싶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 중 상당 부분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실천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의 가르침 자체를 뒤로 감추고 구약의 축복 이야기와 현만 이야기만 자꾸 한다면 그건 이미 기독교가 아닌 것이지요. 너무 이상적이라 안 될 걸 알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기도하며 순종하는 것이 신앙인의 자세가 아닐까요.

이상적인 걸 이야기하는 저도 제 현실을 보면 기가 막힐 때가 많습니다. 집도 있고, 승용차도 몰고, 매달 안정적인 월급을 받으면서 너무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있거든요. 최근에 이갑용 전 민주노총 위원장이 쓴 <길은 복잡하지 않다>를 읽다 보니 그분이 살아온 인생 경험이랄까 지혜 같은 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정말 대단한 것이더군요. 서울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평생 서울 중산층으로 살아온 저 같은 사람이 어디 가서 함부로 인생 경험을 이야기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급진적인 예수님의 가르침과 안정적인 제 삶을 비교해 볼 때마다 저는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제 삶이 부끄럽다고 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기독교인의 삶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단이라고 배척할 게 아니라 왜 그리 되었나 먼저 반성해야

Q 저자는 <칼을 쳐서 보습을>과 그 내용을 더욱 발전시킨 <평화의 얼굴>에서 한국교회에서 대표적인 이단으로 꼽히는 여호와의 증인들을 열심히 옹호합니다. 물론 그들의 교리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이 책에서도 이단으로 낙인찍혀 고통받는 사람들 이야기가 무척 많이 나옵니다. 앞으로는 한국의 대표적 이단 대변인으로 부르겠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 나오는 이단들은 대개 억울하게 희생된 경우가 많지만, 요즘 한국교회 내에서 횡행하는 이단들은 경우가 조금 다르지 않나 싶습니다. 특정인을 메시아 내지 재림주로 받들어 섬기고, 그 교주는 신도들의 몸을 빼앗아 가정을 파괴하고, 재산을 모두 바치도록 만드는 등 사회적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이런 경우를 엄밀하게 구분하지 않을 경우 면죄부를 줄 위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기존 정통 교회에서도 파렴치한 일들이 횡행하기 때문에 굳이 구별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만.


A 글쎄요, 제가 한국의 대표적 이단 옹호자라면 포항에서 조용히 지내던 저에게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에 대한 책을 쓰도록 부추기고 <칼을 쳐서 보습을>을 출간하기까지 한 김종희 기자야말로 이단 옹호자 아닌가요? (아니, 이런 물귀신 보게나. 저자는 기자에게 이단 옹호자라고 했지만, <뉴스앤조이>만큼 이단으로부터 소송을 많이 받은 기독교 언론도 없습니다 - 편집자)

제가 이단을 옹호한 적은 없는 것 같고요, 다만 한국교회가 이단 문제에 대해서 상식적인 선을 넘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관용을 강조한 적은 여러 번 있는 것 같습니다. 이단에 대한 공포감이 지나치다 보니, 최근에는 비리를 일으킨 목사들이 자신을 비판하는 신도들을 무조건 ㅅ 이단으로 모는 기현상까지 일어나지 않습니까. '비록 내가 성적인 범죄를 저지르기는 했어도, 그건 ㅅ 이단의 유혹이자 함정이었다'라고 하면 면죄부를 받는 분위기인데요, ㅅ 이단 쪽에서 오히려 당황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자기도 모르는 ㅅ 이단이 하도 많아서요.

우리나라의 이단 문제가 심각한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근본적으로 그렇게 된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목사님 말씀이라면 무조건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무조건적 순종만 강요하는 분위기에서는 언제나 이단이 자라날 수밖에 없습니다. 어찌 보면 이단이 자라날 더러운 토양을 만들어 놓고 그 잘못된 토양을 바로잡으려고 하기는커녕 이단 사냥에만 몰두하며 그 과정에서 또 다른 이익을 취하는 사람들이 더 큰 문제 아닐까요.

김종희 기자 이야기대로 "자신을 교주로 만들고 여자들 몸 빼앗고 가산 탕진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면 당연히 비판을 받아야겠죠. 그런 사람들을 걸러 내는 데 다수 종파냐 소수 종파냐의 구분이 큰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동성애자는 죄인인가 친구인가

Q 저자가 소망하는 교회 모습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주는 교회'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 교회를 그리면서 동성애자 이야기를 두드러지게 했습니다. 아예 한 장을 다 털어 넣었습니다. 특별히 동성애자 이야기를 '심하게' 한 까닭이 있습니까.

A 책에도 소개하고 있지만, 저도 원래는 동성애자를 한 번도 만나 본 적도 없으면서(혹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냥 무조건 동성애는 기독교적 입장에서 죄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사람입니다. 교회에서 다른 가르침이라고는 받아 본 적이 없으니까요.

그러던 중에 다들 잘 아는 누가복음 10장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를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내 이웃이냐?"고 질문하는 율법학자의 모습이 저하고 똑같더군요. '누가 내 이웃이냐'는 질문은 돌려 말하면 '누가 내 이웃이 아니냐'는 뜻도 되겠지요. 이웃의 의미를 분명히 해서 사랑할 사람과 사랑하지 않을 사람을 구별하겠다는 게 율법학자의 의도이고, 거기에서 '배제'의 논리가 나옵니다. 마침 제 직업도 늘 그런 정의를 내리고 개념을 분명히 하는 법학자더군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율법학자에게 누가 이웃인지를 대답하는 대신에 착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그리고는 "당신도 가서 그렇게 행하십시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해야 할 대상을 한정 짓고 배제할 사람을 알려 달라는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네가 가서 좋은 이웃이 되는 게 중요하다고 말씀하신 것이지요.

동성애가 죄냐 아니냐는 성경의 핵심 주제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이웃이 되어 줄 생각은 안 하면서 허구한 날 죄냐 아니냐만 이야기하고 있는 제 모습을 반성하게 된 건데요, 신기하게도 제가 그걸 반성하고 나자 그걸 어디 광고하고 다닌 게 아닌데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성 정체성의 속 깊은 고민을 제게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이성애자나 동성애자나 똑같은 영적 갈급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걸 나누고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야 하는 것이 교회 공동체의 사명이기도 하지요.

헨리 나웬의 전기를 읽으면서, 명문가 출신으로 하버드․예일 교수를 지내며 세상에 부러울 것 없던 그가 '상처 입은 치유자'를 이야기한 이유도 알게 되었습니다. 헨리 나웬 신부님도 평생 동성애자로서의 정체성 때문에 고통스런 내면의 상처를 안고 사셨습니다. 그 상처가 그런 주옥 같은 글들을 만들어 낸 것이고요. 숨겨야 할 대단한 비밀도 아니고, 헨리 나웬의 전기가 나온 지 10년이 넘었는데 우리나라에는 그 사실을 아는 분들이 거의 없습니다. 알 만한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르는 척하면서 나웬 신부님의 가르침만 인용하고 있고요.

이 책에서는 소수자 문제에 대한 교회의 태도와 관련하여 제가 느낀 것을 좀 나누어 본 것뿐입니다. 질문을 '동성애가 죄냐 아니냐'에서 '당신 주변에는 왜 동성애자 친구가 한 명도 없냐, 진짜로 없는 것이냐, 아니면 당신이 그 친구들에게 마음을 털어놓을 만큼 믿을 만한 이웃이 못 되는 것이냐?'로 바꿔 보자는 제안을 해 본 것이고요.

Q '배제의 질문, 사랑의 답변' 대목에서 착한 사마리아 이야기를 새롭게 해석했는데, 그건 저도 많이 들어 본 이야기입니다. '배제의 질문, 사랑의 복음' 대목에서 예수가 선포한 희년 메시지를 둘러싼 사건 이야기를 소개했습니다. 새로운 해석이 참 매력적이었습니다. 이런 관찰과 해석은 평소 성경 묵상과 일기 쓰기를 통해서 스스로 깨달은 것인지, 일부러 다른 주석이나 참고 서적을 찾아 읽으면서 알게 된 것인지 궁금합니다.

A 성경 묵상, 일기 쓰기, 주석, 참고 서적이 저에게는 분리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경 읽으면서 일기를 썼고 그러면서 책도 함께 읽은 것이니까요. 이번 책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 부분이나 희년 이야기는 로버트 M. 브라운 교수의 생각에 제 생각을 보탠 것입니다. 여러 기독교 작가 중에 제가 특히 좋아하는 분은 필립 얀시인데요, 우습게도 얀시 선생님 책을 읽으면서 "이분이 나하고 책 읽는 취향이나 속도가 거의 같구나"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런 훌륭한 작가하고 저를 비교한다는 것이 외람되기는 합니다만, 생각의 방향이 비슷하다 보니 읽는 책들도 비슷하다는 말씀이지요.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책을 읽고 비슷한 생각을 했다가 나중에 얀시 선생님 책을 보면 비슷한 이야기가 나와서 깜짝 놀랄 때가 많습니다.

창조적인 상상과 용기 있는 실험이 시작되었으면

Q '교회 역할을 보험 회사에게 빼앗겼다'면서 '돌봄의 공동체'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저자가 개인적으로 체험한 그런 공동체의 실험 사례를 이야기했는데, 요즘 박종운 변호사를 중심으로 기독교 일각에서 '희년 기금'을 만들어서 돈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나눠 주는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올해도 참여자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서, 재정 상황이 열악한 기독교 활동가를 지원하는 데 500만 원, 사회 선교 단체 긴급 운영 자금으로 300만 원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교회 공동체가 아니라는 차이가 있을 뿐, 개념은 저자가 강조하는 것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A 박종운 변호사님께는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삽니다. 한때는 저도 운동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박 변호사님을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으로 처음 모시고 간 것도 저였고, 여러 단체에도 함께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기본적으로 책 읽고 글 쓰는 사람이지 조직을 이끌거나 투쟁에 앞장 설 재목이 못 되더군요. 고생길에 박 변호사님을 밀어 넣고 저는 슬쩍 빠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기독법률가회(CLF)의 전재중, 박종운, 김종철, 태원우 변호사님 같은 분들은 그 끈기나 용기 면에서 저 같은 사람하고 수준이 다른 분들입니다. 이번 책에 '기독교+거시기' 운동은 그만 하자고 하면서도, 그런 운동하는 훌륭한 분들하고 관계를 끊지 못하는 이유도 그분들에 대한 존경과 사랑 때문입니다.

웃기는 이야기지만, 제가 1년 동안 미국에서 공부하기로 결정하고 가장 마음에 걸린 게 우리 집 거북이였습니다. 미국에 데리고 갈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고, 키울 사람은 없고…. 그 거북이가 지금 박 변호사님 댁에 가 있습니다. 형편을 이야기하니 그날 밤에 두말없이 받아 가더군요. 작년에는 기독법률가회에서 인턴하는 지방 학생들을 자기 집에 불러다 일주일이나 재우고 먹이며 데리고 다녔다는 이야기를 경북대 학생들에게 들었습니다. 저는 흉내도 못 낼 일입니다. 그 학생들이 박 변호사님 집에 우리 거북이가 잘 살고 있다고 전하더군요.

박 변호사님은 교회도 열심히 섬기고 계신데, 거의 초인적인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 교회개혁실천연대, 공의정치실천연대, 한반도평화연구원, 성서한국, 통일시대 평화누리 등에는 이런 초인들이 참 많습니다. 그분들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교회다운 교회'부터 만드는 것이 우리 사명 아니겠냐는 제 생각을 조심스럽게 적어 본 게 이번 책입니다.

Q 책을 읽으면서 곳곳에서 김두식 교수와 가끔 만났을 때 들었던 이야기들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는 느낌입니다. 평소 생각했던 것을 잘 모아 두었다가 책을 내는 것 같습니다. 그럼 요즘은 무슨 생각을 하며 지냅니까. 앞으로 어떤 책을 낼 생각인지요.

A 매번 책을 낼 때마다, '책은 저자와 분리된 독자적 생명력을 갖는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저는 어지간해서는 제 책에 대한 추천사를 부탁하는 법도 없고, 남의 책에 추천사를 써 주지도 않습니다. 제 책에 대해서 부당한 비판을 받아도 굳이 나서서 열심히 변명하지 않습니다. 출판사와의 약속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인터뷰에 응할 때는 있지만, 제가 개인적으로 열심히 판촉에 나서지는 않습니다. 우리 부부가 낳은 딸이지만, 딸아이가 자신만의 독자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것처럼 책도 비슷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는 특히 '내 책'이라는 생각이 별로 안 드는 책입니다. 우리 교회 특별 새벽 기도 나갔다가 하나님께서 '진짜 그렇게 생각한다면 인세도 포기하는 게 어떠냐'고 하시는 것 같아서 인세도 포기했고요. 한결 마음이 편합니다. (이 책의 인세는 모두 높은뜻푸른교회와 열매나눔재단을 통해 가난한 이웃을 위해 쓰입니다 - 편집자)

4, 5월경에는 앞서 말씀드린 영화와 인권 책이 창비에서 출간될 예정입니다. 생각해 보면 <칼을 쳐서 보습을>, <헌법의 풍경>, <평화의 얼굴>, <불멸의 신성 가족>,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 앞으로 나올 영화와 인권 책까지 제 책들은 교회 쪽 색채가 강한 주제와 국가 쪽 색채가 강한 주제가 번갈아 가면서 등장했던 것 같습니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닌데 앞으로도 이런 경향이 계속 이어질지 모르겠네요.

뱀발(蛇足) : 솔직하게 고백해야겠습니다. 이 글은 제 글이 아닙니다. 조금 더 엄밀하게 밝히자면, 질문만 제 글이고 대답은 김 교수 글입니다. 출간되자마자 보내 준 따끈따끈한 책을 받아서 읽고, 토요일 저녁에 간단한 질문을 보낸 다음, 월요일에 만나서 이야기를 듣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일요일 저녁에 이미 답 메일이 왔습니다. 굳이 월요일에 다시 만날 필요가 없을 만큼 글이 잘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분량이 원고지 60매나 되어서 1/6로 줄어야 할 텐데, 도저히 그럴 수는 없더군요. 우문현답 꼴이 될 것 같아서 오히려 질문 내용을 다듬느라 애를 썼습니다. 식사라도 같이 하자 해서 만났고, 덕분에 10여 명의 점심식사를 대접하느라 김 교수가 거금을 써야만 했습니다. 제 맘이 흡족할 정도의 촌지 수준은 아니니까 너무 노여워하지는 마시기를. 인터뷰 내용을 정리하다가 궁금한 것이 있으면 전화하겠다고 하니까, 메일을 보내 주면 메일로 답하겠답니다. 말하는 속도나 글 쓰는 속도가 비슷하니까, 그게 더 낫겠답니다. 잘났어, 정말. 글 잘 썼다 저 칭찬 마시고, 글 못 썼다 저 욕도 마시길. 내용도 좋고, 글도 재미있습니다. 꼭 읽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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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04 00:47 2010/02/04 00:47

얼마 전부터 한국 신문에 자주 거론되는 말이 있습니다. '루저'(loser)라는 말입니다. 처음에는 그냥 무심코 지나갔는데, 신문 기사에서 혹은 명사들의 칼럼에서 계속 이 말이 사용되었습니다. 무슨 일인가 하여 인터넷을 뒤져 보니, 사연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최근에 어느 연예 프로그램에서 12개 대학 캠퍼스의 퀸들을 초청해 놓고 결혼과 사랑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토론하게 했습니다. 거기에 출연한 한 여대생이 "키 작은 남자와 사귈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외모가 중요해진 오늘날에 키는 경쟁력이다. 키 작은 남자는 루저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내 키가 170센티미터이니, 남자의 키는 180은 되어야 한다"고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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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루저>의 포스터.



영어 표현에서 누구에겐가 "You are a loser"라고 말하는 것은 심한 모욕입니다. 영어의 '루저'라는 말은 사전적으로는 승부에서 '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 단어가 비속어(slang)로 쓰일 때는 다음과 같은 뜻입니다.

 

"Amisfit, esp. someone who has never or seldom been successful at a job, personal relationship, etc. "("부적응자, 특별히 직장이나 인간관계 같은 일에 있어서 전혀 혹은 거의 성공한 적이 없는 사람").

 

이에 가장 가까운 우리말을 찾는다면 '낙오자'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루저를 의미하는 손짓이 있습니다. 손을 똑바로 세우고 엄지와 검지를 활짝 벌리고 나머지 세 손가락을 굽히면 영어 알파벳의 L자가 됩니다. 그렇게 만들어 이마에 대고 조롱하는 표정을 지으면, "너는 절대로 성공할 수 없는 낙오자야!"라는 험한 욕이 됩니다. 사실 이것은 욕이라기보다는 상대방에 대한 저주에 해당합니다. (여러분 보고 이 손짓을 사용하라고 가르쳐 드리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그런 행동을 하면 그러지 못하도록 지도하시라고 가르쳐 드리는 겁니다.)

이 프로그램이 나간 후 '루저'라는 말이 급작스럽게 유행어가 되어 버렸고, 사회적인 이슈가 되었습니다. 그 프로그램을 책임진 방송 관계자가 징계를 당했다고 하고, 한국 사회의 외모 지상주의에 대한 심각한 반성의 글이 연일 올라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반성을 하기는커녕 어떻게든 루저가 아니라 위너(winner)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한 예로, 최근에 남성들의 '키 높이 구두'가 불티나듯 팔리고 있다고 합니다.

 

 

루저들의 이야기

성탄 축하 예배를 드리면서 루저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탄생하신 이야기들을 보면, 그것이 다름 아닌 '루저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저자는 2장에서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적으면서 아우구스투스(Augustus) 황제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는 그 시대의 절대 강자, 최고의 위너였습니다. 줄리어스 시저(Julius Caesar)가 살해당한 후 그는 안토니우스(Antonius)와 권력을 향한 치열한 음모와 투쟁을 벌였는데, 결국 승자가 되어 황제의 자리에 오릅니다. 그는 주변의 강대국들을 차례로 점령하여 제국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역사가들은 아우구스투스를 로마 제국의 가장 위대한 황제로 평가하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로마 역사가 수에토니우스(Suetonius)에 따르면, "그의 외모는 비범했고, 맑고 빛나는 눈을 가졌다"고 합니다. 한 가지 흠이 있었는데, 키가 작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작은 키는 그를 루저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태어나실 때 최고의 강자였고, 최고의 위너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우구스투스를 성탄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삼지 않으셨습니다. 아우구스투스가 자신의 제국을 장악하기 위해 호적 조사를 하도록 명령을 내렸을 때, 그 절대 권력에 복종하여 만삭이 된 아내를 이끌고 자신이 살고 있던 나사렛을 떠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가야만 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요셉, 그리고 그의 아내 이름은 마리아입니다.

요셉은 목수였는데, 당시 유대 사회에서 목수는 큰돈을 벌 수 있는 직업도 아니었고,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지도 못했습니다. 일거리를 찾아 전전해야 했던 블루 컬러 노동자였습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요셉이 혼기를 놓치고 늦게야 결혼을 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서른 살쯤 되어 활동할 당시에 요셉은 이미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혼기를 놓친 목수 노총각에게 시집 올만 한 여자라면 그 형편이 어땠을지 추측할 수 있지 않습니까?

오래 전에 나온 <나사렛 예수>(Jesus of Nazareth)라는 영화에서 마리아 역을 맡았던 여배우 올리비아 핫세(Olivia Hussey)를 기억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대부분의 영화에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역을 맡은 사람들은 순수하고 맑은 영혼을 가진 듯한, 빼어난 미모의 여배우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연중에 착각합니다. '아, 예수님의 어머니는 미인이었겠구나! 저렇게 청순하고 아름다운 여인이니 예수님의 어머니로 뽑혔겠지.' 그렇게 생각하다가 시험에 빠지기도 합니다. '하나님도 미인을 좋아하시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지구상에 태어난 여인 중에서 가장 영예로운 소명을 받았던 그 여인 마리아는 혼기를 놓친 노총각 노동자밖에는 다른 혼처를 찾을 수 없는 여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마리아를 택한 것은 그의 가문 때문도 아니고, 그의 미모 때문도 아니며, 그의 총명함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 그의 순종 때문이었습니다. 처녀의 몸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고 해산하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요셉이 임신한 약혼녀를 두고 사람들에게 "나는 이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순간, 투석형의 비참한 죽음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마리아는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응답했습니다.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눅 1:38)

 

 

냄새나고 천대받던 노동자, 목동

성탄 이야기에서 목자들도 그동안 너무 미화되어 온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푸른 목장에서 양을 안고 있는 목자 예수님의 이미지에 너무 익숙해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목자들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는 꽤 다른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신약성서 배경 연구에 대해 권위 있는 학자인 요아킴 예레미야스(Joachim Jeremias)에 의하면, 당시의 목자들은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하층민에 속했습니다. 양들의 주인이 목자의 역할을 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고, 대부분 목자를 고용하여 양들을 쳤습니다. 팔레스틴 지방에 비가 많지 않고 풀밭도 흔하지 않기 때문에 목자들은 늘 먹이가 있는 곳을 찾아 유랑해야 했습니다. 낮에는 양들을 풀밭에 풀어놓고 뙤약볕 아래에서 지켜야 했고, 밤이 되면 동굴이나 우리에 양들을 몰아 놓고 불침번을 서야 했습니다.
 
본문 8절에 보니, "그 지역에서 목자들이 밤에 들에서 지내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내며'라는 헬라어 단어의 시제는 그 목자들이 들에서 '지속적으로' 머물러 살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고충을 능히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돈벌이를 위해 고향과 가정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변변한 기술이 없어서 전전하던 중에 겨우 양치기의 일을 잡습니다. 낮에는 더위와 고된 노동으로 인해, 밤에는 부족한 잠과 추위에 시달리며, 정처 없이 떠돌아 다녀야 했습니다.

그 같은 삶의 환경으로 인해 그들은 하나님을 잘 믿고 싶어도 잘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얼굴은 태양 볕에 그을려 있었고, 옷차림은 계속된 유랑으로 해져 있었으며, 손은 거친 노동으로 딱딱하게 군살이 박혀 있는데다가, 시뻘겋게 될 정도로 박박 문질러 닦아도 양의 똥오줌 냄새가 가시질 않습니다. 게다가 그 같은 노동을 통해 얻는 수입도 변변치 않습니다.

요아킴 예레미야스에 의하면, 당시에 목자들은 부정직한 사람들로 취급 받았다고 합니다. 떠돌이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었고, 장기간 주인의 감독으로부터 벗어나 있었으며, 박봉에 시달렸기 때문에, 그들은 자주 양이나 양털, 혹은 양 우유를 주인 몰래 빼내어 팔았습니다. 그래서 경건한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목자들과는 직접 거래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파는 물건의 열에 아홉은 훔친 물건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선입견 때문에 목자들은 어디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성전에서조차 그들은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누군가 옆에 사람이 다가오면 '킁킁' 냄새를 맡아보고 미심쩍다 싶으면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는 것이 당시 사람들이 목자들을 대하는 태도였습니다.

목자들이 이런 사람들이었다면, 예수그리스도가 탄생하셨다는 소식이 그들에게 가장 먼저 전해졌다는 오늘의 이야기가 이상해 보이지 않습니까? 아마도 베들레헴 지경에서 양들을 돌보던 목자들은 그날도 추위를 녹이기 위해 어둠 속에서 모닥불을 피워 놓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꾸벅 꾸벅 졸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한순간, 꿈인지 생신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한 일이 일어납니다. 혼자만 보았으면 환상이라고 하겠는데, 여러 목자들이 동시에 경험한 것이니, 이것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별빛도 아니고 햇빛도 아닌 광채가 그들을 덮습니다. 그들은 그 희한한 광경 앞에서 그만 숨이 멎는 줄 알았습니다. 죽을 것처럼 두려웠습니다. 그 때 음성이 들렸습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여 준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서 너희에게 구주가 나셨으니,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너희는 한 갓난아기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것을 볼 터인데,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표징이다." (10-12절)

 

 

가까이 하기 거북한 이방인 점쟁이들

여러분은 하나님의 선택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왜 가장 가난하고 볼품없고 사람들로부터 의심이나 받는 루저들에게 제일 먼저 전해 주셨을까요?

이것은 전략적으로 볼 때도 참 어리석은 선택입니다. 이 정도로 중요한 책임을 맡기려면 당시 사람들로부터 가장 높은 존경과 신뢰를 받던 사람을 택했어야 마땅합니다. 가장 명망 있는 율법학자라든가, 예루살렘에서 가장 존경받던 제사장을 택했더라면,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빠른 시간 안에 그 복음을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쩌자고 이 같은 선택을 하셨단 말입니까?

그들이 루저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과 순종이었습니다. 목자들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랬기에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고, 그 음성에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그 시대의 위너들은 베들레헴 시내에서 할 일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에 하늘을 쳐다볼 여유도 없었고, 그런 음성을 들었다 해도 그것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할 만큼 여유가 있지 않았습니다.

여기까지 들으시고 이렇게 질문하실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누가복음으로 보면 그렇지만, 마태복음을 보면 동방박사가 나오지 않습니까? 동방박사를 루저라고 보기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얼른 생각하면 그럴 듯한 반론입니다. 어린이들의 동화책에 보면 동방박사를 '동방의 왕들'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던데, 그렇게 보면 그들은 루저였다고 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 전통에서 동방박사들은 고귀하고 화려하게 그려졌고, 그들이 드린 선물도 값비싼 것으로 그려졌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동방박사들은 팔레스틴의 동쪽 지방에 살던 점성가(astrologer)들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점성가'란 별을 보고 인류의 역사와 개인의 운명을 점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오늘날의 우주 과학자(astronomer)와는 다릅니다. 상당히 미신적인 전제에서 천체를 관찰하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조금 나쁘게 말하면 점쟁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고귀한 신분과는 거리가 멀었고, 부유한 사람들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가져 온 세 가지 선물들, 즉 황금과 유향과 몰약은 물론 귀한 것이었지만, 그 선물로 인해 그들이 부자였다고 추측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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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방박사들은 미신적인 전제에서 천체를 관찰하던 점쟁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고귀한 신분과는 거리가 멀었고, 부유한 사람들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출처 : 위키피디아)



동방박사들도 역시 루저에 해당합니다. 특별히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사건을 기록한 마태복음의 빛에서 본다면, 그들은 확실히 루저에 속했습니다. 첫째, 그들은 유대인 즉 선민이 아니었습니다. 둘째, 그들은 참된 종교가 아닌, 이방 종교를 믿고 있었습니다. 미신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이 두 가지 요소만 해도, 유대인들의 눈에 동방박사들은 루저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까마득히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잘난 유대인 지혜자들을 모두 제쳐 두고 이방인 점쟁이들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왕 예수그리스도께서 나셨다는 사실을 전하십니다.

자, 이제 좀 그림이 분명해지셨습니까? 인류 역사의 분기점이 될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을 준비하시면서 하나님께서 그 사건의 주인공으로 선택하신 사람들이 모두 당시 기준으로 볼 때 루저들이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도적인 선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 이상한 선택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루저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목자들이 들은 천사의 음성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여 준다." (10절)

 

그렇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오고 가는 세대의 모든 인류를 위해 태어나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으로 태어나는 영혼이라면 한 사람이라도 잃고 싶어 하지 않으십니다.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 안에서 회복되고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은 '온 백성에게' 들려져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며 의지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누구에게나 전해질 것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누구나 그 복음을 받아들이고 반응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소식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그 음성에 순종할 사람들을 먼저 찾으십니다. 스스로 위너라고 자고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귀에 대고 소리쳐 들려주어도 듣지 못합니다. 듣더라도 반응하지 않습니다. 아우구스투스가 그랬고, 대제사장이 그랬으며, 헤롯왕이 그랬습니다. 백성들의 존경을 받은 율법학자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혼기를 놓친 노총각 요셉과 남자들에게 별 인기가 없었던 시골 처녀 마리아를 택하셨습니다. 그래서 냄새나는 노동자들을 택했고, 이방의 점쟁이들을 택했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별로 바랄 것 없고 이 땅에서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루저들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고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기독교의 복음의 핵심이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스스로를 위너라고 생각하고 자고하는 한 그 사람에게 복음은 제대로 들리지 않을 것이며, 들려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이해한다 해도 순종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들이 스스로 이루었다고, 얻었다고 자부하는 그것이 그들의 구원에 걸림돌이 됩니다. 반면, 어떤 의미에서든 이 세상에서 루저로 낙인찍힌 사람들에게는 이 복음이 구원의 능력이 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그리스도의 나심은 희망으로 보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구원의 빛이 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혹시, 이 사회에서 루저가 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치며 사셨습니까? 그렇게 살아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고, 그로 인해 이제는 "I am a winner"라고 자위하면서 지내십니까? 경제력에 있어서든, 신앙 경력에 있어서든, 사회적인 업적에 있어서든 혹은 사회적 명성에 있어서든, 혹은 외모에 있어서든, 이만하면 어디 가서도 빠지지 않는다고 자부하고 계십니까? 승승장구해 온 것을 자랑스럽게 느끼십니까? 잘 하셨습니다.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하지만 조심할 일이 있습니다. 스스로를 바라보며 너무도 대견스럽게 여기는 여러분의 눈에 하나님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람들의 칭찬에 익숙해진 여러분의 귀에 복음이 제대로 들리지 않을 확률이 높습니다. 여러분 마음에 자아의 자리가 너무 커서 예수님이 들어갈 자리가 없을 공산이 큽니다. 즐길 것이 너무도 많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기쁨의 맛을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고개가 너무 굳어 버려서 하늘을 쳐다볼 수 없을지 모릅니다. 어쩌다 예수그리스도의 음성이 들려도 여러분은 외면하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 음성에 제대로 반응했다가는 너무도 많은 것을 잃을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와 같이 권력 면에서 위너라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가진 권력이 절대자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님을 인정하고, 그 높은 보좌에서 내려 와 아기 예수 앞에 무릎 꿇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대제사장과 같이 종교적인 면에서 위너라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쌓은 신앙적인 공로는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고, 그 화려한 제복을 벗어 놓고 아기 예수님이 누워 계신 외양간으로 오시기 바랍니다. 짐승의 똥오줌으로 질척거리는 바닥에 무릎을 꿇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율법학자와 같이 학문적인 면에서 위너라고 생각하십니까? 혹은 경제적인 면에서? 혹은 신체의 아름다움 면에서? 기도하기는, 하나님 앞에서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고, 냄새나는 노동자들과 함께, 그리고 가까이 하기 거북한 이방인 점쟁이들과 함께, 아기 예수 앞에 무릎을 꿇읍시다. 그래야만 희망이 있습니다.

 

 

루저인가 위너인가…

혹시, 아무리 몸부림쳐도 루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과 한계를 탓하며 패배감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습니까?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같이 어둠 속에 자신을 파묻고 살아가는 것은 실은 하루하루 '죽어가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루저라고 생각하시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찾으십니다. 이 세상은 여러분에게 루저라는 딱지(label)를 붙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더 큰 희망을 두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뭐라 하시기 전에 여러분 스스로 자신을 판단하고 정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이 여러분에게 붙이는 딱지에 상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도 압니다. 상관이 안 되지 않습니다. 출신 학교로, 경제력으로, 직업으로, 아이들의 성공 정도로, 신체 조건으로, 가정환경으로, 직장에서의 성공과 업적으로 우리에게 루저라는 딱지가 붙을 때, 그것에 상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들이 딱지를 붙이지 않아도 우리 스스로 주눅이 듭니다.

하지만 속지 마십시다. 세상에서 여러분에게 붙인 딱지가 진짜 여러분의 가치와 같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준들이 하나님께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잉태하고 출산하여 양육해야 할 책임을 혼기를 놓친 노총각 요셉과 볼품없는 마리아에게 맡기셨다면, 이룬 것 별로 없고, 얻은 것 초라하여 낙심하고 살아가는 여러분에게는 어떻게 하실 것 같습니까?

타지를 유랑하며 하루 벌어 하루 먹는 고단한 삶을 살던 목자들, 오늘이 힘들고 내일이 불안했던 그들을 찾아가셔서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의 소식을 전해 주셨다면, 고단한 이민 생활에서 하루하루가 불안한 삶을 사는 여러분에게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 것 같습니까?

미신과 점괘에 붙들려 살던 사람들을 찾아내어 인류의 왕이 나셨다는 사실을 알려 주셨다면, 믿는다고 하면서도 변변히 믿는 자의 도리 한번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어서 늘 하나님께 송구스러워하는 여러분을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 것 같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야말로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메시아의 탄생을 예고하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어둠 속에 헤매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쳤다." (이사야 9:2)

 

여러분은 어둠 속에 계십니까? 여러분을 향해 드리운 빛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땅에 살고 계십니까?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빛나는 생명의 빛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성탄의 소식은 바로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비친 생명의 빛 가운데로 나아갑시다. 그 빛 안에 거하면 세상에서 나에게 붙인 온갖 불합격 딱지는 금세 변색되어 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나의 능력과 조건과 외모와 업적과 경제력에 상관없이 온 우주보다 비싼 값을 매겨 주십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전부를 내어주고 맞바꾼 새로운 나 자신을 발견합니다. 내가 진정으로 위너가 되는 길은 하나님 안에서 나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 땅의 루저들을 찾아가게 하소서'

루저들에게 임하시는 성탄의 은혜를 발견한 사람이라면, 우리에게는 그 은혜를 기억하고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외형적이고 물질적인 조건에 따라 위너와 루저를 가려내고, 루저들을 외면하고 위너들과 어울리는 것은 성탄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로서 할 일이 아닙니다. 성탄의 은혜를 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루저로 판정 받고 어둠과 죽음의 그늘 가운데 살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들에게 이 놀라운 복음을 전해 주어, 하나님 안에서 그들이 결코 루저가 아님을 깨닫게 해주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은혜 받은 자로서 우리에게 맡겨진 고귀한 과제입니다.

성탄과 새해를 맞는 이 몇 주간 동안, 여러분은 무슨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까? 혹시 스스로 위너로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줄을 대고 그들과 함께 어울리며 자신도 위너로 인정받기 위해 분주하다면, 오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위너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들이 모인 곳에도 하나님이 계시지만, 스스로 위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그분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그들의 귀에는 그분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우리가 아니더라도 즐길 일이 너무도 많고 어울릴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이번 성탄절에 우리는 방향을 돌려 루저들에게 찾아가십시다. 위너로서 루저에게 뭔가를 베풀 심정으로 가자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도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루저임을 인정하고, 루저의 심정으로 이 사회에서 루저로 판정한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과 함께합시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태어나시면서 당시에 가장 대표적인 루저들을 한곳에 모아 놓으셨습니다. 그곳은 루저들의 집합소답게 냄새나고 지저분한 외양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허름한 외양간에서 인류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루저들이 모였던 그 외양간이 인류 역사상 하나님의 임재가 가장 강력하게 드러났던 곳임을 기억하십시다.

루저의 심정으로 루저를 찾아가 그 마음을 보듬을 때, 하나님은 거기서 당신의 임재를 환히 드러내십니다. 물론 그것이 때로는 쉽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루저로 낙인찍히고 이리 치이고 저리 채이면서 심사가 뒤틀리고 성격이 꼬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과 함께하고 친구가 되어주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고 상처받기를 각오해야 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상처가 깊은 곳에 하나님의 임재도 강합니다. 눈물이 많은 곳에 은혜도 많습니다. 2000년 전 이 지상에서 가장 어둡고 낮은 자리에 임하셨던 주님께서 우리도 그렇게 어두운 곳으로, 낮은 곳으로, 루저들이 숨어 든 곳으로 찾아가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렇게 될 때, 2000년 전 목자들이 추위에 떨면서 들었던 그 천사들의 음성이 다시 들릴 것입니다.

 

"더없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 (14절)

 

우리가 루저의 심정으로 이 사회의 루저들을 찾아가 함께 있어 줄 때 하나님께서는 높이 영광 받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성탄의 은혜를 축하하고 감사하는 루저들의 모임 속에 주님께서 임재하시어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를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루저 중에 루저의 모습으로 태어나시고, 루저 중에 루저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그리스도, 그분의 은혜가 이 땅의 모든 루저들에게 임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사랑의 주님,
주님의 은혜 없이는
저희는 어쩔 수 없는 루저임을 고백합니다.
그 옛날 마리아처럼
그리고 목자들처럼
고개 숙여 주님의 은총을 빕니다.
저희에게 구원의 빛을 비추어 주시고
주님의 고귀한 자녀로 회복시키소서.
그 은혜를 마음에 품고
이 땅의 루저들을 찾아가게 하소서.
주님이 그러셨듯,
낮은 곳, 어두운 곳, 더러운 곳을 찾아가
주님의 빛으로 그곳을 밝히게 하소서.

아멘.

 

 

김영봉 목사 / 와싱톤한인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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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02 09:14 2010/01/02 09:14

천재지변의 사고로 딸을 잃은 엄마가
한 세미나에서 자신이 겪은 감정을 말하는 도중
눈물이 복받쳐 말을 잇지 못하면서 발표가 중단되었답니다.
그랬더니 사회자가 슬며시 곁에 다가와
물컵을 건네주면서 속삭이듯 말했다지요.
‘눈물도 말言이에요’

그 한마디로 깊은 날숨 같은 위로를 받았고
덕분에 감정을 잘 추스를 수 있었다는
그녀의 경험담을 전하는 일은 차라리 사족입니다.
자신을 그 엄마의 입장에 놓고 생각하면
금방 답이 나오는 문제이니까요.

부부 싸움 도중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너무 답답해서 울고 있는 아내에게
‘당신이 지금 울고 있는 이유를 세 가지로 정리해서 말해보라’는
논리적 남편의 전략적 주문은
아내 입장에선, 일종의 재앙입니다.
적절한 타이밍에 ‘눈물도 말(言)입니다’ 같은
지혜와 아량을 발휘할 사람이 곁에 있다면, 축복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지혜와 아량이 어른의 필수 조건인 것 같은 생각이
절실해지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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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03 10:10 2009/12/03 10:10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영화 <8마일>은 외설적인 요소를 많이 완화시킨 상태로 에미넴으 노래와 실생활을 묘사하지만, 기독교인이 여기에 표현된 많은 영상을 보고 어안이 막히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어떤 기독교 단체는 감정을 상하게 하는 요소에만 초점을 맞추는 대단히 편협한 태도를 취하는 탓에 소외 계층의 심리 상태를 이해하지 못한다. (p152)

에미넴의 팬들은 화목하지 못한 가족관계, 경제 문제, 편부모 가정의 성장 환경, 여자친구와의 결별 등과 같이 영화가 묘사하는 에미넴의 난처한 상황에 자신들도 공감한다고 털어 놓는다. 기독교인은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고통을 인정하고 살핌으로써 그들과 대화를 시작할 수 있다. 어쩌면 에미넴은 그런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교회에 상기시켜 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p153)

"기독교인이 에미넴의 음악을 들어도 될까?"라고 질문하는 것도 중요하나, 그 질문에 집착하는 태도는 기독교인이 은둔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제한할 수 있다. 부시 대통령이 말했다고 전해지듯이 에미넴은 사실상 "미국 미성년자들에게 소아마비 다음으로 가장 해로운 위협"일지도 모른다. 에미넴이 그 정도로 심상찮은 위협을 의미하긴 하지만, 정말 기독교인이라면 청취자들이 에미넴에 심취한 상태에서 벗어나게 할 만큼 매력적인 새로운 문화 아이콘을 창조해야 한다는 반응을 보이는 것이 마땅하다. (p156)

(사리스키, 절망과 속죄-에미넴에 대한 신학적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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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02 01:53 2009/11/02 01:53

최근 기사들

인용들 2009/11/02 01:51

최근 기사들을 보다가 몇 가지만 스크랩해봤습니다.
참 당혹스러운 일들이 한 해동안 많이 일어났음을 실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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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노조 최상재 위원장은 초등학생 딸이 보는 앞에서 경찰에 강제 연행되었다. YTN노조 노종면 위원장은 큰딸 수술을 앞두고 구속되었다. 자영업자인 이태봉씨와 양재일씨는 ‘조·중·동 광고주 불매운동’을 하다 구속되었다. KBS 정연주 사장은 사장 자리에서 쫓겨나고 검찰에 연행되었다. ‘고대녀’ 김지윤씨는 과외 아르바이트를 가다 경찰에 연행되었다. KBS 신태섭 이사는 이사직에서 쫓겨나고 대학에서도 밀려났다. ‘언론소비자주권 국민캠페인’(언소주)의 김성균 대표는 구속이 임박했다. ‘미네르바’ 박대성씨는 인터넷에 올린 글 때문에 구속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고재열 기자, 정연주부터 고대녀까지 ‘MB 난민’ 합창 - 시사IN]



구속 수사를 받은 미네르바(박대성)를 보자. 1심에서 무죄 판결이 났다. 1심 판사가 ‘좌빨’이어서 무죄를 내렸겠는가? 전혀 아니다. 보수적인 판사의 눈에도 미네르바는 무죄로 보이는 것이다. 실제 내용이 진실에 부합하면 처벌할 수 없다는 게 민주주의 핵심 원리이다. 정부의 구속 수사 방식은 ‘사상의 자유시장’이라는 민주주의 핵심 원리를 스스로 위반한 것이다. 그런데도 구속 수사한 이유는? 미네르바가 구속되는 것을 본 다른 누리꾼들이 자신이 올린 글을 삭제하거나 자기 검열을 하게 된다. 이를 법률 기본권에 대한 냉각 효과라고 한다. 기소를 하는 순간 시민은 얼어붙게 된다.

정연주 전 사장이 배임혐의로 기소됐다. 하지만 결국 무죄판결이 났다. 나는 학생들에게 정 전 사장이 무죄를 받는다고 공언했다. 배임은 형법상 중요한 재산 범죄이다. 정 전 사장의 배임혐의 내용은 국세청과 한국방송이 세금 문제를 두고 소송을 하다 법원의 조정 권고에 응했다는 것뿐이다. 이사회와 경영자문위원회를 거쳐 조정에 응했는데 이걸 배임으로 처벌하면 법원은 배임 교사범이 되고 만다. 이렇게 정 전 사장 사건은 무죄가 났는데 사건을 지휘한 차장검사는 지난 인사에서 승진했다. 결국 유죄면 좋지만 무죄가 되더라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촛불이 꺼지고 나니까 촛불시위 참가자를 처벌하고 있다. 이른바 광장 민주주의는 대의 민주주의 한계를 보완하는 핵심 장치이다. 폭력이나 방화는 통제되어야 하나, 통상의 광장에서 발생하는 경미한 불법은 표현의 자유 안에서 용인되어야 한다는 것이 주요한 법리 중 하나이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표현의 자유를 누리는 과정에서 나오는 필연적인 일탈을 강경 진압하는 게 법치라고 믿는다.

최근 국정원이 박원순 변호사를 상대로 국가 명예를 훼손했다며 2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한마디로 코미디다. 앞서 말한 국가 모독죄를 민사적으로 부활시켰다. 국정원 처지에서 민사소송에서 승소하지 못해도 상관이 없다. 앞서 지적한 냉각 효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조국 교수, “김이소 본받지 말고 정약용 본받아라” - 시사IN]



촛불집회 참석했던 한 새내기 대학생이 징역6월(집행유예1년)의 형사처벌을 받은 뒤 학교 쪽으로부터 유기정학 처분까지 받아 이중처벌 고통을 겪고 있는 사례가 발견됐습니다. 게다가 이 학생은 서울시로부터 2억여원의 민사소송까지 당한 상태였습니다. 촛불집회 참석했다 ‘처벌3종’세트를 선물로 받은 이 대학생에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요? 아주대 1학년 학생인 방아무개씨. 수원에 거주하던 방씨는 지난 5월 2일 ‘촛불1돌’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원래 오후2시 서울역 광장에서 시작했던 집회부터 참석했던 건 아니었고, 친구들과 서울 청계광장에 놀러왔다가 우연히 촛불집회 현장을 목격하고 함께하기로 결심했다고 하더군요.

방씨는 당시 시민들이 무대점거를 하자 함께 우르르 따라 올라갔던 모양입니다. 경찰에 연행됐고, 방씨는 징역 6개월의 형사처벌 판결을 받았습니다. 문제는 서울시가 이 학생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걸었다는 점입니다. 서울시와 서울문화재단은 현재 이 학생을 포함한 9명에 대해 재산상 손해를 입었다며 위자료 청구소송을 건 상태입니다. 청구액은 무려 1억 8천 5백여만원입니다. 현재 재판이 진행중인 상태입니다. 그런데 서울시가 위자료 소송을 건 사람들은 집회 주최 단체나 간부들이 아닌 이렇게 평범한 학생과 시민들이라는 점에서 좀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민변의 설명을 들어보면, 서울시는 그냥 형사처벌 받은 9명을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고 합니다. 페스티벌이 무산된 것은 저 역시 같은 서울시민으로서 지켜보기 참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꼭 저렇게 거액의 민사소송을 걸어 손해배상을 요구해야 하는 지 모르겠습니다. 등록금도 겨우 내고 다니는 저 대학생이 무슨 돈이 있겠습니까. 서울시가 시민들 상대로 괜한 분풀이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방씨의 황당한 경험은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방씨는 학교로 돌아와 유기정학이라는 이중처벌을 받습니다. 아주대학교의 학생준칙(3장 11조 3항)에 “벌금형 이상의 형사처벌을 받은 경우 무기정학에 처한다”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학교 쪽은 방씨가 형사처벌을 받게 되자 지난 9월 21일 징계위원회를 열어 방씨에게 2주간 유기정학 처분을 내리기로 결정했습니다. (원래 무기정학인데 학생이 사정을 해서 유기정학으로 감면) 방씨는 대학교 1학년 학생입니다. 이제 새내기입니다. 촛불집회에 우연히 참석했을 뿐입니다. 조직적인 활동을 한 것도 아니고, 이날 하이 페스티벌 무대점거를 조직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형사처벌에, 2억원의 민사소송에, 유기정학까지 당했습니다. 방씨와 직접 통화해 봤는데. 목소리에 힘도 없고. 어떻게 이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날 수 있는지 당황스럽고 막막하다고 하더군요. 좀 딱해 보였습니다.

[허재현 기자(한겨레), 촛불집회 뒤 ‘형사처벌·억대소송·유기정학’ 겪은 대학 새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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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02 01:51 2009/11/02 01:51



I Look To You
/Whitney Houston

As I lay me down
Heaven hear me now
Im lost without a cause
After giving it my all

Winter storms have come
And darkened my sun
After all that I've been through
Who on earth can I turn to

I look to you
I look to you

After all my strength is gone
In you I can be strong

I look to you
I look to you

Yeah

And when melodies are gone
In you I hear a song

I look to you

After losing my breath
There's no more fighting left
Sinking to rise no more
Searching for that open door

And every road that I've taken
Lead to my regret
And I don't know if Im gonna make it
Nothing to do but lift my head

I look to you
I look to you

Yeah

And when all my strength is gone
In you I can be strong

I look to you
I look to you

Oh yeah

And when melodies are gone
In you I hear a song

I look to you

(my levee's have broken, my walls have come)

Coming down on me

(crumbling down on me)

All the rain is falling

(the rain is falling, defeat is calling)

Set me free

(i need you to set me free)

Take me far away from the battle
I need you
Shine on me

I look to you
I look to you

After all my strength has gone
In you I can be strong

I look to you
I look to you

And when melodies are gone
In you I hear a song

I look to you

Yeah

I look to you
Oooooooh
I look to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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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27 23:43 2009/09/27 23:43

안타깝다.. 너무나 안타깝다.. 이단이라니... 대체 무엇 때문에...

  이재철 목사님, 내가 가장 존경하는 목사님 중 한 분, 생명력있는 예수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전달하는 이 시대의 영적 리더,... "청년아 울더라도 뿌려야 한다." 나는 그 책을 읽고 무너져내렸다... 누구보다 교회 내 민주화에 앞장 선 분, 지금은 상당 수 교회에서 당연 시 여겨지는 교회 수입 내역 공개 등 민주적 요소들을 가장 먼저 교회에 도입, 실천하신 분...

그런데 그분이 기소를 당했다. 장로, 권사 직분이 뭐 그리 대단하길래, 일정 자격 요건을 갖춘 사람들에게 모두 장로, 권사 직분을 전달한다는 그 사실 하나로, 노회에 기소를 당했다. 심문할 때, 최소한의 변론의 기회조차 박탈당한 채, "예, 아니오"만 답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결국 독립교회를 선언하셨고, 결국 노회는 말도 안되는 이유를 들어 '이단'으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이단이라.. 그것이 그리 쉽게 입에 담을 수 있는 단어인가...

예수님도 말씀하셨다. "얘들아, 나는 너희들이 지은 그 어떠한 죄도 사해줄 수가 있단다. 그런데 한 가지 사할 수 없는 죄가 있으니, 그것은 성령훼방죄란다. 성령을 제한한 죄는 금세에나 내세에나 사함을 받을 방법이 없단다." 나중에 예수님을 직접 뵙고 예수님이, "너 왜 나를 증거하는 내 종을 이단이라하여 핍박했느냐?" 하고 물으시면 뭐라 대답할까.. 아니 심판이 있다는 건 믿기나 할까.. 우리는 이단이란 단어에 대해 매우 조심스러워야 한다.

재작년, 내가 섬기는 교회도 비슷한 경우를 당했다. 장로 10명이 7:3으로 나뉘어, 사이가 나쁘다는 것 때문에, 말도 안되는 이유를 들어 다수파가 나머지 3명을 징계하기에 이르렀다. 그 중 1명의 장로는 "출교"조치가 내려졌다. 청년들은 울면서 그 장로 7명의 길을 가로막았다...

이재철 목사님 기소의 이면에는 두 가지가 깔려 있다. 첫째, 양화진 관리에 관한 것이다. 백주년 교회에서는 양화진 관리를 맡고 있다. 원래 교단이 담당하던 것인데,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양화진이 무엇인가? 백여년 전 한국의 복음화에 인생을 바쳤던 선교사님들과 그의 가족들의 유해가 매장되어 있는 곳이다. 결국 이를 빼앗고, 선교백주년기념교회라는 타이틀을 무색하게 함은 물론, 유료화를 통해 이권을 얻기 위함이다.

둘째는 이재철 목사님에 대한 도를 넘어선 견제이다. 이재철 목사님 소위 '비주류'에 속한다. 백주년 교회도 통합교단에 소속되어 있지는 않다. 단지 통합교단으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은 것 뿐이다. 책도 잘팔린다. 설교도 인기있다. 잘 나가니 배아프다. 뒤늦게 주의 종이 되어서, 신대원 기수로 쳐도 동년배 목사들에 비하면 한참 후배가 된다. 한 마디로, 빽도 없고, 방패도 없다. 갑자기 유명을 달리한 대한민국의 한 전직 대통령이 생각이 난다.

장로, 권사가 도데체 뭐길래? 교단이 우려하는 것은 두 가지이다. 우선 장로, 권사직분을 받고 싶어하는 수많은 성도들이 백주년 기념교회로 몰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너 잘 되는 꼴은 못보겠다는 거다. 다음은 백주년기념교회에서 한 번 장로, 권사직분을 받은 사람들이 다른 교회로 가면 어떻게 인정을 해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어이가 없다. 그 직분 가지고 천국 가는 것인가?

무엇이 장로, 권사의 선발 기준인가? 장로란, 영어로 presbyter, 또는 elder로 기록된다. 교회에는 크게 두 가지 직분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 즉 주의 종이 있고, 이들을 돕기 위해 백성들로부터 뽑힘을 받은 자, 바로 장로가 있는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70인의 장로들을 통해 통치하였고, (출애굽기 3:16, 민수기 11:16) 바울과 바나바는 장로들과 협력하여 사역을 했다.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여 저희를 그 믿은 바 주께 부탁하고" (사도행전 14:23),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사도행전 20:17) 이와 같은 말씀에서 보듯, 신구약에 걸쳐 교회는 장로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였음을 알 수 있다.

때로 신약에서는 '감독'과 '장로'가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바울은 사도행전 20:28에서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여 '감독자'로 칭하였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사도행전 20:28)

그렇다면 '감독'의 자격은 무엇인가?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득을 탐하지 아니하며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행을 좋아하며 신중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 (디도서 1:7-9)

"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 (디모데전서 3:2-7)

 이러한 장로의 용례가 시대를 따라 변하여, 장로교회가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어떻게 보면, 장로교는 태생적으로 '민주적'이다. 마치 한 국가가 주권은 국민에게 있으나, 모든 국민들에 의해 직접 통치되지 못하여 '대의제'를 통해 운영되듯, 장로교도 성도들의 대표인 장로회를 통해 성도들의 의견이 반영되고 합의에 도달하는 시스템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오늘날의 장로교는 위 성경의 기준에 맞는 자를 선발하고 있는가? 네이버에서 '장로 직분'을 치면, 지식인에서 서리집사는 300만원, 장로는 3000만원을 납부해야 된다는 글이 있다. 극소수의 교회일지는 모르나, 이것이 당연시되는 교회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비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이미지화되고 있다는 것 자체로도 부끄럽고 통탄할 일이다. 대다수의 교회는 거의 종신직이라 할 수 있는 장로제를 택하여 고인 물이 썩어가듯, 부패하고 있다. 장로를 탄핵하고자 하여도, 그 장로 본인이 소속된 당회가 이를 최종 결정하는 기구이므로 탄핵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리하여 일부 장로들은, 소통은 커녕, 눈과 귀를 닫은채 자신들의 뜻이 마치 하나님의 뜻인양, 일방적으로 결정, 집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누가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 당당히 말하겠는가?

일부 썩은 장로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이 교회에 들인 헌금이 얼마인데..." "나보다 이 교회에서 봉사 더 많이 하고, 예배 많이 드린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구 해.." 그 말이 사실이긴 하다. 결국 이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가 아닌, 장로들의 사유물이 되어버리지만.

물론 너무나 존경스러운, 표현 그대로 "성도들 믿음의 대표가 될만한" 장로님들과 권사님들도 존재한다. 누구보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희생하시고, 주의 종을 존경하며, 성도들을 사랑하시는 분들...

장로와 권사 직분의 목적이 무엇인가? 세상에서는 성공한 사람으로 "-사" "-장" "-원" 타이틀을 달았으니, 교회에서는 장로나 권사 정도는 달아야 하는 것인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 모든 성도 앞에서 기도하는 기회를 얻기 위함인가? 평생 내가 섬긴 교회, 머릿수도 헌금액수도 빵빵한 교회 만들어보기 위함인가?
 
아니다. 목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다. 창조주이신 그가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셔서 남김 없이 흘리신 그 피의 값으로 사신 바 된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역시 그분의 피값으로 구함받은 바 된 성도들의 영혼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함이다. 그리하여 예수님 다시 만났을 때, 잘했다 칭찬받고, 그분의 영원한 품에 안기는 것이다.

요는 장로직에 대한 기준은 존재할 지언정, 구체적 지위요건은 성경에 열기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선출방법, 임기, 역할 그 어느 것도. 심지어 권사 직분은 성경에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집사' 직분에 대하여 유추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개혁하고자 나선 이재철 목사님을, 비난하는 것도 모자라, 별 시덥지 않은 이유로 '이단'이란다. 유치원생도 이런 유치하고 소심한 복수는 하지 않을 것이다.

백주년기념교회는 통합교단이 아니다. 이미 독립교회가 되었다. 그런데 무슨 이단 규정이란 말인가. 믿지 않고 죽은 자 위한 기도를 장려했다고? 흠 난 너무 좋은데?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주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물론, 믿지 않고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까지 기도해줄 수 있는 위대한 사랑, 적어도 내가 만난 예수님은 그런 분이다. 나는 평생 절에 다니시다 돌아가신 내가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우리 할머니를 위해 매일매일 기도한다.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자만이 천국에 갈 수 있음은 당연한 진리이며, 이재철 목사님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아마 통합교단의 차광호 먹사 패거리들은, 믿지 않고 죽은 자들의 장례식 가면, 슬퍼하는 유족들의 손을 잡고 이렇게 이야기하나보다. "안녕하세요. 남편분이 예수 믿지 않았으니, 영원히 저주받아 지옥불에 영원히 고통당하는 형벌을 받을텐데, 참 안타까우시겠습니다." 고 노무현 대통령 장례식에서, 불교, 원불교와 함께 고인의 명복을 빌어준 개신교, 천주교는 이단인가? 예장통합 서울서노회가 납작 업드려 발바닥을 핥는 한기총이 한 기도였는데도?

이 시대의 가장 깨어있는 그리스도인 리더를, 다름 아닌 그리스도인 리더들이라는 사람들이 이단으로 규정하는 세상, 이것이 바로 한국교회의 단면이다.

피눈물이 있다면, 흘리고 싶다.
백주년 교회가 안스러워서도 아니고, 이런 간악한 자들에게 당신이 피값으로 사신 주의 자녀들을 맡기신 예수님을 뵐 면목이 없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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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25 22:38 2009/08/25 22: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