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1

추억#1

오늘은 일이 있어 동의 의료원에 갔습니다. 오르막 길 앞에서 300M 전방에 병원이 있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혼자 속으로 투덜대며 짜증스럽게 길을 오르는데 주변이 너무나 눈에 있었지요. 어디서 본 듯한 골목길을 걷는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다름 아닌 할아버지가 사시던 성북동 골목길이랑 비슷한 길이었습니다.

좁다란 골목길 사이로 세상 때가 묻지 않은 어린이들이 여기저기서 뛰어다니고 길가엔 아침부터 장사를 나온 채소를 실은 트럭들이 낯익은 스피커 폰 방송을 해대고 있었습니다. "자~싱싱한 배추..."로 시작하는 소리가 싫지 않았습니다. 골목 한 구석에는 지금은 잘 찾아볼 수 없는 나무로 된 미닫이 식 문으로 된 구멍가게가 보이는데, 어릴 적 사촌 형과 신호등처럼 생긴 50원짜리 사탕을 사먹던 생각이 났습니다.

내가 어릴 적에 할아버지가 사시던 집은 한옥 집이었습니다. 우리는 명절 때면 그 곳에 놀러 가곤 했었는데 그 곳에만 가면 꽤나 얌전했던 나였지만 어느새 개구쟁이로 돌변하곤 했습니다. 같은 또래인 사촌 형과 반나절을 뛰놀며 할아버지가 심은 대추도 따고, 흙장난도하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딱총놀이도 하고... 그러다 지치면 구멍가게에 들어가서 몇 백원 씩 내고 과자를 사먹었지요. 왜 하필 그 생각이 지금에서야 나는 것인지. 따지고 보면 그 골목길이 성북동의 그 길과 그리 닮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지나가다 길가에 드러누운 개와 눈이 마주쳤는데 기분이 묘했습니다. 그 개는 나를 한 번 쳐다보곤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쳐다보고 다시 돌리고... 아파트의 개들은-요사이 하도 말이 많아서 아파트에 개를 못 키우게 하는 곳이 대부분이지만-문 밖에만 가면 지칠 줄 모르고 짖어대는데 이 녀석은 굼뜬 건지, 아무튼 나를 웃게 만들었습니다. 선한 눈빛을 가진 그 강아지의 눈빛이 떠오릅니다.

돌아오는 길에 내 자신이 아마도 많은 것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내 삶에 있어서의 따뜻함이랄까...그리고 순수함, 무모함 같은 어린 시절 가지고 있던 마음들을. 가끔 선거 때문에 정치인들의 얼굴을 보면 많이 놀라곤 합니다. 그들의 얼굴 속에서 세태에 찌들은, 속고 속이며 부정과 부패의 도가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렇게도 가식의 행동에 익숙하려 만든 주름살들. 누구에게서 인지는 모르지만 40대가 지나면 남자는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납니다.

이젠 나에게서도 그런 모습이 보입니다. 누굴 구체적으로 속이려 들지 않더라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몸 속에 베여 드는 보수적인 성향들. 내 감정을 숨긴 채 상대방에게 다가서는 모습들. 교양이란, 예의란 이름아래 난 진정하고 순수한 표현의 자유를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언제부터인가 나의 진실한 마음을 누구에게도 내보이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내 자신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나도 내 마음을 모르고 있었다고 변명하고 싶지만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알면서도 자신을 숨긴 것입니다. 그렇게 늙고 있는 것이지요. 끊임없이 껍질을 만들며 그게 나인 것처럼, 다시 싸고, 다시 싸고...

그 골목길을 들어서는 순간. 난 그 시절의 파랗던 내 마음을 보았습니다. 너무나 부러웠습니다. 마치 다윗이 언약궤 앞에서 자신의 가식 없이 춤을 추는 모습을 떠올릴 때면 저는 그런 그의 모습이 너무 부럽습니다. 때때로 내 모습을 보면 많이 갑갑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마 수많은 10, 20대 청소년들이 자살을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들에겐 미래가 끔찍할 테니까.

정말 좋은 노인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새삼스럽게 해봅니다. 주위엔 귀감이 되는 분이 없는 것이 저를 두렵게 합니다. 나도 그런 노인 중의 한 사람으로 생을 마감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저의 짧은 평생에 작은 바램이 있다면 나의 어린 시절처럼 숨김없는, 그리고 아름다운 마음을 내 남은 생에도 여전히 가진 채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