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의 힘"을 보고...

강원도의 힘을 보고: 대체 무엇이 예술인가

/유재희(복음과상황, 1998. 5.)

홍상수 감독의 "강원도의 힘"을 보면서 '비평의 최면 효과'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절감했다. '벌거벗은 임금님'에 등장하는 사기꾼들처럼 때때로 비평가들은 시시한 영화들을 대단한 걸작이라고 떠벌인다. 그 말을 듣고 잔뜩 기대를 하고 영화를 본 관객들은 당황한다.

그때부터 벌거벗은 임금님을 본 어리석은 군중들의 고민이 시작되는 것이다. 지금 내가 본 것은 임금님의 알몸뚱이인데, 훌륭한 대신들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훌륭한 옷이라고 칭찬을 하니 차마 진실을 밝힐 수가 없는 것이다.

홍상수 감독의 전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보면서 나는 그다지 흥미를 못느꼈다. 무엇보다 세계를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이 무관심해서, 관객인 나도 영화를 보는 동안 좀 찝찝한 기분이 들다가 돌아서면 잊어버리게 되는 그런 영화였다. 그런데 이 영화가 국제 영화제에서 상을 많이 탔다. 그 후 비평가들이 입을 모아 칭찬하는데, 그 영화의 예술성이 바로 일상성의 자유로운 표현에 있단다. 그리고 만만한 리얼리즘이 다시 비평가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강원도의 힘"을 보니 역시 감독이 세계를 보는 시선이 무관심하고 유약함에는 변함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독 나름의 일관된 철학이 있는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가 훌륭한 예술인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강원도의 힘"에 대한 비평가들의 기대는 은연 중에 내게도 감염이 되어 시사회에서 그 영화를 보는 동안 내내 혼란스러웠다. 영화를 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영화에 대해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크래쉬"를 보고 난 후에 느꼈던 그 짜증스러움과 비슷한 감정...

영화는 대학의 전임 강사가 되고 싶어하는 한 시간 강사가 자신이 가르치는 여학생과 불륜에 빠지고 헤어진 뒤에, 서로 모른 채 같은 날 강원도에 머무른다는 삼류 소설같은 이야기다. 이번에도 비평가들은 이야기는 진부한데, 그것을 연출하는 감독의 방식은 새롭다고 설명한다.

말하자면 흔히 한국 영화에서 보는 배우들의 과장된 연기를 극복하고 비전문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연기같지 않은 연기라든가, 화면의 흐름 역시 실제 시간의 흐름에 근사하게 배열한 점, 셋트가 아닌 현장 촬영을 주로 한 점 등이 다르다는 것이다. 어째 30년대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작가들의 이야기를 듣는 듯 하지만, 그건 그렇다 치자. 홍상수 감독의 영화 스타일에 대해 불만은 없다.

유감스러운 것은 세계를 바라보는 감독의 태도이다. 그의 영화를 보면, 인생의 문제가 유부남인데 자기 제자와 이뤄지지 못할 사랑을 하는 것, 나이가 차서 교수자리 하나 얻어야 되는데 그게 잘 안되는 것 따위가 전부다. 그 문제들을 있는 그대로 과장없이(과장할 게 뭐가 있나?)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관객은 그 속에서 자신의 현실을 발견하기 때문에 그 영화가 새롭고 훌륭하다면 나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홍상수의 리얼리즘은 소수의 지식인 집단에나 해당하는 상대적 리얼리즘이다. 그의 시각은 자기가 속한 좁은 세계에 갖혀 있으며, 때문에 그의 영화는 다른 세계에 속한 관객에게는 낯선 이방인의 것으로 남고, 동류 집단에게는 호프집에 모여 날마다 떠드는 수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것이다.

비토리오 데시카의 "자전거 도둑"이나, 켄 로치의 영화들을 리얼리즘이라고 부르고, 나아가 예술이라고 부를 때, 그 이유가 맥없이 어떤 특정한 현실을 왜곡없이 있는 그대로 묘사했다는데 있지 않다. 그 영화들에는 단순한 사실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력으로 우리가 속한 세계를 돌아보게 하는 보편적인 진실이 들어있다. 때문에 계급과 문화의 차이를 뛰어넘어 그 영화를 보고 감동하고 예술이라고 찬양하는 것이다.

비평가와 감독이 범작과 예술을 가르는 기준을 상실한다면, 관객 역시 헤맬 것이다. 하지만 현명한 비평가가 없다면, 관객 스스로가 냉정하고 솔직한 비평가가 되어야 한다. 벌거벗은 임금님을 보고 웃으며 놀려대던 그 어린 아이처럼 말이다.