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7월 31일'

/박총 (복음과상황 편집위원)

1989년 7월 31일,

그날 안해와 처음 만났죠.

광명시에 있는 한 교회 유아실이었죠.

새신자 환영회로 모였을 겁니다.

그때 저는 고3, 안해는 고2였어요.

여름방학 중 1차 보충수업 끝나고 2차 보충수업 들어가기 전에

며칠 학교 안 가도 되는 시간이 있었거든요.

그 때 교회에 놀러갔다가 새신자로 온 우리 恩海(안해 호)를 만났던 거죠.

나는 문 쪽에 앉아 있었고, 안해는 오른쪽 가운데 편에 있었죠.

육상부 소녀 같이 짧은 커트 머리를 한 그녀의 얼굴이 너무나 귀여웠지요.

들키지 않으려고 안경 없는 눈을 찌푸리며 그녀의 얼굴을 훔쳐보았지요.

좀 특이했던 저와 달리 안해는 지극히 평범한 여학생이었어요.

저는 고1때는 헤비메탈 밴드를 한다며 기타와 LP를 끼고 살았고,

고 2땐 시인이 되겠다며 로뜨레아몽과 보들레르를 끼고 살았죠.

고3 때도 별반 다르지 않아서 연애질 하고, 심야영화보러 다니다가 트럭 뒤칸에서 잠자고,

공고 다니던 후배들 대학 보내려고 자정이 넘도록 공부 가르쳐주는 등 엉뚱한 짓을 많이 하고 다녔죠.

각설하고 안해는 가난한 집의 7남매 중 6째라 집에서

다복하고 넉넉한 집에서처럼 많은 애정을 받고 자라질 못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사랑을 표현하는 데 익숙하지가 않은 편이예요.

공부를 잘하는 우등생도 아니었고

(지금도 애들 잠만 자면 죽어라고 해리포터 시리즈를 읽어대지만 공부엔 별로 관심이 없죠^^),

미모가 빼어난 것도 아니며,

성격도 내향적이라 학교에서건 친구 사이에서건 주목 받는 인생은 아니었습니다.

그때까지 남자 친구 한 번 사귀어 본적 없어서 제가 안해의 첫사랑이 되는 영광을 차지했습니다.

말하자면 안해는 남들 눈에 띄지 않는 지극히 평범한 여고생이었고,

더구나 그때까지는 예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전존재를 사랑에 흠뻑 적시지 못하고 살아왔었답니다.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면 죄에 가려 그만큼 빛을 발하지 못하는 법.

안해는 다른 사람에게는 빛을 내지 못하는 평범한 돌로 취급받았지만,

그녀를 생명처럼 사랑했던 제게는 찬란한 보석이 될 수 있는 原石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랑으로 그녀를 닦고 갈고 다듬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 눈에 콩깍지를 씌워두셨기 때문에

저는 안해의 새뜻함에 늘 감탄하며 ‘이쁘다’를 연발했고,

자신의 약함을 신앙으로 극복하며 현실에 하나씩 도전해나갈 땐

‘장하다, 기특하다’를 반복하며 격려했더랬습니다.

그럴수록 안해는 차츰 빛다발을 발하는 보석이 되어갔습니다.

저는 보석 만드는 작업을 제 안해에게와 사랑에 주린 모든 이에게 하고 싶습니다.

사실 저는 지금껏 안해에게 돈과 여유와 안락함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연애시절에도 줄곧 다리 아프게 하거나 배고프게 하였고,

결혼할 때조차 그 흔한 웨딩 앨범 하나 안겨주지 못했습니다.

대신 저는 그녀를 사랑했고 노래했고 무수히 입맞추었습니다.

그녀를 위해 아파했고 기도했고 가이 없이 축복했습니다.

값나가는 꽃바구니는 여지껏 한 번도 쥐어주지 못했지만

사철 들판의 풀꽃을 달래서 셀 수 없는 꽃묶음을 안겨주었습니다.

무엇보다 지난 세월 동안 저는 그녀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알게 했습니다.

사랑 받기에 얼마나 합당한 여자인지 알게 해주었습니다.

저는 안해의 전존재를 사랑으로 휘젓고 사랑으로 버무렸습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그녀를 주님의 항아리에 담갔습니다.

열매 없음을 한탄하시는 주님께서 시장하다 하시면

한 입 그득히 베어무시라고 맛깔지게 담그었습니다.

더불어 저는 제 안해가 주님과 함께라면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얼마나 가뜬하게 해낼 수 있는지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물론 제가 한 것은 아닙니다.

상투적인 표현이라 쓰기 싫지만 모두 주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우리 된 것은 전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안해를 통해 뜨거우나 격정적인 나는 다듬으셨고

나를 통해 잔잔하나 식어 있던 안해 속엔 사랑을 일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안해는 어느 날 엽서에서 제게 이렇게 썼던 것입니다.

“여보 당신을 통해 사랑을 배웠어요. 앞으로 더 많이 사랑해줘요.”

그렇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제가 그녀에게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세상 살아가는 일이 모든 일이 처음 마음만은 같지 않은 것처럼

작년 가을부터 우리의 사랑이 예전처럼 새뜻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혼자 답답하기도 하고 서로에게 다소간 원망을 보내기도 합니다.

이는 그간의 사랑에 겸손하지 않고 당연시했기 때문일 겁니다.

주님의 사랑이 나를 통해 드러나도록 하지 않고 내 것이 드러나게 했기 때문일 겁니다.

모든 사랑의 몸짓이 반복되면서 처음처럼 가난한 마음으로 감격하며 기뻐하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흔히 말하는 매너리즘이라는 것이 한 몫 거들기도 했을 겁니다.

또한 현재 우리가 처한 현실이 이전보다는 조금은 더 고달픈 데에도 원인이 있을 겁니다.

더불어 시시로 머리를 드는 작은 애정의 몸짓들을 어쩔 수 없이 살며시 눌러야 하는

공동체 생활에서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정도와 시기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별다른 계기가 없는 한 대부분의 부부들이 같은 상황을 맞이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희는 ‘다 이렇게 사는 거지, 뭐’ 하면서 ‘정’이라고 하는 밋밋한 것에만 기대어 살고픈 마음은 없습니다.

오히려 이런 기회로 인해 더욱 간곡히 주님의 사랑을 구하게 된 것을 깊이 감사하고,

더 놀라운 사랑으로 채워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결혼 4년차에 아이가 3살인 30대 부부의 사랑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알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주님께 대해는 것처럼 첫 마음으로 서로를 뜨겁게 그리고 풍성하게 사랑하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누리고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이웃들에게 나누고 그들을 섬길 수 있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나아가 저는 오늘 이렇게 기도합니다.

저는 제 안해를 주신 주님께 다시 그녀를 돌려드릴 때까지

사랑으로 곱게 닦고 다듬어서 한층 더 주님의 빛을 영롱하게 비추는 보석으로 빚어갈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러다가 그날이 오면,

묵시록에 쓰신 것처럼 주님께서 쓰실 면류관에 제 안해를 곱게 달아주실 겁니다.

어쩌면 주님은 제 안해라는 보석을 친히 끼실 반지에 든든히 박아두시고

그녀에게 영원토록 입맞추실 겁니다.

우리 두 사람이 만난 지 13년째 되는 날을 맞아

이 글을 작고 약해 보이나 우리네 뒷산 같이 넉넉한 그녀에게 건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