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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관계 '종속' 벗어나 재정립해야

/정경모

일본에서 30년 이상 망명 생활을 하며 남과 북을 아우르는 제3의 입장에서 민족 화해를 위해 노력해온 정경모(78)씨는 “최근의 북한 핵 위기는 미국이 1994년 제네바 합의를 지키지 않은 데서 출발한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 시민단체인 ‘씨알의 힘의 회’ 회장으로 <류(粒·씨알)>라는 계간지를 발행하고 있는 그는 지난주 도쿄 시내에서 기자와 만나 미국이 한국에 대한 사실상의 ‘신탁통치’를 청산하고 남북한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한반도 안정과 평화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미국 에머리대학을 졸업한 뒤 한국전쟁 때 당시 장면 주미 대사의 권고로 미국 국방부 직원으로 들어가 판문점 휴전회담 등에 참가했으나 결국 민족주의자로 변신했다고 한다. 이후 박정희 정권 때인 1970년 일본으로 건너가 30여년간 문필 활동을 통해 한국의 민주화와 남북통일 운동을 벌여왔다. <찢겨진 산하> 등의 저서를 한국에서 출간했으며 89년에는 문익환 목사와 함께 방북해 당시 김일성 북한 주석과 통일 문제를 논의하기도 했다.

　

―최근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북한 핵 위기의 본질은 무엇인가

=북한 핵 문제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북-미 간의 대화가 어떻게 진행돼 왔는지를 알아야 한다. 53년 휴전협정 체결 이후 미국이 처음으로 북한을 대화 상대로 인정해 정치교섭을 한 것이 93년 6월2일부터 미국 뉴욕에서 열린 1차 북-미 대화다. 이것은 며칠 전인 5월29일 북한이 발사한 ‘노동’ 미사일에 놀란 미국의 요청으로 이뤄졌다. 이어 2차 회담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려 미국은 △북한을 주권국가로 인정하고 △핵 무기로 위협하지 않으며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지지하는 것과 함께 북-미 관계의 전반적 개선을 협의하기 위해 두 달 안에 3차 회담을 갖기로 했다.

하지만 미국은 3차 회담을 열지 않고 다음해 5월 막강한 군사력을 동원해 북한을 공격하려고 했다.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갔으나 전쟁을 할 경우 서울 시민 100만명의 사망을 포함한 엄청난 희생이 나는 것으로 예측되자 결국 단념했다. 이 와중에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김일성 주석과 만나 3차 회담을 중재했다. 그 사이 김 주석이 숨졌지만 미국은 약속대로 그해 8월8일부터 10월21일까지 3차 회담을 열었다. 이후 미국은 북한이 곧 붕괴될 것으로 보고 지킬 생각도 없는 공수표를 마구 끊었다. 이것이 제네바 합의인데 주된 내용은 △정치·경제 관계의 정상화 △무역·투자 장벽의 완화 △핵 위협 배제의 공식 보증 △경수로 제공과 흑연감속로의 건설 동결 △경수로 건설 때까지의 중유 제공 등이다.
　

―결국 미국이 약속을 위반해 이번 핵 위기가 일어났다는 얘기인가

=그렇다. 미국은 98년에도 제네바 합의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으면서 금창리 문제를 제기하며 북한 규탄 움직임에 나섰다. 이에 대해 북한이 8월31일 ‘대포동’ 미사일 발사로 대응하자 미국은 할 수 없이 윌리엄 페리 대북정책조정관을 등장시켜 대화노선으로 바꿨다. 이때 북-미 간에 가장 중요한 문제가 미사일이었는데 당시 조명록 국방위 제1부위원장과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서로 상대국을 교차방문한 것으로 볼 때 이 문제는 거의 해결 직전까지 갔다. 남북 모두 전쟁을 걱정하면서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당시 북한 쪽은 올브라이트 장관에게 미사일이 발사되는 내용의 카드섹션을 보여주며 “이것이 우리가 쏘아올리는 마지막 미사일이 될 것”이라는 말까지 했다.

이런 상황은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등장하면서 완전히 흔들렸다. 북한이 제네바 합의를 위반한 것이 아니라 미국이 위반한 것이다. 이번 위기도 미국이 중유공급을 중단한 뒤 북한이 ‘너희가 위반하니까 우리도 위반한다’며 핵 시설 동결 해제에 들어가면서 생긴 것이다. 전쟁을 하기 위한 군사용이라기보다 외교용이라고 본다.
　

―지난해 말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대북 포용정책의 계승을 주장하는 민주당의 노무현 후보가 당선됐다. 강경정책을 취하고 있는 미국과의 마찰도 예상되는데.

=노 당선자는 굉장히 어려운 상황에서 중책을 맡게 됐다. 부시 대통령은 표면상으로는 축하의 말과 만나고 싶다는 뜻을 전했으나 속으로는 매우 불편할 것이다. 부시 대통령은 심리적으로 선과 악의 이분법만으로 사물을 파악하는 사람이며 행동으로는 힘의 오만을 배경으로 한 일방주의 신봉자이니만큼 설사 온 세계가 동조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신의 길을 가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노 당선자에게 예수가 제자들을 세상에 보낼 때 한 “순진하기는 비둘기와 같으나 현명하기는 능구렁이와 같아라”(마태복음 10장16절)는 잠언을 강조하고 싶다. 즉 비둘기와 능구렁이의 속성을 함께 지니는 처신이 필요하다.
　

―긴장 국면에 있는 한반도 문제를 앞으로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나

=미국 국무부 정보연구국의 동아시아 부문 연구원을 지낸 바 있는 에드워드 올슨 해군대학 교수는 현재 미국과 한국의 관계를 후견인과 피후견인의 관계에 있다고 지적하며, 적절한 시기에 조선의 자유·독립을 확인한 43년 카이로선언의 정신에 따라 정상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또 김구 선생은 48년 5·10 단독선거에 불참하면서 “5개년을 한도로 하는 4개국 신탁통치조차 반대한 내가 어찌 미국 1국의 영구 신탁통치를 수락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 바 있다. 오늘의 한국이 ‘미국 1국에 의한 영구 신탁통치’의 나라라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미국 역시 한국내 반미감정을 잠재우고 정상적인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신탁통치체제’를 해소하는 동시에 북한과도 문제를 평화적으로 풀어가면서 정상적인 관계를 수립하는 데 힘써야 한다. 이것이 미국으로서도 유리한 정책이다.

지금 긴급한 문제는 미국이 중단을 선언한 중유 공급 문제다. 김영삼 전 대통령 때 경수로 건설비(46억달러)의 80%를 한국이 부담하겠다고 한 사실도 있으므로 공급 재개를 미국에 설득하면서 응하지 않으면 한국이 일정 기간 중유 공급을 맡는 것도 필요하다. 이것은 포용정책이 계속된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될 것이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지난해 9월17일 북한을 방문해 북-일 관계가 정상화하는가 했는데, 일본인 납치 문제가 부각되면서 원점으로 되돌아간 느낌이다.

=고이즈미 총리의 방북에 대해 처음에는 북-일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한 일본의 자주적인 결정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와서 보니 자주적 결정이 아니라 이라크 문제가 끝날 때까지 북한을 잠재워둘 필요가 있다는 미국의 요청에 따라 이뤄졌을 가능성이 크다. 납치 문제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고 수교와 경제협력 등을 미끼로 해 북한을 달래놓으려는 의도가 강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회담에서 납치 일본인 8명의 사망 사실이 전해지자 일본이 발칵 뒤집혔다. 사태가 급격히 악화하고 고이즈미 총리는 북한과 이야기할 자리도 잃음으로써 미국의 요망에도 답할 수 없는 진퇴양난에 빠졌다. 고이즈미 총리를 궁지에서 구출하기 위한 노 당선자의 중재 역할이 중요할 것이다.

여기서 납치 문제에 대해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일본인에 대해 “12살짜리 소년과 같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이는 상대편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는 역지사지 사고능력의 결핍을 지적한 것이다. 한국의 10만명의 군대위안부, 240만명의 강제연행 노동자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이 없으면서 죽었다고 알려진 몇 사람 때문에 천지이변이 난 것처럼 소란을 떠는 모습은 마치 철부지 어린애같다.
　

―한-일 관계에 대한 전망은

=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 대통령 등 한국의 역대 정권이 일본을 방문할 때마다 발언한 것이 ‘미래지향적인 한-일 관계’였다. 어두웠던 과거에서 서로가 벗어나 밝은 미래를 바라보자는 뜻이라면 반대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이 구호가 은근히 “북한에 대한 적개심을 공유하자”는 뜻으로 풀이되는 게 문제다. 최근 일본 사람의 한국에 대한 호감은 증대되고 있지만 북한에 대한 증오는 커지고 있는데 이것은 민족 전체를 위해서는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또 대일 관계에서 잊어서는 안되는 게 해방 뒤 미국의 대일 정책은 소련의 남하를 막기 위해 한반도와 만주 일대를 일본의 배후지로 부여해 이 지역에 대한 일본의 재지배를 허용한다는 미국 국무부 조지 캐넌 정책기획실장의 구상 위에 세워졌고 이런 흐름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즉 한국이라는 나라는 미국과도 대등한 관계가 아닐 뿐더러 일본과도 대등한 관계가 아니라는 점을 알고 대처해야 한다.
　

―남북 양쪽에 하고 싶은 말은

=남북의 화해를 모색하는 데 평생을 보내고 있지만, 왜 북한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없겠는가. 종교개혁의 선구자인 장 칼뱅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거대한 가톨릭 세력에 맞서 신권정치를 펼친 과정을 보면 북한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칼뱅은 시민이 세례식 때 웃거나 설교 중 졸았다거나 자신을 ‘선생님’이 아닌 ‘씨’로 부르는 경우 모두 사흘 간의 구류형을 내렸다. 개인의 사생활을 포함해 국가권력의 개입을 불허하는 인권존중이란 게 없었다. 남한을 비롯해 외부 세계가 북한의 체제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지만 언제 커다란 힘에 당할지 모르는 항구적 위기 상황에 있는 처지에서 보면 당연하다. 이상하다고 하지 말고 먼저 정상적인 체제가 될 수 있도록 외부의 압박을 풀어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면 북한도 변화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인터뷰=오태규 도쿄 특파원ohtak@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