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와 진보운동의 좌표

박노해 vs 조희연 대담

** 이 글은 한겨레 3월 7일자 신문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노동운동 생활문화로 다가가야

조희연: 이번에는 노동운동과 시민운동, 언론개혁 등 진보세력이 풀어야 할 구체적 현안들로 이야기를 풀어볼까 합니다. 노동운동가 출신으로서 현단계 노동운동의 흐름에 대해 할말이 많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박노해: 노동운동 또한 공동체 생활문화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출소 뒤 현장을 숱하게 돌아다녀 봤는데 노조의 일상활동이 대부분 죽어버렸더군요. 70년대 현장에선 노조는 못했어도 노래를 배우거나 문화활동을 하는 따위의 일상성이 있었는데 지금은 노조의 목적이 임금인상 같은 이익찾기에만 집중되더군요. 진보정당도 좋지만 더 시급한 것은 노동자들이 문화적으로 보수화되고 소비시장에 포섭되는 국면을 극복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노동자들의 표가 선거 때마다 지역성에 따라 갈리는 성향은 이런 모순의 결과가 아닐까요. 쪼그라든 계급적 정체성을 되찾기 위해 가장, 학부모 등 생활인으로서의 진보성을 밀고 나가야 해요. 최근 부각되는 노동시간 단축투쟁을 노조의 교육, 문화활동 영역을 얻어내는 쪽으로 연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희연: 최근 시민단체의 낙천, 낙선운동이 국민적 관심 속에 진행중입니다. 이 운동의 예상을 뛰어넘는 힘이 대중운동의 본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 최근의 낙선운동은 국민을 상대로 한 운동이란 점에서 여러 해결과제도 남기고 있습니다.

박노해: 낙선운동은 생활문화가 세계화 정보화 영향으로 바뀌면서 낡은 정치틀을 거부하는 데서 생기는 현상입니다. 쌍방향의 인터넷 네트워크로 체화된 신세대적 정서가 그 운동의 주축이 되는 것이죠. 따라서 이 운동은 단순한 진보 대 반진보 대결이 아니라 생활문화의 진보성과 일방통행적인 정치권력의 충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건은 쌍방통행식 소통이 잘 되느냐 여부로 판가름납니다. 특히 신세대들은 언론의 일방통행식 정보전달에 '닭살'이 돋는 사람들입니다. 젊은 세대의 반권위의식을 냉소가 아니라 저항적 참여로 이끌어내려면 이들과 교감이 직통하는 창구를 만드는 데 시민단체 기획자들이 특별히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진보진영의 테두리에서 생태주의, 페미니즘, 자치주의 등의 현안을 아우른 미니정당들도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물론 국보법 철폐 등의 개혁사안 안에서는 연대해야죠.

조희연: 군소정당 형성은 부문별 진보사회운동에서 진보정치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울 때만 가능할 겁니다. 반면 이번 총선전에서는 정반대로 지역주의가 강화되고 있다고 많은 이들이 느끼고 있습니다. 특히 민국당 출범은 한나라당의 영남 대표성 분열, 지역주의 약화로도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요.

박노해: 이런 파렴치한 양상은 지역색에 기초를 둔 자신있는 '베팅'에 해당합니다. 결과적으로 지역당에 기초한 보수세력을 재분열시키는 것이고 같은 지역 안에서 다시 지역감정을 더욱 세분화시켜 나가는 구실을 합니다. 특히 경상도 사람들은 '전라도와 김대중 좋은 일만 시켰어'라고 반응하다 '지역이란 것이 뭐지'하는 식의 정서적 충격을 겪을 것 같아요. 같은 지지기반을 놓고 분열하는 것이므로 이전처럼 막연한 감정 대응에서 벗어나 지역성과 정치현실에 대해 더욱 냉정하게 인식할 것이라고 봅니다. 벌써 영남쪽에서는 '기권하자'는 말들이 나오지 않습니까.

조희연: 낙천낙선운동 수혜자인 386세대의 행보도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한나라당에 입당한 일부 운동권 출신들에 대해서는 청년진보당 등에서 화형식을 할 정도로 반발이 컸습니다.

박노해: 386정치신인들은 획득과쟁취란 양면을 함께 봐야 합니다. 획득 측면에서 부정과 냉소 측면이 나타나는데요. 옛날에 같이 싸웠는데 이제 그 운동권 '의장님'들이 다 정치권의 한 자리를 차지하느냐는 것이죠. 이는 절못된 감정의 발로라고 봐요. 쟁취라는 면에서는 긍정적이죠. 현실정치는 준비된 이들이 인풋으로 들어가야 물갈이, 즉 아웃풋이 됩니다. 민주화 운동이 '빨갱이'로 몰리던 운동권 출신들을 정치인으로 나오도록 요구하는 상황을 만들었다는 점은 결실입니다. 하지만 386 정치지망생들은 사회주의권 붕괴 뒤 새 철학과 새 생활문화로 나가거나 기성정당에 충원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서글픈 한계를 지닙니다. 기존 정치인들보다는 낫겠지만 운동정신이 정치판에 구현되기는 힘들겠죠. 한계야 어쨌든 격려를 보내고 싶습니다.

조희연: 386세대의 진출통로를 제도정치만으로 국한해서는 안되겠지요. 지자체, 시민운동 등 다양한 현장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죠.

박노해: 벤처 기업도 386세대들이 가면 분위기가 다르다고 합니다. 시민단체, 노동계, 생활문화 운동쪽에도 일은 널려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몇몇 386후배들에게 자꾸 정치만 넘보다간 첫 마음 잃고 정치 건달 된다."고 당부합니다. 정치권에 입문한 386후배들에게는 우리가 있음을 잊지 않도록 소통의 끈을 놓치지 말아야죠.

조희연: 시민단체들은 최후 성역인 언론 개혁 문제가 해결없이 정치개혁도 불가능하다란 말을 많이 합니다. 그 점에 대한 견해가 궁금하군요.

박노해: 언론은 시민권력의 핵심이자 국민들의 교과서입니다. 특히 신문은 제일 자주 접하는 지식정보교뮥매체로서 언론개혁의 관건이죠. 저는 신문의 전국지 현상을 우려하는데요. 세계적 권위지 <뉴욕 타임즈>가 기껏해야 60만부밖에 안되는데 우리는 중앙 일간지가 전국 여론시장을 좌우하고 있어요. 좁은 시장에서 계속 부수, 광고 경쟁을 하다가 보니 정보의 질이 떨어지고 자본에 예속되는 현상만 생깁니다. 보수신문의 기득권적 역사성을 볼 때 진보적 대안언론과 지방 언론들을 제자리에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조희연: 총선보도 언론 모니터 과정에서 공정보도의 걸림돌로 <조선일보>를 흔히 언급합니다. 시민운동의 힘이 커지면서 보수언론의 여론 휘몰기 구도에 금이 간 것은 사실이나 여전히 <조선일보>는 시민사회 개혁의 최대 장애물이란 얘기가 나옵니다.

박노해: <조선일보>를 극우라고 비판하는 것은 추상적입니다. <조선일보>가 우리 사회 기여도 여부를 떠나 민족사의 최대과제인 남북협력과 화해를 가로막고 있다는 비판이 부각되어야 합니다. 민주개혁 실체인 시민운동에 대한 부정적 입장, 사회적 약자와 나라에 많이 기여한 노동계급과 노동운동에 부정적인 태도를 취한 점 등도 비판의 핵심이유로 꼽고 싶습니다. <조선일보>의 기고요청을 받으면서도 거부하는 것은 그런 까닭입니다. 공고한 '사주황제체제', 정치적 줄타기식의 논조 등도 덧붙일 수 있죠. 그러나 정작 진보진영이 간과하는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이 신문의 강점인 글로벌 마인드의 일관성, 생활문화 정보의 풍부성, 취재의 심층성, 기획 캠페인의 탁월성 등이 그것입니다. 가치관을 배제하고 <조선일보>의 상품가치가 뛰어나다는 데는 이견이 없어요. 조선일보가 가진 광범위한 독자대중들에게 어떻게 진보적 메시지를 전할까 고민해야 합니다. 비판적 지식인으로 행세해온 작가, 학자들이 진보적 내용도 아니면서 얼굴 내미는 것을 피해야겠지만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낼 기회가 있다면 활용해야지요. 조 교수도 노동, 총선문제에 대해 명확한 견해를 제시할 지면이 있다면 기고해야지요.(웃음)

조희연: 박 시인은 아직도 스스로를 혁명주의자나 사회주의자로 생각합니까. 80년대 혁명가로서의 삶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요.

박노해: 박노해가 숨쉬고 살아 있는 것은 분명히 혁명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지금도 혁명가라고 말합니다. 가치와 이상으로서 사회주의는 변함없는 나의 사상이지만 이제 사회주의가 유일주의 이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현재 나는 철저하게 개인의 삶, 생활민중 속에서의 혁명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옛날엔 극우 반공주의자만 적이었는데 지금은 적이 더욱 많아졌습니다.(웃음) 페미니스트나 친 신세대를 표방하니까 문화보수적인 기존 운동권 일부가 비판하고 글로벌 마인드 이야기를 하니 노동계쪽에서 반감 보이고 그럽니다. 그럼에도 새로운 생활진보에 대한 욕구를 직접 확인했고, 이를 운동으로 네트워크화시키고 뿌리내리기 위해 한길을 정진하려고 합니다.

조희연: 5월부터 새 실천을 준비한다고 <현대사상>과의 대담에서 밝혔는데 어떤 내용들을 준비 중인가요.

박노해: 나눔문화운동을 준비 중입니다. 20세기의 한국 시대정신이 경제성장, 평등이라면 21세기엔 경제성장이 삶의 질로, 평등은 존재의 평등으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나눔이라는 주제를 꺼낸 것도 새로운 평등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죠. 그래서 '독점은 악이다. 나눔은 선이다.' 를 제 운동의 핵심구호로 삼으려 합니다. '국민지식정보나눔'을 중심으로 북한동포돕기 등의 '우리민족나눔', 생산자-소비자 소통망인 '좋은 이웃 나눔', 신세대의 시민운동 참여를 위한 신세대 모임, 그리고 일상생활 속에서 진보의 뿌리를 키워가는 콘텐츠 형성운동 등을 구상중입니다. 시민운동에 분야별 진보성을 접목시켜 주는 것도 목표가 되겠지요.

조희연: 잘 들었습니다. 박 시인의 글들이 다양한 희망을 변주해온 것처럼 진보운동 또한 거대한 변화속에서 새 희망을 길어 올릴 것이라 생ㄱ각합니다. 박 시인의 고투가 우리 모두가 희망을 찾는 길목에 중요한 반려자가 되기를 바라면서 대담을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