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자가 되기를

새로운 천년을 맞으면서

진보와 좌절, 자본과 국가 사회주의...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어느덧 많은 담론들을 무성하게 생산해내었던 1900년을 보내고 2000년을 맞게 되었습니다. 20세기 말로 들어서면서 인간의 가치라는 화두는 폐기되고 대량생산, 빠른 속도, 자본이 가치를 산출하는 사회로 전환되어 가고 있음은 이론가들 뿐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소시민들에게도 낯설지 않은 경험이 되고 있습니다. 영화 <You've got mail>에서 보듯이, 막대한 자본을 앞세워 새로 생기고 있는 대형 서점들 앞에서 작은 서점은 무너질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물론, 영화는 자본의 문제를 교묘하게 비켜가지만...) 특히,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가 이른바 신자유주의 체제를 더욱 확고하게 만들고 있으며, 영국에서는 제3의 길을 제시하여 지금까지도 여전히 제3의 길은 있다, 없다라는 논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들 기득권층인 20안에 들어가고자 애쓰며, 기득권 세력들은 80의 소외계층에게 관심없이, 나아가서는 그들의 상황을 고착화시키려는 시도들이 공공연히 일어나고 있는 현실입니다.

잃고 있는 가치들을 붙잡아야 함에도 우리는 거대 체제 안에 동화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여기고, 또한 그 안에서 고착된 상황을 인정한 채,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의 행동을 합리화하기가 쉬운지도 모릅니다.

가끔씩 여기저기에서 일어나곤 하는 <...살리기>라는 이름의 운동들은 용두사미처럼 비참한 결과들로 매듭지어지고 있으며, 자본이 없이는 어떤 운동도 해나갈 수 없는 사회가 되고 있음을 실감합니다.

얼마 전, 극장에서 큰 흥행을 거둔 영화 <Matrix>는 우리에게 너무도 큰 교훈을 남겨 주었습니다. 영화 속에서 matrix안에 갖힌 사람들을 구하고자 함께 일하는 이들 중 한 사람이 동료들을 배신하게 됩니다. 그의 대사는 너무나 현실감이 있습니다.

"이 포도주는 내 머리를 자극해서 만들어낸 가상이겠지. 이 고기도 그렇고.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어. 어차피 현실이든 matrix안이든 난 구차한 생활은 이제 신물이나!"

그렇게 생각될 때가 많습니다. 내가 속한 세대에, 내가 속한 조직에, 내가 속한 사회에 역행하기 보다는 순행하기가 더 쉬우며 그것이 설령 바른 가치가 아니라 하더라도 가치관을 뒤집기만 하면 더 편안한 마음과 삶을 살 수 있기에 그렇게 타협하며 살고 싶을 때도 많고 지금도 그런 삶을 살고있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구석에서 짓누르는 이 불편한 마음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신영복 교수의 말처럼, "진실이 아닌 것은 또다른 절망을 안겨다 줄 뿐입니다"

신 교수가 작년 중반 즈음에 TV에 모습을 비춘 적이 있습니다.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는 어떤 사회가 될 것 같냐는 사회자의 질문에 자신의 책에서 썼던 말을 인용하였습니다. "어리석은 자의 우직함이 세상을 조금씩 바꿔갈 것입니다." 신교수는 세상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현명한 자와 어리석은 자. 현명한 자는 세상에 자신을 빠르게 맞추는데 능한 반면 어리석은 자는 우둔하게도 세상에 계속 질문을 던지고 고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많은 곳에 진정한 변화가 생기리라는 이야기로 대담을 마쳤습니다.

자크 엘룰은 그의 평생에 많은 저서와 사회운동을 했던 기독 지성인이었습니다. 그의 생전에 많은 이들이 그를 회의론자라고 비난하며 그의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미래는 암울하기 그지없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밖에 없다는 식의 푸념을 해대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엘룰의 분석은 대부분 정확한 편이었고, 그의 글 속에서 그는 "...이런 현실 속에서 지금이라고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와 같은 비참한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여 왔던 것입니다. 지난 한 세기동안 그의 예언자적 글들은 현실화되기 일쑤였고, 그럼에도 그는 암울한 현실 속에서 행동하는 지성인으로 일평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사실, 한 해 한 해가 늘어갈 수록 저는 말하고 글을 쓰는 것이 겁이 납니다. 솔직하게 그러한 점을 숨길 수 없음도 고백합니다. 나의 삶을 바라볼 때, 이율배반적이며 지행합일이 되지 못하는 사탕발림같은 언변에 스스로가 환멸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멈출 수 없습니다. 혼자 떠들어 대는 것 같아도, 때론 했던 말들을 무색케하는 삶을 살더라도... 누군가와 함께 같은 생각을 가진 채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 좋을 것이라는 기대감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마 평생을 살아도 저의 삶은 참으로 미약할 것입니다. 아무런 사회에 도움도 되지 못할 지도 모릅니다. 또한, 청년기 때에 품었던 비전들을 하나하나 덮어둔 채로 그렇게 정의에 대한 날카로움이 사라질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와 같은 미약한 나무들이 주변에서 많아진다면, 그런 사람들과 함께 살아간다면... "더불어 숲"을 이루어 함께 비전을 공유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우직한 사람들,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아져서 그들과 함께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