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성 보고서

잊혀진 성 보고서: 필립 얀시

** 이 글은 <뜻밖의 장소에서 만난 하나님>이라는 필립 얀시의 책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요사이 거론되고 있는 '성(性)' 문제에 관해 거론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소개합니다.

1994년에 있었던 미국의 성 보고서(sex survey)에 관한 언론들이 한창 떠들석거리고 있었을 때, 나는 1934년에 출판되었던 <성과 문화(sex and culture)>라는 책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어떤 큰 대학 도서관의 개가식 도서 진열대에서 그 책을 찾았을 때 나는 고고학자가 지하 동굴에서 무슨 골동품을 발굴하기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책의 내용은 이러했다.

"'문명은 억압된 성의 부산물'이라는 프로이트학파의 생각을 검증하고자, J.D. 언윈(Unwin)이라는 학자가 86개의 서로다른 사회집단을 조사했다. 여기서 그가 얻은 결론은 많은 학자들을 놀라게 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언윈 자신에게도 놀라운 것이었다. 왜냐하면 86개의 서로다른 집단들 모두가 한결같이 일부일처제와 문화의 '팽창적 활력'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음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혼인에 있어 성적 정절(sexual fidelity)은 한 사회의 우월성을 예견케 하는 단연 뚜럿하고 중대한 표징이었다는 것이다."

언윈은 그 어떤 종교적 확신도 없는 사람이었고, 또 자기 이론에 어떤 도덕적 판단을 덧붙이는 것을 원치 않았다. "난 무엇이 옳고 그르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렇게 결론지을 수 밖에 없었다. "인간사에는 혼전 순결과 결혼 후 정절을 소홀히 여기는 세대 그 이후에 그 사회가 자체의 활력을 계속 유지했다는 기록은 없다."

로마, 그리스, 수메르, 무어(Moorish), 바빌로니아, 그리고 앵글로 색슨 문명에 이르기까지 언윈은 수천 년의 역사르 뒤져야 했다. 그러나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그는 성적 정절을 가치있게 여겼던 그 기간동안에만 그들 사회가 문화적으로 또 지리적으로 번창하는 현상을 발견했다. 하지만 불가피하게 성풍습이 느슨해짐에 따라 사회는 점점 기울어 가는 추세를 보였다. 오직 그들이 다시 엄격한 성적 기준을 회복했을 때에 사회는 또다시 상승세를 탔다.
언윈은이런 주기적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만일 당신이 내게 어째서 이런 현상이 일어났는가 하고 묻는다면, 나는 모른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어떤 과학자도 이에 대답하기 어렵다. 당신은 이런 현상을 관찰하고 또 묘사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왜 그런지 설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런 현상이 그에게 너무도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언윈은 영국의 일급 시민들로 구성된 특별한 그룹을 선정하기를 제안했다. 이들은 혼전 순결의 서약을 지키고, 결혼 후에도 엄격한 일부일처제의 틀 안에서 성적인 정절을 지킴으로써 대영제국의 미래를 기약할 사람들이었다.

언윈은 '새로운 사회의 성적 기초'라는 그의 이론은 충분히 전개시키지 못하고 죽었다. 하지만 그가 완성치 못한 연구 결과들은 앨더스 헉슬리(Aldous Huxley)의 서문을 달고 <호푸시아(Hopousia)>라는 제목의 또 다른 책으로 발간되었다.

언윈이 이런 연구에 착수하기 한 세기 전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의 추중자들은 성에 관한 '물컵(Glass of water)'이론이라는 아주 다른 견해를 추종하고 있었다. 그들에 따르면 성적 욕망이란 식욕이나 갈증과 하나도 다를 바 없으며, 성적 욕망에는 어떤 별다른 신비스럽고 성스런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이런 견해에 따라 소비에트 법을 다시 뜯어 고쳤다. 물론, 이 이론은 곧 붕괴되었고, 소비에트 사회는-최소한 표면상으로는-성 도덕에 관한 한 다시금 거의 청교도적인 입장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오늘날 우리는 이 물컵 이론의 재탕을 목격하고 있다. "성이란 결국 수 세기를 걸쳐 살펴볼 때 출산이라는 사뭇 심각한 기능과 따로 분리해 생각할 수 있다." 이 글은 바바라 에렌라이히(Barbara Ehrenreich)가 '타임(Time)'사설을 통해 주장한 것이다. 그녀는 더 구체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동성연애는 그저 또 다른 삶의 방식일 뿐이라고 가르치는 것이 어째서 비윤리적인가? 또 수음(手淫)은 해롭지도 않을 뿐 아니라 정상적인 행동이라고 가르치는 것이 도대체 어떤 점에서 비도덕적이라는 것인가? 성인 두 사람이 서로 동의하는 가운데 자신들이 원하는 때 언제든지 서로 애무하는 것이 애를 갖는 것보다 훨씬 더 의미있다고 가르친다고 해서 도대체 누가 뭐랄 수 있겠는가? 이 비좁아 터진 지구 위에서 통하는 윤리가 하나 있다면, 그것은 오직 여성은 자유로우며, 아이들은 사랑받아야 하며, 성 행위는 서로 끌리고 또 동의하는 성인들간의 놀이라는 관점에서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뿐이다."

에렌라이히의 성의 '비윤리화'에 대한 요청은 사실 현대의 성적 혁명이 태동했던 1960년대 냄새를 풍기고 있다. 에이즈(AIDS)가 고삐 풀린 사랑놀음으로 내달리던 자유 바람에 잠시 일격을 가했을 지는 모르나, 실상 성에 대해 일관된 성 윤리를 재구성해 보려는 사회 평론가들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의 이러한 환원주의적 사회 속에서 성은 마치 콜라를 마시거나 햄버거를 먹듯 순전히 생물학적인 행위로 간주된다. 일단 피임 방법만 확실하면 우리는 곧바로 성교 단계로 돌입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성은 이런 환원주의를 거부한다. 마치 성 행위가 단지 성기만의 결합이 아니라 삶의 연합을 포함하기라도 한다는 듯이, 질투는 여전히 그 흉칙한 머리를 추켜세우고 오쟁이를 쥔 남편은 아직도 아내의 정부(情夫)를 살해하는 일이 허다하다. 만일 성교가 단지 생물학적인 현상일 뿐이라면, 왜 사랑이니 미움이니 신뢰니 배신이니 하는 일들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한가지 덧붙여 말한다면, 이전 세대에는 구경도 할 수 없었던 다양한 피임약들이 범람하는 이 시대, 성 교육이 그 어느 때보다 보편화된 우리 사회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혼외 임신을 산출해 내고 있는 시대라는 점은, 성이 단지 생물학적 현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초월적인 것을 잃어버린 인간 영혼의 불안과 공허에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솔직히 나는 언윈의 성과 문화에 대한 이론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그의 책들은 대중들이 원치 않는 메시지를 전했던 셈이다. 또 정절을 위한 그의 도적적인 호소는 발동하는 욕정에 비해 너무도 쉽게 무너질 수 있었다. 결국 그가 찾아낸 역사의 진리는 도서관의 두꺼운 먼지 아래 파묻혀 있다. 게다가 그가 말한 사회의 '팽창주의적 활력'이라는 기준은 무엇이든 축소화하려 하고 또 제국주의적 태도를 꺼리는 현대인들에게는 그다지 매력적인 것이 못된다.

언윈이 그런 생각을 했을리는 없지만, 그의 이론은 현대 사회와 상당히 멀어져 버린 성에 대한 기독교적 관심에 훨씬 가까이 접근해 있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성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선물이다. 다른 모든 선물처럼 성운 우리가 세운 규칙이 아니라 하나님의 규칙에 따라 관리되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번영의 우상을 숭배하느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관리하도록 맡기신 이 지구를 파과해 버린다면 그것은 결국 우리 자신을 파괴하는 셈이 된다. 만일 우리가 힘과 성공을 숭배하여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던 어떤 위대한 문명을 이룩한다 해도 그것 역시 언윈의 방대한 역사의 탐구가 확실히 보여 주듯, 결국은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성을 우상화할 경우도 마찬가지다. 성의 우상화는 한 인격전체, 어쩌면 한 사회 전체를 파멸시킴으로 결국은 시패하게 될 것이다.

저널리스트인 체스터턴(G.K. Chesterton)은 창녀촌을 찾는 사람은 실상 하나님을 찾고 있는 중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의 이 말은 언제나 예수께서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과 나누었던 대화를 생각나게 한다. 거기서 그 분은 사랑을 향한 그 여인의 갈증에 대한 대화로 시작해서 결국 그녀에게 생수를 알게 하셨다.

이제 우리는 성에 관한 서로 충돌하는 두 가지 관점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할 입장에 서 있다. 이 두 관점들은 각각 나름대로의 아이러니를 포함하고 있다. 환원주의적 물컵 이론은 그것에 합당치도 않고 감당할 수도 없는 초월적인 위치로 성을 끌어올리지만, 그것을 숭배하면 할수록 우리와 우리 사회를 파멸시킨다. 한편 생수(Living water) 이론은 처음에는 성을 생각보다 낮은 위치로 끌어 내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성을 그 합당한 지위로 복구시킴으로써 성이 가져야 하고 가질 수 있는 초월적인 가치를 회복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