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틀입니다..

jumper

　

내가 다니는 회사가 추구하는 덕목 중에 "현장 경영"이란 게 있다. 회사의 경영에 있어 현장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덕목에 맞추어 회사의 모든 직원은 작업복 형태의 jumper를 입는다.

난 처음 이 회사에 들어왔을 때, 대기업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지침에 따라 간부부터 사원까지 동일한 jumper차림의 모습이 좋았다.

사실 같은 jumper차림이라 하여 노사간의 위화감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그런 위화감을 덮기 위한 얄팍한 회칠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그런 것들 일체를 긍정한다 하더라도
같은 jumper차림의 전 직원이 가져다주는 상징성, 그 기표로서의 천쪼가리는 내게 나름의 의미를 가져다 주었다.

연초에 한창 신입사원 교육을 받으면서 나는 공장 실습과 영업 실습, 그리고 정비소 서비스센터 실습을 하면서 jumper를 지급 받았다.

어디에서나 출근하여 업무 중에는 그 jumper를 입었다.

드디어 모든 실습 교육이 끝나고 연구소로 "입성"했다.
팀배치를 받고 신입 사원 OJT가 시작되자 팀의 서무 아가씨가 신입사원들의 상의 사이즈를 다시 쟀다. 그리고, 당일 저녁 새 jumper가 지급되었다.
내가 기존에 받은 jumper는 앞쪽에 "현대 자동차"라고 쓰여 있으나 거기에는 "기술 연구소"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그 말은, 그 jumper를 입고 있는 사람은 연구소의 연구원임을 의미했다.

그 날, 공교롭게도 내 차례에서 맞는 사이즈의 jumper가 다 바닥이 났다고 했다. 주문을 해서 받으려면 1주일 정도가 소요된다는 서무 아가씨의 말에 나는 평소보다 조금 흥분하고 얼굴이 붉어졌다. 모두가 자신의 jumper를 벗고 새로 지급된 것을 입는데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 나는 사실 알고 있었다. 내가 흥분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이유를..
머리 속으로는 "현장경영"이다 jumper차림이다 그렇게 좋아했지만, 사실 나는 공장에서 라인을 탈 때도, 영업소에서부터 시장으로 나와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자동차 세일즈를 할 때도
서비스 센터에서 엔진 오일을 갈며 기름 때를 묻히고 있을 때에도, 그래.. 이 일과 나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결국, 짧은 기간 동안 바닥 일의 맛만 보고 종국에는 고차원적인 일을 하는 연구소로 간다는 그 쓰레기 같은 생각을 말이다.

그 곳 직원들이 입던 회사 jumper를 입고 1주일 동안을 연구소에서 근무할 생각에 난 벌써부터 부끄러웠던 것이다. 연구원들이 나를 현장직이나 영업직, 혹은 정비사로 볼까봐..

그게 그렇게 싫었던 것이다.
대학에 대학원 공부한 게 뭐그리 대단하냐 생각했으면서도 어느새 내 혈관 깊숙이 에서부터 난 이미 대접받고 싶었던 것이다.

난, 스스로에게 패널티를 주어야 했다. 내 사탕발림같은 낮아짐의 사고는 내 신앙을, 내가 믿는 예수를 두 번 못박았다.
무엇보다 내 양심에, 나란 사람의 가치를 그런 허접한 것에 두었음을 매 순간마다 나는 사소한 일에서부터 겉멋에 절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날부터 지금까지 난 "현대 자동차"란 글귀가 새겨진 jumper를 입고 다닌다.
사실, 신입 딱지를 떼고 나서는 jumper에 뭐라고 씌여 있는지에 관심을 갖는 이들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도 내겐 또 다른 부끄러움이다. 그건 마치 소비에 미쳐있는 부자집 자식들이 서로의 옷에서 브랜드를 찾아대는 꼴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매 순간 낮아짐, 썩어지는 한 알의 밀알, 섬김..
이런 고귀한 말들을 떠들어 대지만, 정작 나도 누구보다 속물 근성에 절어 있어 날마다 매 호흡마다 스스로를 쳐서 낮아짐의 본을 보이신 예수의 성품에 내 자신을 복종시켜야 하는 그런 연약한 사람임을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