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깔론으로 보는 정치세상

김 근 칼럼: 색깔론으로 보는 정치 세상

** 이 글은 1999. 8. 25일자 한겨레에 실린 김근 논설주간의 것을 인용한 것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8.15 선언을 통해 재벌 개혁과 국가보안법 개정방침을 밝힌 뒤 우리 정치권은 색깔론에 휘말려 들었다. 물론 색깔론은 재벌개혁과 보안법 개정에 반대하는 쪽에서 제기하는 것이다. 재벌 개혁에 대해 일부에서는 한때 '사회주의적'이라고 공격했으니, 더이상 토론의 여지가 없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재벌개혁이 건실한 시장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절실히 필요한 일이고, 그런 점에서 그 개혁에 사회적 공감대가 마련된 줄 알았는데, 이처럼 엉뚱한 공격이 튀어나와 당혹스러워 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보안법 개정에 대해서도 '반국가 단체인 북한이 대남 적화통일 야욕을 포기하지 않는데 국가보안법을 손댈 수 없다'는 게 그들의 주장의 핵심이다. 오래 묵은 색깔론이고, 그 색깔론의 눈으로 보면 이 세상은 여전히 냉전적 구도 속에 머물러 있는 셈이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의 일부 조항이 끊임없이 인권을 유린해 온 과거를 생각하면 보안법 개정문제를 색깔론에 맡겨 방관하는 것은 너무 무책임한 일이다.

냉전 시대에 머문 정치풍토

색깔론이 위세를 떨치는 것을 보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해본다. 색깔론은 지난 48년 정부수립 이래 반세기 동안 이 사회의 진보와 양심에 제갈을 물려온 극우적 수단이다. 그것이 지금도 유효하다면 우리 정치 풍토는 아직도 비열한 메카시적 수법이 통용되는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는 셈이다. 상대 정치세력이나 정치인에게 터무니 없는 색깔을 입혀 매장하거나 타격을 주는, 이러한 비겁한 정치행위가 사라지지 않고는 더이상 정치개혁이니 선진정치니 하는 말들은 공염불에 불과한 일이 될 것이다. 적어도 이런 일이야말로 시민사회와 지식인 사회가 들고 일어나 끝장내야 할 대상이다. 정치의 발전은 이런 싸움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지 막연히 정치 일반을 비판하는 것으로 시종해서는 그것을 얻을 수 없다.

이번 색깔론은 야당이 제기하고 여당이 그 대상이 되었다. 이것은 종전에 비해 거꾸로 뒤바뀐 현상이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는 색깔론은 으레 여당이 기득권과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야당에게 뒤집어 씌우는 것이 상례였다. 이런 것으로 보아 정권 교체는 현상적으로는 실감난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아직은 색깔론조차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실현은 정작 진행중이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대체로 색깔론이 권력을 가진 쪽에서 제기하는 것이라면, 정권이 바뀐 뒤에도 그 색깔론은 말할 수 있는 야당과 일부 언론은 아직도 강고한 권력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색깔론이 득세하는 상황에서는 여야 경쟁이 냉전적이라는 의미가 다원적 사고와 토론을 용납하지 않고 상호 민주적 소통관계를 배재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여야관계가 단선적이고 반민주적 바탕 위에서 운영되고 있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색깔론이 등장한 뒤로 진보적 정치이력을 가진 야당 인사들에 관심이 쏠렸다. 그러나 이회창 총재를 시작으로 여러 국회의원들이 과거 자신들이 지닌 정치 소신을 굽혔다. 재벌개혁과 국가보안법 개정에 평소 소신과 달리 반대하거나 어정쩡한 태도를 보인 것이다. 이런 태도 변화는 맹목적인 여야 정쟁의 소산이지만 유권자들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정치라는 것이 정치적 이념이나 신념을 관철하는 행위이고, 그것을 통해서 나라와 사회가 발전하는 것일 것이다. 정치인은 그런 과정에서 결과를 통해 보람과 지지를 얻어 성장할 수 있을 것인데도 야당 사람들은 그런 정치원리를 스스로 버리고 있다.

시민사회가 들고 일어나야

또하나. 안타까운 것은 노동계나 시민 단체들의 태도이다. 물론 그들은 재벌개혁과 국가보안법 개폐를 위해 숱하게 싸워왔다. 그런데 정작 그것을 실현시키려는 마당에 반개혁적 저항이 거세게 밀어닥친다. 그렇다면 거기에 맞서 대단한 싸움을 벌여야 할텐데도 그 싸움의 강도가 예상보다는 훨씬 낮아 보인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싸움은 여야 정쟁 차원을 넘어 우리 사회의 바탕을 다지고 기초를 다시 세우는 작업이라는 사실이다. 지금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미래는 크게 그 모습을 달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